368화
원래 기본적으로 사람은 저렇게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변했다면 지젤이 왜 흰 호랑이 탑에서 그리 고통받겠는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아무리 두들겨 맞고 징벌방에 갇혀도 공부보다 야외의 즐거움을 택하곤 했다. 짐승새끼들도 저것보다는 더 말을 잘 들을 것이다.
“모라디. 어떻게 생각해?”
“...진심 같긴 한데.”
매우 의심 많은 둘과 달리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이한은 체감하지 못했지만, 이칼도렌 공작의 분노를 직접 대면한 기사들이 느낀 공포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공포.
그런 공포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참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간신히 위기에서 빠져나온 기사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했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중이었다.
“뭐... 별 거 아니었지. 다들 괜찮아서 다행이군.”
상대방의 속셈을 알 수 없어서 이한은 일단 적당히 대답했다.
장단을 맞춰준 다음에 거리를 벌릴 생각이었다.
“아까 맞고 날아간... 아니, 뒤로 좀 멀리 넘어진 그 기사는 괜찮나?”
“뼈가 좀 부러지긴 했지만 괜찮소.”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이한은 슬쩍 지젤 뒤에 섰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대단한 마법이었소.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실력이 뛰어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니...”
“그건...”
이한과 지젤은 동시에 부정하려고 나섰다.
결투 시작 전에 강화 마법을 다 걸어놓은 건 물론이고 유미디후스의 수옥탄 같은 경우에는 시작 전까지 시간을 질질 끌어서 완성시킨 것 아니던가.
사실 이한이 사기치지 않았다면 허용되지 않았을 반칙이었는데 그걸 마법 실력으로 포장해주다니.
“거기에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는...”
“겸손하시오.”
“원래 마법이 이렇게 시간 오래 걸리는 건 제대로 익혔다고 인정해주지 않는...”
“참으로 겸손하시오.”
“......”
마법을 모르는 기사들이라 말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한은 지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대신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물론 지젤은 무시했다.
‘잠깐. 언제 뒤로?’
이한이 뒤로 이동한 걸 깨달은 지젤은 고개를 돌리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자식이...
“보답하고 싶소.”
“무슨 보답?”
“검술을 가르쳐드리겠소!”
“......”
“......”
이한과 지젤은 매우 당황해서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 * *
기사들이 귀족에게 검을 가르치는 일은 생각보다 잦았다.
교양이나 취미, 혹은 가벼운 호신용으로 검술을 배우는 귀족들은 제법 많았고 이런 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기사들밖에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신분이 불분명한 모험가나 용병한테 배울 귀족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귀족은 검술을 배우고 기사는 귀족과 인맥을 만드는 서로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이한 같은 경우는 조금 달랐다.
교양이나 호신용을 넘어서 제대로 된 검술을 혹독하게 실전으로 배운 경우 아닌가.
에인로가드의 검술 강의 중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갖고 있다는 건 제국 전역에 있는 동년배 견습기사들과 비교해 봐도 밀리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이한 정도 실력의 검술을 성장시키려면 교양이나 호신을 생각하고 가볍게 가르쳐서는 안 됐다.
작정하고 깊게 파고들어서, 직접 벽을 깨고 넘어가게 만들어줘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 각오를 하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한의 생각도 지젤의 생각과 같았다.
아무리 봐도 가볍게 가르쳐주려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괜히 검 섞었다가 이한의 실력을 알게 되면 서로 민망해질 상황.
이한은 친구를 믿고 맡기기로 했다.
“네가 거절 좀 해줘라. 모라디.”
“무슨 미친 소리를... 뭐라고 거절을 하라고!”
“내가 병약해서 검술 배우기는 약하다고 하면?”
“......”
지젤은 이한을 미친놈 보듯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걸 병약하다고 말하면 지젤은 눈 뜬 장님으로 소문날지도 몰랐다.
