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이한이 달려가고 있는 사이, 흰 호랑이 탑에 있는 다른 사교적인 학생들도 비슷한 연락을 받았다.
“잉걸델 교수님이 와달라고 하시는데?”
“다리 부러졌다고 전해.”
지젤은 안락의자에 파묻힌 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더르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모라디. 교수님이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어떡하지?”
“그럼 네가 가.”
“......”
더르규는 머뭇거렸다.
솔직히 장클리프 부단장은 상대하기 좀 꺼려졌던 것이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에 모임에서 장클리프 경을 만난 적이 있는 학생이라면 모두 다 알았다. 장클리프 경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인지를.
한 번 붙잡히면 팔을 잘라줘도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였으니 오우거보다 더 끔찍한 적일지도 몰랐다.
“장클리프 경이면 그래도 대단한 기사신데, 이야기를 나누면 배울 게 많지 않나?”
“그럼 네가 가라고.”
“네가 가 임마. 모라디 보내지 말고.”
“......”
만나본 적 없는 학생 한 명이 슬쩍 끼어들었다가 친구들에게 단체로 구박받고 쭈그러들었다.
그... 그렇게 심한가?
지젤은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만 해도 두통이... 어차피 이번 주에 모임 초대 받아서 나가야 하는데, 벌써 만나서 피곤해질 필요가 없지.”
“모라디.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더르규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던가.”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인데...”
“그럼 하지 말지?”
지젤이 빈정거리자 더르규가 헛기침을 했다.
“그... 이한이 초대했다고 한 거 있잖나.”
지젤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검을 하나 뽑아서 옆 탁자에 꽂았다.
“??”
“네가 실례할 때마다 한 개씩 꽂아놓을 생각이야. 일일이 외우려니까 너무 많아서.”
“......”
이름밖에 말 안 했는데!
그래도 더르규는 참고 말했다.
“혹시 이한하고 뭔가... 마찰 같은 게 있었나 싶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옆에서 있던 바트렉이 의아해했다.
같이 초대를 받은 입장에서 무슨 뜻을 가진 질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찰이라니?”
“그... 그게 말이야.”
“그러니까 그거겠지.”
지젤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워다나즈 놈이 초대를 했는데, 그냥 이유 없이 초대를 할 리가 없다. 무언가 함정이 있을 거다. 그렇다면 그 함정이 왜 생겼겠나? 마찰이 있었을 거다. 이런 소리지?”
“꼭 그런 건 아닌... 으흠. 으흠.”
더르규가 민망해하자 바트렉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아무런 마찰도 없... 음... 그. 우리가 탈주한 것 때문에 워다나즈도 잡힐 뻔하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거잖나!”
“......”
“......”
휴게실에서 잡지 읽고 있던 학생, 고구마 칼로 깎아 먹던 학생, 씨름하고 있던 학생, 격구 전술책 읽고 있던 학생 등 모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멈칫했다.
“야. 워다나즈 놈 보면 한동안 피해다니는 게 낫겠다...”
“독이 제대로 올랐겠는데.”
“젠장. 물물교환 좀 하려고 했는데.”
“그 자식이 빨리 물자를 풀어야 시장이 안정된다고.”
수군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고개를 저은 지젤이 한숨을 쉬었다.
“워다나즈 놈이 열받든 말든 알 게 뭔데. 원래 항상 열받은 놈이잖아.”
‘그건 모라디 네가 먼저 찍어누르려고 해서 그런 거잖아...’
더르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젤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용히 참았다.
“중요한 건 기사 모임에 초대받은 이상 안 갈 수가 없다는 거지. 초이 너라면 안 갈 수 있겠어?”
“그건... 아니지.”
아직 견습기사에 불과한 이들이 기사들의 모임에 초대받은 건 대단한 명예였다.
더르규라면 거기에 해골 교장이 있었어도 갔을 것이다.
“그러면 음... 이것만 기억해다오.”
지젤은 대답 대신 단검 하나를 더 탁자에 꽂을 준비를 하고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서 워다나즈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모임 끝날 때까지 피해 다니면서 다른 기사들하고 붙어 있으면...”
