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해골 교장의 경악하는 시선을 눈치 챈 이한은 재빨리 물러났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학술적인 의미로.”
그 뼈가 어떤 뼈인데 무슨 보석 같은 소리를 하느냐?
해골 교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런 영혼들을 견딜 수 없는 약한 뼈면 모를까, 해골 교장의 뼈를 직접 깎아 만든 팔찌는 만마(萬魔)가 요동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당연히 보석도 필요 없었다.
‘아쉽군.’
‘이 자식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군.’
해골 교장은 이한을 보며 욕했다.
저런 양심 없는 놈이...
모르툼 교수였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텐데!
“이 팔찌를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혹시 마력을 크게 흡수한다거나?”
네 마력을 흡수할 정도의 팔찌면 대체 어느 정도의 저주여야 할지 가늠하기도 싫군. 그런 위험한 물건은 아니다.
“쯧.”
...그렇지만 그렇게 쉬운 물건도 아니지. 그 안에 든 존재들을 생각해봐라.
이한은 해골 교장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구울의 왕이 한 말에 따르면, 이 팔찌 안에 깃든 존재들은 구울의 왕에게 패배한 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알겠나? 강한...
“약한... 어. 강합니까?”
그러면 약한 놈들을 굳이 저렇게 가둬서 넣어놨겠느냐?
해골 교장은 이한의 말에 황당해했다.
약한 존재들이었다면 저렇게 가둘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해골 교장이 팔찌로 엮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법 쓸만한 놈들이니 저렇게 만들어서 준 것 아닌가.
“구울의 왕한테 진 놈들이라 생각보다 약한 줄 알았습니다.”
해골 교장은 원래 언데드에게 냉혹한 흑마법사였지만, 이번만큼은 구울의 왕을 동정했다.
새파랗게 어린 1학년 학생한테 저런 무시를 받고 있었다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는가.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안에 있는 놈들이 듣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이야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언젠가 한 놈 정도 튀어나올 수도 있겠지.
저 팔찌 안은 이한이 거쳐 온 지하감옥의 축소판 같은 장소였다.
사납고 고고한 존재들은 같이 패배해서 갇혔다 하더라도 절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빠져나갈 수 없는 울분을 서로를 짓밟는 것으로 해소하려고 했다.
이한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도 팔찌 안에서는 수많은 영혼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한의 실력이 더 오르고 안에 갇힌 영혼들의 흥미를 끌 자격을 갖춘다면...
영혼들은 싸움을 멈추고 이한과 대화를 시도할지도 몰랐다.
“대화라면... 제 명령을 듣는다는 겁니까?”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안에 갇힌 놈들은 다들 사납고 멍청한 놈들일 테니까.
‘방금 말조심하라고 하셔놓고서.’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팔찌의 주인은 너라는 것. 놈들은 갇혀 있는 노예고. 그걸 확실하게 인지시켜라. 그러면 놈들이 명령을 들을 수도 있겠지.
“과연. 에인로가드 학생들처럼...”
해골 교장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러는 사이 가르시아 교수가 오골도스를 지푸라기처럼 가볍게 들어올렸다.
“일단 데리고 나가시죠.”
이한은 그 모습에 교수님을 향한 존경심이 갑자기 차올랐다.
학생을 챙기는 모습 때문이었지 절대 오골도스를 가볍게 들어 올려서가 아니었다.
바로 이동시키는 것보다는 여기서 하루 쉬게 하는 게 낫겠군. 괜히 무리해서 움직이게 하면 덧날 수도 있으니.
“교장 선생님...”
이한은 살짝 감동했다.
해골 교장이 이렇게 챙겨줄 줄이야.
역시 미우니 고우니 해도 같은 에인로가드 사람밖에 없었다.
너 말고 오골도스 말하는 거다. 넌 아주 멀쩡해.
“......”
* * *
오골도스가 여관에서 새근새근 자며 푹 쉬는 동안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에게 밀린 진도를 물어보았다.
2주일 동안 갇혔다는 사실보다 2주일 동안 진도가 밀렸다는 사실이 더 이한을 괴롭게 만들었다.
“2주일이나 늦었단 말입니까!? 전 이제 끝났습니다!”
“이, 이한 학생.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2주일을 따라간단 말입니까!”
‘충분히 따라갈 수 있지 않나...’
가르시아 교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비통함으로 일그러진 이한의 얼굴에 감히 말하지 못했다.