“평소에는 숨쉬듯 거짓말을 만들어내면서... 다른 거짓말은 없어?”
“그런 게 바로 떠오를 리 없잖나. 나보다 네가 기사 가문하고 사이가 좋으니 대신 거절 좀 해봐.”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지금?”
지금 저렇게 진심으로 말하는 기사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것도 상당히 부담이었다.
이한이야 기사 가문도 아니라지만 지젤은 기사 가문 아닌가. 당장 ‘모라디 가문의 핏줄이 은혜를 갚는 걸 방해했다...!’하며 원한을 품을지도 몰랐다.
“...저희가 또 무례한 부탁을 했나보오. 어떻게든 은혜를 갚으려는 게 그만...”
기사들은 이한과 지젤이 속닥거리는 걸 보고 눈치를 챘는지 갑자기 침울해졌다.
“하긴 우리 같은 기사들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지 않을 것이오. 이해하오.”
“아, 아니. 그게... 검술 배우면 좋지. 배우고 싶군.”
“그게 정말이오!?”
“그래.”
이한은 포기했다.
이한이 나쁜 놈이 되느니 그냥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 민망해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 해결됐군. 그럼 난...”
“모라디도 같이 배우겠답니다.”
“......”
* * *
예상대로 30분도 안 되어서 기사들은 민망해졌다.
“크흠.”
“으흠.”
“검술이... 뛰어나시오.”
이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최선을 다했다.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 민망해하는 건 자업자득에 가까운 일이었다.
“혹시 검에 마력을 불어넣는 방법은...”
“순환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일단 불어넣을 줄은 아는데.”
“......”
기사들은 더욱 머쓱해져서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 ‘지금 뭘 가르쳐야 하냐’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면 가르칠 게 없지 않나? 뭘 가르쳐야 하지?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오늘 가르치는 걸로는 불가능하잖소...
-다른 검술이라도 알려주는 건?
-이미 검술 하나를 손에 익히고 파고드는데 다른 검술을 가르쳐줘서 뭔 의미가...
-그보다 마법사 아니었소? 대체 왜 저렇게까지 검술을...?
기사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검술을?!
아무리 생각해도 대귀족 가문에 태어난 마법사가 할 만한 취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이한은 표정을 관리하며 기다렸다.
서로 어색했지만 결국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면 상대도 민망해하면서 보내주리라.
그러면 이한도 ‘오늘 즐거웠네’하면서 나가면...
“어쩔 수 없군. 내 비기(秘技)를 하나 가르쳐드릴 수밖에.”
“비기를?!”
제국에는 수많은 검술들이 있고, 그 중 유명한 검술들은 제법 많은 기술들이 알려져 있었다.
당장 이한이 배운 벽암검도 <바위의 참격> 같은 기술은 검술 좀 제대로 배운 이들이라면 알 정도로 꽤 유명한 기술이었고.
검술이 유명해질수록 그 검술을 배운 검사들도 유명해지니, 그 검사들이 쓰는 기술도 자연스레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들이 모든 기술들을 다 공개하고 다니진 않았다.
모든 기술들을 다 공개하고 다니는 건 자신이 가진 검술의 약점을 공략해달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노련한 검사들은 몇 가지 기술들은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기술들이 비기였다.
‘그걸 지금 가르쳐준다고 바로 배울 수 있나?’
비기를 가르쳐준다고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걸 이한이 배울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당장 이한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알라르롱 같은 경우에도 이한이 벽암검에 완전히 숙련될 때까지 비기나 난해한 기술들을 굳이 가르치지 않았다.
괜히 잘 다루지도 못하는 어렵고 복잡한 기술들을 쓰느니, 기본적인 초식에 충실한 검사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게 알라르롱의 신념이었다.
“실력이 부족해서 배울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데. 정말로 괜찮나?”
“충분하오. 그 천재적인 재능이라면 분명...”
