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교수님. 아무리 생각해도 기숙사에서 바실리스크의 알을 돌보는 건 무리입니다. 잘못해서 부화하기라도 하면...”
“잘못해서?”
“...어쨌든 부화하기라도 하면 사고가 터질 수 있잖습니까.”
버두스 교수의 발등을 밟아주고 싶었지만 거리가 조금 멀었다. 이한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전문가한테 네가 맡는 게 낫다는 조언을 받았다.”
“어떤 미친 전문가가...? 아니,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누굽니까?”
이한은 설마 해골 교장이 그딴 개소리를 했나 싶었다.
“번개걸음 교수.”
“......”
이한은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볼라디 교수의 설명을 자세히 들었다.
설명에 따르면, 번개걸음 교수는 볼라디 교수의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받아 적는다 하더라도 무언가를 키우고 기른다는 건 이론을 뛰어넘는 관심과 센스가 있어야 하는 일.
걱정이 된 번개걸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제자한테 맡기는 게 낫지 않겠냐?
-과연.
볼라디 교수는 그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과연... 그렇지만 교수님. 번개걸음 교수님의 말씀은 제가 기숙사에 데리고 가서 키우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가?”
“타협해서 제 3의 공간에서 키우시죠. 어차피 바실리스크를 돌보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이한은 어디가 좋을지 고민했다.
우레걸음 교수의 오두막도 꽤 괜찮은 선택지였다.
주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고 이것저것 추가로 작업하기도 좋고...
‘음. 식료품 공급원을 화나게 해서 좋을 게 없겠지.’
하지만 우레걸음 교수의 성격상 자기가 아끼는 오두막에서 바실리스크의 알을 돌본다고 하면 토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한은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장소를 잡을 테니 두 분이 지어주시죠.”
“어? 내가?”
“...재료 받아가신다면서요.”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버두스 교수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거래의 개념을 초월하려는 천재의 모습에 이한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볼라디 교수한테 부탁했다.
“교수님. 설득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1분 후 버두스 교수는 설득되었다.
* * *
“낮에는 뜨겁게, 밤에는 차갑게... 벽난로는 물론이고 냉기 마법을 강화시킬 만한 공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열기 강화, 냉기 강화. 둘 다 재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마법인데.”
버두스 교수의 말은 무시하고 이한은 발걸음을 옮겼다.
‘물이 많이 필요할 테니 냇물 근처가 좋겠군. 아무래도 바실리스크인 만큼 인적 드문 곳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고... 자재 같은 건 버두스 교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마법사, 그것도 뛰어난 부여 마법사를 데리고 건축할 때 좋은 점은 이런 부분이었다.
이한은 본관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산맥 초입의 숲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 지어주십시오.”
“알겠어.”
버두스 교수는 군말 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바닥이 단단하게 다져지고 깊게 패이더니 통나무들이 척척 쌓이며 집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넓지는 않아도 꽤 안락한 구조의 통나무집이 빠르게 완성됐다. 버두스 교수는 벽난로 위치에 화염 강화 마법을 시전하고 반대 위치에 냉기 강화 마법까지 시전했다.
‘바실리스크 다 기르고 나면 여기에 식료품이나 저장해놓을까?’
이 정도로 단단하게 잘 지은 건물을 그냥 버리는 건 또 아까울 것 같았다.
이한은 바실리스크 알을 조심스럽게 통나무집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안에서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참. 침입자들 못 오게 해야 하지 않아?”
“교, 교수님...!”
“왜?”
“놀랐습니다. 교수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이야.”
이한은 솔직히 놀랐다.
당연히 바실리스크를 기르는 오두막인 만큼 다른 학생들이 오지 못하도록 탐지 방해나 방향 혼동의 마법을 주변에 걸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걸 버두스 교수가 직접 하다니.
버두스 교수는 우쭐해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다른 놈이 바실리스크를 훔쳐 가면 어떡해.”
“...그, 그렇군요.”
이한은 방금 놀란 걸 취소했다. 버두스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을 시전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나무를 따라서 들어오지 않으면 방향을 못 잡게 될 거야.”
“과연.”
“지금 뭐해?”
“바실리스크 줄 식사 만들고 있습니다.”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가 만들어 준 바실리스크 사료를 냄비에 붓고 물과 함께 끓였다. 고약한 냄새가 통나무집 안에 퍼졌다.
바실리스크를 부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영양이 필요하다. 고문헌에 따르면 ‘하루에 닭 일곱 마리, 양 네 마리, 돼지 다섯 마리, 황소 두 마리, 생선 열여섯 마리를 잡아서 알에게 먹여줘야 한다’라고 적혀 있지만 정확한 방식으로 배합된 사료를 준다면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아니었다면 저걸 다 이한이 잡아와야 했을 테니까.
“냄새가 별로인데 꼭 이걸 만들어야 해?”
“닭 일곱 마리, 양 네 마리, 돼지 다섯 마리, 황소 두 마리, 생선 열여섯 마리를 잡아서 줘도 되긴 합니다.”
“그래. 열심히 해.”
“...안 할 겁니다. 이걸로 줄 거거든요.”
“왜?!”
이한은 버두스 교수의 말은 무시하고 알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의 알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푹 끓인 사료죽을 흡수해댔다.
‘좋아하는 건가?’
