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뭐하는 거야?
필은 필사적으로 슥삭슥삭 글씨를 써서 보냈다.
그러나 집중하고 있는 후배는 글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흐음.”
계속 예지 마법을 써가면서 방향을 고쳐나가는 모습에 필은 겁에 질렸다.
‘저 녀석은 겁도 없나?’
예지 마법을 잘못 쓰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수도 있는데 저런 과감한 행동이라니.
“다 됐습니다.”
알카시스 교수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한이 적출해낸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잠깐 쉬고 있어라.”
“감사합니다.”
“저. 교수님.”
필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알카시스 교수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제자를 쳐다보았다.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 하면 되긴 하지만, 후배가 좀 걱정됩니다.”
“...네 일이나 잘 해라. 아직도 슬라임이 그대로군.”
알카시스 교수가 매우 한심하다는 듯이 필을 쳐다보았다.
쓸만한 인재들이 귀한 몇몇 학파에서는 후배들이 들어올 경우 선배들이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생기곤 했다.
그건 후배에게도 선배에게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마법은 스스로 해야 실력이 늘었다.
“제 슬라임은 바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후배가 너무 위험한 방법으로 치유를 하고 있다니까요!”
놀랍게도 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다른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칼 뽑으시는 거 아니야?’
“내가 말했을 텐데... 정말 위험하다면 알아서 실패했을 거라고. 잘 성공한 후배한테 왜 자꾸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
“아무리 그래도 예지 마법으로 저걸 적출하는 건 아니죠!”
“...예지 마법?”
“예!”
알카시스 교수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예지 마법으로 적출했어?”
“어... 보조용으로 썼습니다.”
“어째서?”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서요?”
“......”
알카시스 교수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러더니 선배들을 보며 물었다.
“내가 <질병 감지>나 <생명력 파악> 안 가르쳐줬나?”
“네.”
“안 가르쳐주셨습니다.”
선배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다크 엘프 교수는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까먹었군...”
“......”
“......”
선배들은 물론이고 이한마저 황당하게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걸 까먹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2학년 때 배우는 마법이라 실수했다.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말해라. 예지 마법은 이럴 때 반복해서 쓰기 좋은 마법이 아니니까.”
이한은 교수를 노려보았다. 옆에서 글씨가 새로 생겨났다.
-니가 참아. 교수님이야.
* * *
강의가 끝나고 나서, 이한은 다음 강의 때까지 최대한 알카시스 교수를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교수가 강의 도중 말하는 걸 보니(필, 주중 밤에 시간 비워둬. 환자 온다는군) 이한도 재수 없을 경우 끌려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다짐도 무색하게 이한은 지나가던 알카시스 교수를 다급하게 불러야 했다.
바실리스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오두막에서 평소 하던 대로 먹이를 주고 바실리스크의 알을 돌봤던 이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알이 뭐라도 잘못 먹은 것마냥 부르르 떨더니 오두막 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시작한 것 아닌가.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이한은 바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뛰쳐나왔다.
저 멀리서 알카시스 교수가 보이자 이한은 고민할 틈도 없이 교수를 불렀다.
“교수님! 교수님!”
“크게 부르지 마라...”
안 그래도 불면과 과로로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알카시스 교수는 제자가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왜 불렀지?”
“잠시만 도와주십시오!”
“지금 약 준비해야 하는 게 있는데...”
알카시스 교수는 회중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별 일 아니면 네가 몸으로 갚게 될 줄 알아. 무슨 일이지?”
“바실리스크가 아픕니다!”
“...별 일이 맞긴 하군.”
알카시스 교수는 제자의 평가를 바꿨다.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정말로 빈말을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대체 왜 바실리스크를...”
“이야기하면 깁니다.”
“그럼 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이한은 알카시스 교수의 배려에 고마워했다. 알카시스 교수는 이한의 감사가 황당했지만 귀찮아서 넘어갔다.
“참. 이쪽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
혹시 모를 외부인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환영 마법까지 깔아놓은 걸 보자 알카시스 교수는 대체 누가 이런 걸 시켰는지 궁금해졌다.
교장 선생님인가?
“길이 좁은데.”
“버두스 교수님께서 자기 기준으로 만드셔서...”
이한은 머리와 옷에 달라붙은 나뭇잎들을 털어냈다. 알카시스 교수도 똑같이 털어냈다.
다크 엘프는 기본적으로 마른 체격을 가진 종족이었고, 여성인 알카시스 교수는 그 중에서도 더 마른 편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버두스 교수보다는 덩치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한은 교수의 눈치를 봤다. 급해서 부탁했다지만 교수한테 흙먼지를 묻혀서 좋을 게 없었다.
교수한테 흙먼지가 묻으면 제자는 흙 밑으로 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빨리 빨리 좀 가라. 너 때문에 약 못 만들면 네가 책임질 거냐?”
“지금 가고 있습니다!”
이한은 서둘러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알카시스 교수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바실리스크의 알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로는 들었지만 정말 보게 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키우고 있었군... 그것도 정말 잘 키웠는데.”
“여러 교수님들이 도와주셨습니다. 번개걸음 교수님이나 르지 교수님이...”
이한은 버두스 교수는 무심코 빼버렸다. 알카시스 교수도 굳이 다시 묻지는 않았다.
“번개걸음 교수님께서 도와주셨으면 번개걸음 교수님한테 물어봐도 됐을 텐데?”
“......”
이한은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그게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바실리스크가 너무 갑작스럽게 아파해서 가장 먼저 보인 알카시스 교수를 부르긴 했지만, 알카시스 교수가 친절한 교수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어느 상황에서든 침착했어야 했다.’
