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가증스러운 적의 제안에 이한은 이를 갈았다.
“비열한 놈들 같으니. 위에 있는 함정을 먼저 맞으라는 거군요.”
-위에는 함정이 없어.
“예?”
-위에는 함정이 없다고. 이 위는 감옥이 아닌데 왜 함정이 있겠나.
“...?”
이한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 왜 나오라는 겁니까? 혹시 마법을 못 쓰게 속임수를?”
-그런 놈들이 아니야.
“그럼 뭡니까?”
-...모르겠어.
언데드 마법사는 솔직히 인정했다.
저 감옥의 광전사들이 저렇게 고분고분하게 구는 건 처음 봤던 것이다.
이한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보고 있던 언데드 광전사들이 무뚝뚝한 동작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함정치고는 너무 뻔뻔한데.’
그냥 나가기는 찜찜해 이한은 손을 흔들었다.
뒤로 물러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언데드 광전사들은 뒤로 물러났다.
“...?!”
-물러나잖아?!
언데드 마법사도 이한도 놀랐다.
아까 그 미친놈처럼 달려들던 광전사와 같은 무리가 맞단 말인가?
“내가 가서 확인해본다.”
오골도스는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며 말했다.
여기 떨어진 이후로 후배의 발목만 잡고 있는 게 그렇게 마음이 불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할 일을 조금이나마...
“예? 됐습니다. 안개 깔고 다 같이 접근해보죠.”
“......”
오골도스는 각오가 허무해지는 걸 느꼈다.
* * *
조심조심 접근했지만 정말로 언데드 광전사들은 달려들지 않았다.
우두커니 이한 일행이 천장 위로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
-얽혀서 다리가 되어라... 정말로 안 올 줄이야.
“혹시 올라가려면 마법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마법은 이미 풀렸어. 원래라면 천장이 뚫릴 수가 없지.
언데드 마법사는 뼈로 만들어진 비탈면을 타고 올라가며 말했다.
죄수를 가둬놓는 지하감옥은 강력한 마력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무슨 짓을 해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아까 폭발이 대단하긴 했지만, 지하감옥이 정상적이었다면 천장은 멀쩡했을 것이다.
언데드 마법사는 이제 이한이 했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궁전의 주인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
-정말 놀랍군. 왕께 무슨 문제가 생겼다니.
“......”
이한은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오골도스가 그걸 보고 속으로 걱정스러워했다.
‘괜찮은 거 맞나? 역시 마력을 너무 많이 썼나? 물어봤다가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 아닌가?’
“그... 역시 왕께 충성을 바치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 좀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어 보이시던데.”
이간질을 위해 운을 뗐지만 언데드 마법사는 이한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선선히 대답했다.
-원래 왕은 난폭한 법이지.
“그렇... 그렇습니까?”
‘남 심심하면 가둘 정도로 난폭하면 목을 잘라야 하지 않나?’
-물론 왕을 원망하느냐, 원망하지 않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내 충언을 무시했으니 원망하지만, 내 왕이기 때문에 충성하는 거지. 원래 강한 존재는 군림할 자격이 있는 법.
“...잠깐, 그러면 약해졌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죽어야지. 약해진 왕은 왕으로서 자격이 없다.
뒤에서 끄덕이는 소리가 났다.
이한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언데드 광전사 무리들이 뒤에서 오다가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골도스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저 놈들 언제 저렇게... 대체... 뭔...?
“지금 공격하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맞습니까?”
-그래 보인다. 놈들을 자극하지 마라.
언데드 마법사의 말이 무색하게 광전사들은 잠잠하게 쫓아왔다.
이한 일행이 멈추면 자기들도 멈추고, 이한 일행이 걷기 시작하면 자기들도 걷기 시작했다.
공포가 반복되면 익숙해지기 마련.
이한은 저 언데드 광전사들에게 어떤 행동까지 통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뼛조각 좀 주워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극하지 말라고 했잖...
언데드 마법사는 고함을 지를 뻔했지만 광전사들은 의외로 순순히 주워줬다.