“새 학기 시작이라서 다들 별 거 안 가르쳤어요. 다른 교수님들 모두 기초적인 것들만 가르치셨고요.”
가르시아 교수가 보기에 지금 다른 학파 교수들이 나가고 있는 진도는 이미 이한이 달성한 부분이었다.
솔직히 2주가 아니라 2달 정도 쉬고 와도 따라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가르시아 교수님은 이번 학기에서 어떤 걸 가르치고 계십니까?”
“이번 학기에는 실생활에 유용한 마법을 가르쳐주고 있죠.”
1학기 때 다른 학파 마법들을 소개해주고 기초를 가르쳐 준 만큼, 2학기에는 어떤 특정 학파에 속하지는 않지만 어린 마법사들이 알아두면 유용한 마법들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이런 걸 알아두면 에인로가드에서 살아남기 유리할 테니까.
“...그런 강의를 2주일이나 놓치다니!!”
“지, 지금 가르쳐 줄 테니까 진정해요.”
가르시아 교수가 2주 동안 가르친 마법들은 <성분 분리>와 <하급 암흑 시야>였다.
<성분 분리>는 특정 혼합물을 마법의 힘으로 분리해내는, 물약이나 시약을 준비하는 마법사에게 꼭 필요한 마법이었고 <하급 암흑 시야>는 불분명한 시야지만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둘 다 이한이 이미 먼저 배운 마법이었다.
“어. 둘 다 아는 마법입니다.”
“......”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이 오랜만에 얄미웠다.
“...2학기 강의들이나 설명해줄게요. 못 들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기초 실용 마법>을 가르쳐주는 가르시아 교수와 달리 대부분 강의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초 연금술의 이해 심화>를 가르치는 건 여전히 우레걸음 교수.
마찬가지로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심화>,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심화>, <기초 탈 것 훈련 심화> 등 다들 1학기의 연장선에 있는 강의들이었다.
“다행히 교수님들 중에 실종되신 분들이 없어서 그대로 유지가 됐어요.”
“......”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의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
저걸 지금 저렇게 해맑게 말해도 되나?
“잠깐. 교수님. 저 같은 경우는 늦는 바람에 신청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이한 학생은 어차피 거의 다 듣지 않나요?”
“......”
이한은 말문이 막혔다.
가르시아 교수는 살짝 미안해졌는지 급히 말을 바꿨다.
“그, 그래서 신청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한 학생이 자리에 없어서 제가 대신 신청을 해놨거든요.”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내민 종이를 받았다.
1학기와 거의 비슷한 강의들이 쓰여 있었다.
“교수님. 교장 선생님의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심화> 같은 건 왜 들어 있는 겁니까?”
“네? 필수 강의고... 1학기 때도 들었잖아요?”
이한은 통하지 않아서 아쉽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
가르시아 교수가 노려봤지만 이한은 못 본 척 종이를 쳐다보았다.
‘잠깐.’
이한은 자신의 이름 밑에 적힌 강의 목록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기초 실용 마법-가르시아.
기초연금술의이해 2권(취소선)심화-우레걸음.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심화-배그렉.
마법 인성 교육!
...
“왜 글씨체가 다 다릅니까?”
“아. 몇몇 교수님들은 직접 오셔서 쓰고 가셨어요.”
“......”
이한은 눈을 부릅떴다.
가르시아 교수가 대신 쓰는 걸 떠나서 교수들이 와서 자기 강의를 추가하고 떠났다니.
그래도 되나?
“아니 그런 짓이 됩니까?!”
“어, 어차피 들으려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하지만 안 들을 수도 있잖습니까...!”
“혹시 뺄 거 있어요?”
“없긴 한데...”
“??”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이 뭐가 문제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히 불길하군.’
지금은 괜찮았지만 저게 가능하다는 게 이한을 두렵게 만들었다.
물론 비상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대리를 맡았다지만, 원래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은 자기가 급하면 다 비상 상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이한은 2학년 때에는 수강신청 기간에 교수들 피해 다니면서 제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 잠깐만요. 교수님. <기초 춤과 사교 심화>는 왜 있습니까? 저 이거 들은 적 없습니다만?”
“네? 저도 안 썼는데요?”
“??”
이한도 가르시아 교수도 당황스러워했다.
서로 듣지도 쓰지도 않은 선택 강의가 목록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넣었다.
“아니...!”
이한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무슨 제자의 영혼을 뺏기라도 한 것 같은 배신감에 해골 교장은 어이가 없었다.
강의 하나 더 넣은 게 그렇게 반응할 일이냐?