알이 살짝 떨리면서 마력의 파동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식사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세심하게 알에게 먹이를 주던 이한은 다음 작업을 준비하기 위해 버두스 교수를 불렀다.
“교수님. 잠깐 먹이 좀 먹여주세요.”
버두스 교수는 냄새난다고 투덜대며 국자를 들었다.
그러자 알이 다시 떨리면서 파동을 뿜어냈다. 이번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교수님.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이한은 설마 싶어서 국자를 뺏었다. 그러자 알은 부정적인 반응을 줄였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바실리스크한테 미움을 받으시다니.’
솔직히 놀라웠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수님. 다음은... 마력이군.”
주기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어주는 작업.
다른 마법사들에게는 아까운 마력을 하루에 주기적으로 뺏기는 성가신 일이었지만...
이한에게는 가장 쉬운 작업이었다.
파아아앗!
아까보다 알이 더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아마 버두스 교수가 멀어져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버두스 교수님은 좀 떨어뜨려놔야 할지도 모르겠군.’
괜히 자꾸 바실리스크한테 스트레스 줬다가 성격이라도 이상해지면 이한만 손해였다.
똑똑똑-
“오셨습니까?”
이한은 통나무집의 문을 열었다. 볼라디 교수가 식료품을 한아름 들고 서있었다.
“뭘 갖고 오신... 통조림입니까? 바실리스크 사료 아직 있는데요?”
“이건 네가 먹을 거다.”
“!”
이한이 감동하는 사이 볼라디 교수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안락의자 위에 누워있는 버두스 교수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식료품들을 쌓아올렸다.
각종 고기, 생선 통조림들과 절인 과일 통조림. 그리고 커피나 설탕 같은 것들도 차곡차곡 위에 올라갔다.
“교수님...!”
“여기서 지내면서 바실리스크를 돌보려면 식량이 필요하겠지.”
“...교수님. 저 저녁에는 기숙사로 돌아갈 겁니다.”
이한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 * *
저녁.
이한은 저번에 했던 것처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불러내 창고를 치우기 시작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작업 한 번에 한숨 한 번씩을 쉬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후...”
“......”
“골렘이 있었다면...”
“......”
“아차... 이제 골렘은 없지...”
“...내일 수리하면 되잖나. 오늘 바빴다고.”
이한의 말에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투덜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뭘 했길래 바쁜데? 그래봤자 공부 아니야?”
“마법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른다니까. 워다나즈는 사람의 마음을 몰라.”
“...교수님 명령 받고 바실리스크 알 부화 준비하느라 시간 보냈다. 됐나?”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내가 워다나즈 놈도 사연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워다나즈 님.”
“무슨 일이지, 시아나 사제?”
플레맹 교단의 뱀 수인 사제인 시아나가 말을 걸어오자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일을 하셨으니까 오늘은 안 하셔도 되거든요.”
“아. 그런데 늦게 오기도 했고 다른 탑에서 오기도 했으니 더 하려고 하는데.”
푸른 용의 탑이었다면 절대 이런 친절을 베풀지 않았을 테지만, 불사조 탑 사제들은 이런 친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시아나 사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있어요.”
“뭐지?”
“원래라면 기도하셨을 시간인데 이 일 때문에 기도 시간을 뺏기고 계시잖아요.”
“그... 그렇군.”
“이제 제 차례인데... 혹시 저 흰 호랑이 탑 분들께서 같이 일하자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건가요?”
“무, 무슨...!”
“아니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터무니없는 오해에 억울해했다.
이한이 끌고 나왔으면 나왔지 그들이 끌고 나왔다니.
너무 억울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올 필요 없는 일에 계속 나오는 이유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요... 게다가 아까도 골렘을 고쳐야 한다고 압박하신 것 같고...”
“압박이 아니라 부탁한 거야!”
“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하시곤 하죠.”
시아나 사제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대체 왜 이런 의심을 받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워다나즈하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있다고 쳤을 때 누가 누구를 팼겠는가?
백이면 백 워다나즈가 범인이었다.
“워다나즈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잖아!”
“그렇지만 마법사는 원래 시전이 느려서 기사들한테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워다나즈한테 그런 불리함 따위는 의미가 없다니까! 원한다면 얼마든지 먼저 기습하는 놈인데!”
“워다나즈 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얼마나 예의바르신 분인데.”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물론이고 이한도 좀 민망해졌다.
평소에 만날 때마다 칭찬해준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놀라운 건 다른 사제들도 저기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맞습니다. 워다나즈 님이 그런 기습을 할 리 없으시죠.”
“아니... 나는 하는데.”
“흰 호랑이 탑 분들이 민망해지실까봐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시는 거군요?”
“그게 아니라 진짜로 한다고...”
이한은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정말로 협박해서가 아니라 같이 하려고 나온 거다. 골렘은 저쪽이 부탁한 거고.”
“예. 뭐.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이한은 지금 설명해봤자 별 효과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옆에서 작업하던 다른 사제들까지 소곤거리는 게 들렸다.
-흰 호랑이 탑 분들이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을 억지로 끌고 나오신 겁니까?
-글쎄... 섣불리 억측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야. 워다나즈. 너 가서 쉬어라.”
“하지만 너희들을 내가 불러왔는데 나만 쉬면 좀 미안하잖나.”
“지금 그딴 소리 할 때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워다나즈에게 협박당한 놈으로 불리는 것보다, 워다나즈를 협박한 놈으로 불리는 게 더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