이한은 또 한 번 교훈을 얻었다.
“질병 관련 문제는 교수님께 여쭤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구나.”
알카시스 교수는 의외로 제자의 칭찬은 선선히 받아들였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시키는 것, 치유 마법을 쓸 때 실수하는 것, 환자를 살려야 하는데 도움 안 되는 것들만 제외하면 알카시스 교수는 의외로 친절하고 대하기 좋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음. 따지고 보니까 정말 의미 없는 소리군.’
이한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따지면 착하지 않은 교수가 없었다. 볼라디 교수도 구타만 빼면 친절한 교수였다.
“성장열이야. 바실리스크가 너무 빨리 자라서 열이 좀 치솟는 모양인데...”
“책에서 본 적 없는 증상인데, 제가 놓친 모양입니다.”
“아니... 원래 바실리스크는 성장열 같은 게 없는 몬스터야.”
알카시스 교수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제국의 희귀 동물들 모두를 꿰고 있을 만큼 박식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바실리스크처럼 유용한 몬스터는 알카시스 교수도 제법 잘 알았다.
워낙 성장이 느리고 필요한 마력부터 먹이까지 많이 들어가는 녀석이라 성장열 같은 건 일반적인 증상이 아니었다.
몬스터 중에 성장열 같은 병을 앓는 놈들은 대부분 급격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녀석들인데...
“저런. 먹이를 너무 많이 줘서 그런 겁니까?”
이한은 앞으로 먹이를 좀 빼돌려서 암시장으로 넘겨야 하나 고민했다.
옆에 있던 바실리스크의 알이 좌우로 흔들리며 소리를 냈지만 이한은 무시했다.
“먹이로 성장열을 만들 수 있다면 제국의 목장 주인들이 기뻐서 눈물을 흘릴걸. 먹이 말고 다른 요인이 있을 거다. 찾아봐라.”
이한은 오두막 안을 훑으면서 이것저것 의심되는 요인들을 물어봤다.
혹시 통풍의 문제인가, 아니면 오두막이 설치된 곳의 마력 흐름 문제인가, 아니면 버두스 교수 때문에 바실리스크가 스트레스를 받았나...
잠잠히 듣던 알카시스 교수는 바실리스크의 알을 빤히 쳐다보았다.
알 안에 있는데도 이한에게 데굴데굴 굴러가서 달라붙으려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몬스터에게는 알에서 깨고 나온 뒤 처음 본 사람을 주인으로 여기는 각인 현상이 있다지만, 알에서 나오기도 전에 저렇게 주인을 쫓아다니는 건 흔치 않은 현상이었다.
정말 잘 보살펴줘서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네가 원인이군.”
“예?”
“저 바실리스크가 네 마력을 계속 빨아 마시고 있잖나. 지금도... 잠깐. 눈치를 못 챘다고? 정말?”
바실리스크 알이 이한에게 달라붙을 때마다 마력을 쭉쭉 받아 마시는 게 느껴졌는데 정작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말이 되나?
“그런 짓을 했습니까?!”
이한은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알을 밀어냈다. 알이 달그락거리며 이한에게 달라붙으려고 했지만 이한은 단호하게 붙잡았다.
“마력이 소모되는 느낌이 안 들었나?”
“예.”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즉답하는 제자의 모습에 알카시스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안 들었다는데 어쩌겠는가.
황당하지만 알카시스 교수는 받아들였다.
“바실리스크한테 먹힐 해열 물약을 만들어 줄 테니 하루에 한 방울씩 주도록. 나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고. 바실리스크는 생각보다 예민한 몬스터니까. 그리고 응석 그만 받아줘라.”
“안 받아줬...”
이한은 억울했지만 교수는 듣지 않았다.
빠르게 조제를 마친 알카시스 교수는 이한을 쳐다보았다. 마치 노예시장에 방문한 악덕 상인이 ‘이 녀석은 얼마나 일을 할 수 있을까’하고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이한은 재빨리 외쳤다.
“교수님의 은혜에는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해야 할 과제들이 있고 이번 주는 또...”
“안 시키니까 걱정하지 마라.”
알카시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일손이 부족하긴 하다.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제자들 말도 일리가 있지. 아무리 급해도 일학년을 실전에 계속 밀어 넣으면 혹시라도 사고가...”
말하던 알카시스 교수는 바실리스크의 알이 이한에게 또다시 달라붙어서 마력을 쪽쪽 빨아먹는 걸 지켜보았다.
교수는 못 본 척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모습을 보면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으니까. 지금 강의를 따라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대로 1, 2년 지나면 괜찮은 치유 마법사가 되겠지.”
다크 엘프 교수는 피곤에 찌든 와중에서도 제자에 대한 기대감을 눈빛에 살짝 드러냈다.
원래라면 평소 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교수가 보여주는 진심에 감동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한은 그러지 않았다.
이한은 다른 치유 마법 선배들처럼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이야 감동적이지만 잘 따지고 보면 그냥 같이 힘들게 죽어가자는 거잖아.’
물론 이한은 속마음을 드러내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열심히 치유 마법을 공부해서 최대한 빠르게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도록.”
알카시스 교수는 피식 웃으면서 문을 열려고 했다.
그 때 밖에서 두다다다 소리와 함께 도착한 버두스 교수가 이한을 불렀다.
“안에 있지?! 지금 아티팩트 하나 만드는데 마력이 필요해! 빨리 나와! 빨리! 빨리! 빨리!”
“......”
알카시스 교수는 혼란 섞인 눈으로 문과 이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 다른 교수들은 그냥 시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