“제가 저걸 왜 듣습니까?!”
황제 ㅍ...가 아니라 너는 너무 마법에만 몰두한다. 다른 취미도 좀 들어야 해.
가르시아 교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래서 검술도 듣고 탈 것 훈련도 듣고 기하학도 듣고 언어도 듣잖습니까.”
일반적인 제국의 젊은이들은 그걸 취미라고 하지는 않지. 어쨌든 이미 결정 난 거라 못 고친다. 그 정도는 들어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교장 선생님의 마법이라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자기 속도 모르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제자의 모습에 해골 교장은 한 대 때리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나중에 황제를 만났을 때 ‘교장 선생님이 때렸어요’하면 ‘즉시 수도로 오게’하고 날아올 수도 있었으니까.
잠깐, 밖에서 기사들이 날 부르는군!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 저 진지하게 제국 수도에 투서 넣을 수도 있습니다!”
해골 교장은 둥둥 떠서 날아가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온갖 협박을 들어봤지만 그 협박만큼 가당찮은 협박은 처음 들어본다! 어디 열심히 해봐라!
* * *
기사들이 해골 교장을 부른 건 진짜였다.
“고나달테스 님. 모험가들이 하도 소란을 일으켜서 조사를 해봤는데, 그 중에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자들은 어떻게...”
파티원 중 한 명이 범죄자일 경우 다른 이들의 처분은 상당히 애매해졌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만큼,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게 깔끔했다.
그리고 이 자리의 책임자는 해골 교장이었다.
해골 교장은 깔끔하게 해결했다.
너희들은 서로 아는 사이냐?
“아닙니다!”
“멍청한 놈!! 마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거짓말이군. 서로 아는 사이다. 수도 감옥으로 보내도록!
“안 돼! 안 돼!!”
비명을 질러대는 반마법주의자들 사이에서 박드굴은 경악했다.
대체 저 에인로가드의 대마법사가 그들을 어떻게 알고 체포한 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원한을 떠나서 그 가공할 능력이 두려울 정도였다.
‘대체...! 대체 어떻게! 마법으로 예지한 건가!? 말도 안 된다!’
해골 교장이 기사들의 깔끔한 일처리를 칭찬하는 동안 이한이 나와서 말을 걸었다.
“교장 선생님. 선배가 깨어났습니다.”
그래. 슬슬 출발하자꾸나.
“그런데 저 춤과 사교...”
참. 네게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한의 말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해골 교장은 주제를 돌렸다.
“그게 뭡니까?”
원래라면 두려움에 떨어야했지만 이한은 불신의 시선으로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기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고나달테스 님 앞에서 저렇게 건방지게 굴어도 되나?’
‘얼마나 총애를 받길래...?!’
너무 오랫동안 언데드 차원에서 머무른 탓에 네 영혼에서 사기(邪氣)가 물씬 풍긴다.
정령들과 오래 어울리면 정령의 향기가 영혼에서 풍기지만 언데드와 오래 어울리면 언데드의 향기가 영혼에서 풍겼다.
흑마법사들이 괜히 인기가 없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설명을 들은 이한은 의아해했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정령한테는 인기 없고, 흑마법 배울 거면 사기 좀 풍겨도 별 상관없었다.
좀 슬프긴 했지만...
원래는 그렇지. 마법을 배우는데 그 마법의 향기가 영혼에서 좀 풍긴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문제는 네 마력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고, 그 사기가 생각보다 크다는 거고, 마지막으로 원수를 진 언데드까지 있다는 거지.
정령의 향기를 풍기는 마법사는 정령의 방문을 자주 받는다면 언데드의 향기를 풍기는 마법사는 언데드의 방문을 자주 받았다.
거기에 이한처럼 마력이 많고, 사기가 물씬 풍기고, 원수 진 언데드까지 있다면...
어떤 위험한 언데드가 흥미를 가지고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흑마법은 정말 단점이 너무 많군!’
마법 열심히 배우면 언데드 방문을 받는다니.
무슨 이런 마법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쉬운 방법이 있으니까.
“춤과 사교를 듣는 겁니까?”
아니. 불사조 탑에서 지내라. 사제들의 기운이 사기를 몰아내줄 거다. 이번 학기 정도면 충분하겠지.
해골 교장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 별 거 아니었다.
사제들과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저 사기는 빠르게 감소할 테니까.
그러나 이한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장 선생님.”
왜?
“그럼 제 친구들이 굶어죽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굶어죽는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