“...그,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상대가 고마워하는 건 알겠는데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너무 찬사를 해대니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기사는 이한을 데리고 안뜰로 이동했다.
다른 기사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기술이었다. 다들 보는 곳에서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조심스러운 기사의 태도에 이한은 슬슬 흥미가 샘솟기 시작했다.
아무리 너도밤나무 기사단이 무력으로 이름 높은 기사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름 기사 아닌가.
그런 기사가 저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기술이라니.
‘뭐지?’
이한은 순간 기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력 순환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거나, 혹은 검에 마력을 불어넣을 때 도움이 되는 기술이거나, 그도 아니면 마력을 응축시키는...
“잘 보시오.”
쉭!
기사가 검을 뽑더니 빠르게 찔렀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찌르기였다.
그러나 그 순간 검의 끝이 길어졌다.
이한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오러로 검날을 만든 건가!?”
검에 마력을 불어넣고 안정적으로 순환시키는 단계를 넘어 응축까지 가능해지면, 검에 담긴 마력은 단순히 보조가 아닌 그 자체로 살벌한 흉기가 됐다.
마법사의 의지로 엮여진 마력이 마법이라는 기적이 되듯이 검사의 의념(意念)으로 엮여진 마력은 오러라 불리는 무적의 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오러의 단계를 한 단계 더 넘어서 겉모습까지 칼날처럼 위장하다니.
상대하는 검사 입장에서는 경악할 노릇이었다.
어지간한 방어구는 버터 자르듯 뚫어버리는 오러가 저렇게 겉모습까지 바꾸다니.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저건 대단한 기술이었다.
단순히 오러만 있을 때와 달리, 그 겉모습이 검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상대는 방심할 수가 없었으니까.
조금씩 늘어나고 조금씩 줄어드는 검을 상대하다보면 거리감각은 물론이고 지금 오러를 쓰고 있는지 아닌지로도 고민해야했다. 동등한 고수끼리의 싸움에서는 치명적이었다.
‘뭐지? 정말 대단한 검사였나?’
“오, 오러는 아니오.”
“...아닌가?”
“그렇소.”
기사는 이한의 호들갑이 조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검 끝을 벽에 찔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러라면 벽에 가볍게 구멍이 났을 것이다.
“...환상인가?”
마법사인 이한은 지금 검 끝에 맺힌 칼날의 정체를 깨달았다.
오러가 아니라 그냥 환상이었던 것이다.
마법이 아닌 검술로 구현해낸 아주 한정적인 환상.
마법으로 보면 별 것 없는 마법이었지만 검술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당장 이한도 속아 넘어갈 뻔했으니까.
“그렇소. 물론 오러 같은 것과 비하면 약간 초라해 보이는 기술일 수 있소. 하지만 이건 꽤 쓸만한...”
기사는 괜히 신경이 쓰였는지 변명부터 시작했다.
그라고 해서 오러를 쓰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마냥 포기하는 것보다는 이런 속임수에 가까운 기술이라도...
“이건 정말 좋은 기술이군!”
“...그,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한의 반응에 기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생각보다 훨씬 더 열렬한 반응이 나온 것이다.
* * *
“정말 고맙군. 이런 걸 가르쳐주다니.”
“그렇게까지 대단할 것 없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말해주니 민망할...”
“아니. 정말 좋은 기술이다. 고맙군.”
이한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배우기 어렵지도 않고, 응용해서 상대를 혼란시키기도 좋은 기술 아닌가.
이한의 취향에 딱 맞는 기술이었다.
기분도 만족스럽겠다, 이한은 상대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해주었다.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군. 정말 훌륭해.”
“......”
옆에서 보고 있던 기사들은 살짝 질투심 섞인 눈으로 동료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찬사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단으로 돌아가고 나서 저 일화로 다른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을 걸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잠깐만...”
“?”
“비기 중에 관심을 가지실 만한 게 하나 있소.”
“...원래 비기가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알려줘도 되는 게 아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