-!
“오...”
-이건...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겠군.
언데드 마법사의 눈빛도 바뀌었다. 마법사는 오골도스에게 말했다.
-너도 부탁해봐라.
“...뼛조각 좀 주워주십시오.”
오골도스의 부탁에 광전사들은 멀뚱멀뚱 가만히 서있었다.
마치 니가 뭔데 명령을 하냐는 눈빛이었다. 오골도스는 민망한 얼굴로 언데드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이건...
“뭡니까?”
이한은 언데드 마법사의 지혜를 기대했다.
-너를 같은 무리로 받아들인 모양인데.
“......”
순간 이한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시험을 통과했거나, 싸움에서 승리해서 인정했거나, 하다못해 마력이 너무 많아서 안 건드린다거나.
다른 좋은 것들이 많은데 무슨 같은 무리로 받아준다는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그게 말이 됩니까?”
-저놈들 자체가 싸움을 좋아하는 놈들이 모여서 뭉친 거니 그렇게 말이 안 되지는...
“제가 무슨 싸움을 좋아합니까?”
-아까 언데드 폭발을 네가 한 걸로 오해한 것 아닌가?
이한은 분노해서 항의했다.
“여기 이 마법사가 했다!”
그러나 언데드 광전사들은 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멀뚱멀뚱 시선을 던졌다.
언데드 마법사는 포기하라는 듯이 말했다.
-말한다고 들을 놈이었다면 이제까지 고생할 이유도 없었지. 말이 통하는 놈들이 아니다.
“아니 무슨...”
갑자기 같은 무리가 된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광전사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급한 게 아니니 움직이도록 하지. 사실 같은 무리로 대우받는 게 나쁜 건 아니잖나? 아니었다면 아까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을 텐데.
“나쁜 게 아니면 마법사 님이 같은 무리 하시면 되겠습니다. 가서 말해보시죠.”
독기 오른 이한의 말에 언데드 마법사는 살짝 위압되서 물러섰다.
-저놈들은 말이 안 통한다니까...
“후... 알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얼마나 남았습니까?”
지하감옥을 탈출해 궁전 안쪽으로 올라온 언데드 마법사의 목표는 하나였다.
궁전 심층부의 왕좌를 확인하고 왕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는 것.
이한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한도 다른 사람들을 찾고 빠져나가야 했으니까.
이 궁전의 지리에 능숙한 언데드 마법사가 심층부 왕좌까지 도착하면 궁전의 힘을 사용해 곳곳에 흩어진 다른 사람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
‘왕은 없다.’
그리고 이한에게는 왕이 없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이한이 팼으니까!
-거의 다 왔네. 정말이지 놀랍군. 이렇게 없을 줄이야. 정말로 왕께서 떠난 건가...
마법사는 중얼거리며 지팡이로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벽이 열리고 길이 생겼다. 방금까지 길이었던 곳은 지하로 사라져버렸다.
“!”
이한의 안색이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공기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질이 달라졌던 것이다.
언데드 마법사는 이한의 안색이 변한 걸 알고 말했다.
-예리하군그래. 강력한 마력 때문에 압박감이 느껴지겠지? 아직 어린 마법사인 만큼 더더욱.
‘안 느껴지는데.’
워낙 많은 마력 때문에 이런 걸로는 절대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이한은 대충 넘어가줬다.
“예.”
-왕의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때문이지. 이 궁전을 유지하는 힘이자 핵. 왕께서 이 안에 앉아 계실 때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는데.
끼이이이익-
거대한 석문이 열리더니 드넓은 접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되자 언데드 마법사는 뼈를 부딪치며 쯧쯧 소리를 만들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꺼져라.
“!?”
왕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언데드 마법사도 놀랐지만 이한이 가장 크게 놀랐다.
저번에 격퇴한 구울의 왕.
그 왕과 목소리가 똑같았던 것이다.
‘벌써 다 회복한 건가!?’