“...왜, 아예 백기 들고 다니라고 하지 그래.”
지젤은 어이없어했지만 바트렉은 솔직히 솔깃하게 느껴졌다.
다른 기사들이 옆에 있다면 아무리 워다나즈 놈이 열받아 있어도 좀 자제하지 않을까?
* * *
이한은 볼라디 교수 밑에서 배울 때, 교수가 말이 조금 더 많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말로 설명하면 될 것을 공격과 공격으로 설명하면 그게 짐승 아닌가.
하지만 정말 말 많은 사람을 만나니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는데,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워다나즈 가문하면 제국 제일의 마법명가 아닙니까. 꽤 예전에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께서 공무차 방문했던 걸 멀리서 본 게 기억이 납니다. 마력의 역류로 제국 서부에 대가뭄이 일어났을 때 가주께서 바닷물을 통째로 옮겨서 소금기를 빼버린 다음 저수지를 만드셨는데 지금도 그 저수지가 남아있는 거 아십니까? 저수지 이름이...”
‘환장하겠군.’
이한은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잉걸델 교수를 쳐다보았다.
하도 다급하게 불러서 찾아왔더니!
교수란 결국 본질적으로 학생을 배신하는 존재인 것인가?
‘미안합니다.’
잉걸델 교수도 눈빛으로 사과했다.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알파 가문의 자제셨죠. 어떻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으어.”
데리고 왔다가 졸지에 같이 앉아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앙라고는 꾸벅꾸벅 졸다가 기겁했다.
뭔 대화를 하고 있었지?
‘도와줘...!’
앙라고가 울먹울먹한 눈동자로 쳐다보자 이한은 한숨을 쉬며 대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장클리프 님.”
“오. 궁금하신 게 있습니까?”
장클리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앵무새 수인인 만큼 장클리프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깃털을 갖고 있었는데, 복장도 그에 못지않게 화사하고 다채로웠다.
누가 보면 기사가 아니라 춤꾼인 줄 알 것이다.
“이번 주에 기사단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잖습니까. 아무래도 기사들의 모임인 만큼, 검술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이한의 말에 잉걸델 교수가 화색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째 떠들고만 있었는데 드디어 검술로 넘어가나 싶었던 것이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왜냐? 무엇보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 아니십니까. 원래 워다나즈 가문은 마법명가인데 이 정도의 검기(劍技)를 보여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리에 있는 기사들은...”
“그래도 준비하고 싶습니다!”
이한은 다급하게 말을 잘랐다.
조금만 방심해도 장클리프에게 말을 뺏기는 상황이었다.
뛰어난 검사가 선수(先手)를 독점하고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듯이 장클리프 또한 그랬다.
“그렇다면 참가하는 기사들의 검술을 하나하나 설명해드릴...”
“직접 보여주는 게 어떻겠나, 장클리프 경!”
잉걸델 교수도 지금이 기회라는 듯 필사적으로 외쳤다.
장클리프는 잠시 머뭇거렸다. 잉걸델 교수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한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 이야기하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있군!’
가끔 교수들 중에 저런 사람들이 있었다.
더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좋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다행히 장클리프는 호화로운 순금 장식이 달린 롱소드를 들고 일어섰다.
그 뒷모습을 보자 이한은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정말 실력이 뛰어난 검사가 맞나?’
모라디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라디가 하는 말은 의심하고 보는 이한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이한이 만난 사람들 중 뛰어난 검사들은 모두 다 검술에 미친 것 같은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름한 외투에 검 한 자루 차고서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대단한 고수 같았지만,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화려한 예복과 장식이 달려 있는 검을 보니 이상하게 신뢰가 가지 않았...
* * *
“컥!”
이한은 뒤로 날아갔다.
마치 잉걸델 교수한테 당했던 것처럼, 장클리프는 이한의 암벽 같은 검술을 그대로 깨부수며 들어왔다.
놀랍게도 장클리프는 잉걸델이나 알라르롱에 버금가는 강자였다.