대륙에서 쫓겨나 원래 자신이 있던 차원으로 돌아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타격을 벌써 회복했을 줄이야.
이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오골도스는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했다.
-왕이십니까?
그렇다. 감히 내 접견실에 들어오다니. 가장 끔찍한 형벌을 내려도 모자라겠지만 이번만 용서해주겠다. 꺼져라.
“꺼지죠.”
이한은 속삭였다.
다행히 상대가 이한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용서해준다고 할 때 꺼지면...
그러나 언데드 마법사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뭐라고?
-왕의 부하들은 전부 사라졌고, 궁전을 빛내던 불꽃은 꺼졌으며, 감옥을 지키던 벽은 사라졌습니다. 부하도 궁전도 위엄도 없는 존재가 무슨 왕입니까?
“꼭 도발해야 합니까?”
이한은 언데드 마법사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언데드 차원의 존재들이 추구하는 것은 힘의 논리.
구울의 왕이 폭군이어도 괜찮았던 것은 그에 걸맞은 힘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지금 같이 약해진 상황에서는 그 논리가 반대로 적용됐다.
약해진 주제에 감히?
-어지간히 크게 다치신 모양입니다. 어쩌다 그런 꼴을 당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해보십시오.
언데드 마법사뿐만 아니라 뒤에 있던 광전사들도 갑자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충성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눈빛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위에 있던 자가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보려는 호승심만이 가득할 뿐.
그리고 광전사들은 이한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왕좌를 가리켰다.
“...아니, 잠깐. 지금 설마...”
같은 무리로서 싸우자는 소리를 한 것인가?
이한은 ‘나는 인간이고 너희들은 언데드다’라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언데드 마법사가 공격을 개시했다.
-자, 가짜 왕! 어디 한 번 다시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젠장. 마법사 놈들은 왜 다 겉모습과 다른 거지?’
아까까지만 해도 냉정하고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던 언데드 마법사가 구울의 왕이 약해진 걸 보자 바로 호전적으로 돌변했다.
언데드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힘의 논리였다.
드넓은 접견실 안의 마력이 왕좌로 모이기 시작했다. 안에 있던 마력을 강제적으로 흡수해 힘을 회복한 구울의 왕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중상을 입고 회복을 하고 있다 한들 네놈 같은 마법사에게 질 것 같으냐?
언데드 마법사의 추측대로 구울의 왕은 대륙에서 입은 심각한 타격을 회복하기 위해 궁전의 모든 자원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바깥의 불꽃부터 부하들까지.
오랫동안 봉인된 데다가 기껏 풀려났더니 격퇴당한 만큼 피해가 심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궁전에서 회복한 힘만으로도 저 죄수 놈들은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독이여...
광전사들이 달려들자 구울의 왕은 짜증스럽게 쳐다보았다.
저 지하감옥의 죄수 놈들은 죽지도 않고 기어나와서 일을 귀찮게 만들고 있었다.
다른 죄수들을 공격하는 게 기특해서 내버려뒀더니...
죽어라.
콰직!
구울의 왕은 일렁거리는 형체를 집중시키더니 광전사 중 한 명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살벌한 일격을 날렸다. 그 두꺼운 광전사의 몸통이 그대로 관통당했다.
“...!”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격이었지만 언데드 마법사나 광전사들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전혀 겁먹지 않았다.
“...안개로 퍼져라!”
지독한 독구름이 왕좌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구울의 왕이 형체를 일그러뜨리더니 빠르게 독구름을 빠져나가려고 들었다.
그러자 광전사들이 쫓아가 공격을 퍼부었다. 구울의 왕은 날렵하게 몸을 변형해 공격을 피했다.
“타올라라!”
그 순간 불꽃들이 구울의 왕을 쫓아 날아들었다. 크기는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 작은 불꽃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대단했다. 구울의 왕은 순간 위협을 느끼고 몸을 뒤로 뺐다.
너는...?
구울의 왕은 왠지 모를 낯익은 불쾌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상대 마법사는 뼈로 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