장클리프는 깜짝 놀라서 박수를 쳤다.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한은 쿨럭거리며 기침했다. 몸을 뒤로 날리고, 최대한 검에 마력을 폭발시키고, 마지막으로 몸에 마력까지 불어넣어서 막았는데도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무슨 강검(強劍)이...!’
겉모습과 달리 장클리프는 지독할 정도의 강검을 구사하는 검사였다.
일체의 변초나 허초 같은 건 버리고 오로지 최단거리의 공격만 퍼붓는 검술.
그 공격 하나하나에 지독할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이런 공격이 막히면 검사도 위험했지만 장클리프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기사들 중에서도 공격을 맞고서 워다나즈 님처럼 금세 일어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견습기사들이 이걸 봐야 할 텐데요. 참. 이거 아십니까? 마력은 단순히 마법에만 쓰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육체를 완전히 통제하는데도 쓸 수 있습니다. 방금 공격을 막으신 것처럼...”
이한은 바로 발을 차올렸다. 흙먼지가 치솟자 장클리프는 감탄하며 잉걸델 교수를 쳐다보았다.
워다나즈 가문 같은 대가문 출신 소년이 이런 속임수까지 쓰다니.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것까지 가르치시다니!”
“아, 아니...”
잉걸델 교수는 당황했다.
딱히 가르친 게 아니었는데?
장클리프는 다시 한 번 이한을 날려버렸다. 이한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알라르롱 님의 벽암검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국에서 그만한 중검(重劍)이 또 있을까 싶으니 말입니다. 워다나즈 님은 아마 전반부의 다섯 초식을 배우셨겠죠? 오러를 완벽하게 익히진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벽암검은 제국의 다른 검술과 비교해서 그 초식의 숫자가 적고 단순한 편이었다.
심지어 알라르롱은 중반부나 후반부의 초식들은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오러를 익히기 전에는 위험하다는 게 그 요지였다.
“그렇습니다.”
“벽암검은 제 검술과 맞닿은 부분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워다나즈 님을 보니 예전 생각이 많이 나는데...”
이한은 긴장했다.
설마 과거 이야기를 지금 시작하려는 것일까?
다행히 장클리프는 그러지 않았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가지 기술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장클리프는 온몸의 근육을 응축시키고 마력을 끌어올리더니 마치 쏘아져나가듯이 찌르기를 시전했다.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공격이 터져나왔다. 그 기술이야 단순했지만 안에 담긴 마력의 흐름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 초식을 왜 보여주나 싶으실 겁니다. 맞습니다. 이미 벽암검을 잘 배우고 계신데 굳이 다른 검술의 기술을 따로 배울 필요는 없긴 합니다.”
‘저번에 잡기술들 다 챙겨서 배웠는데.’
“그렇지만 제가 이 초식을 추천해드리는 이유는 지금 마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장클리프는 검을 맞대면서 이한이 마력을 끌어낼 줄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도 단순히 끌어내서 담는 게 아니라, 마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실력 없이 저런 식으로 썼다가는 금세 마력이 고갈되어서 폐인이 된다. 저건 어느 정도 마력을 순환시킬 줄 아는 검사만이 가능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오러의 구체화가 가능해지는 경지!
저 나이에 저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다!’
...물론 이한은 오러 직전까지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라, 그냥 무식하게 마력을 낭비해서 불어넣고 있는 거였지만 장클리프가 그것까지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이 초식은 단순히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 오러로 만드는 감각을 익히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 그런 걸 이렇게 받아도 되겠습니까?”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원래 대가 없는 호의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법.
지금 장클리프의 말에 따르면 아마 자기 검술의 기술 중 하나를 알려준 모양인데, 이건 결코 가벼운 호의가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기사라면 누구나 제국의 젊은 기사를 키워내는 일을 성심껏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기사가 되십시오! 언젠가 명성을 쌓아서 만나길 빌겠습니다!”
장클리프는 분위기에 취해서 비장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멋지게 전해줬으니 이제는 멋지게 떠날 때.
장클리프가 걸어가는 뒷모습에 멍하니 있던 이한과 잉걸델 교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니...”
“여기는... 마법사를 키우는 에인로가드인데...?”
아무리 검술을 열심히 가르쳐줘도 기사가 나오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