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영광을 추구하는 건 이해하지만, 지나치게 강적만을 상대하려는 습관 또한 좋지 않다!
언데드 마법사의 충고에 가이난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가이난도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말했다.
“제가 원해서 그런 상황이 된 게...”
-설명은 나중에 듣지. 지금 마력이 부족하다! 도움이 필요해!
언데드 마법사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 이 땅의 존재가 아닌 만큼, 언데드 마법사는 차원에서 한 번 소환될 때마다 막대한 존재를 소모했다.
더군다나 저번 구울의 왕과 맞붙었을 때 입은 타격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
아무리 언데드 마법사가 뛰어난 마법사라 하더라도 도움 없이는 제대로 활약하기 힘들었다.
-뱀이여, 달려라, 팔방(八方)의 기운을 긁어모아라, 건(乾)에서 곤(坤)으로, 감(坎)에서 태(兌)로!
급한 대로 주변에 마법진을 그려서 마력을 박박 긁어모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언데드 마법사는 학생들에게 외쳤다.
-각자 위치로! 위치로 향해서 마법진에 힘을 보태라!
이한은 뱀과 뼈와 암흑 원소로 그려진 정교한 마법진의 원리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언데드 마법사가 하라는 대로 재빨리 움직였다. 저 멀리서 군세가 몰려오는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회복이 덜 됐군...”
“이, 이한. 삐죽 정령을 부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페르쿤트라보다는 나을 거야.”
“역시 그렇지?”
-거기 뺀질거리는 놈! 빨리 움직이지 못해!
언데드 마법사가 호통치자 가이난도는 깜짝 놀라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한이 마법진 안 동심원에 발을 디디자 마법진이 불타듯이 빛을 발하며 마력 순환을 시작한 것이다.
-마력이 너무 부족해! 지금 상태로는 대마법은커녕 내가 버티지 못하고 역소환 될 판인데, 뺀질거리기나 할... 어. 다 됐군.
“......”
“......”
황급히 달려가던 가이난도와 친구들이 멈칫했다.
“다 됐다고요?”
-아... 맞아. 마력이 많았었지.
언데드 마법사는 얼굴 근육은 없었지만 동작으로 민망함을 표현했다.
생각해보니 계약을 맺은 이 마법사는 나이에 비해 천재적인 재능과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른 차원의 군주들도 기겁할 마력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다른 학생들의 마력을 한 푼 두 푼 긁어모을 필요 없이 순식간에 필요한 마력이 달성됐다.
이런 마력이라면 역소환을 걱정할 필요 없이 넉넉하게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었다.
-고맙다.
“제가 불렀잖습니까.”
-그러면... 나타나라, 나의 군세들이여!
언데드 마법사가 호령과 함께 계약을 맺은 언데드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마법진과 연결된 공간에서 차원의 문이 열리더니 스켈레톤 전사들이 차곡차곡 방진을 만들어냈다.
평범한 스켈레톤 전사와는 명백하게 다른 모습에 이한은 설마 싶어서 물었다.
“혹시 용아병입니까??”
뼈의 재질에 따라 강함이 달라지는 언데드 소환수들에게 있어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스켈레톤 전사는 강함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저 정도 덩치에, 저렇게 살기 넘치는 기백이라면...
-미쳤나?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소환수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데! 절대 이렇게 부릴 수 없지. 물론 이 전사들도 범상한 이들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아. 혹시 악마의 뼈로...”
-용의 이빨이 아주 조금 섞였지.
“......”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야!
“그, 그렇군요.”
말로 하니 좀 볼품없게 들리긴 했지만 언데드 마법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용의 이빨이 아주 조금 섞인 것만으로도 스켈레톤 전사들은 압도적인 기백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소환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방패를 든 스켈레톤 전사들이 방진을 구성하고 철벽을 완성시키자 그 뒤에 밴시 마법사들이 도열했다.
밴시 마법사들은 땅을 두드리면서 마력을 어떻게든 확보하려고 하다가 이한을 발견하더니 넙죽 엎드렸다.
“...내가 저 마법사하고 계약해서 그래.”
“으, 응.”
이미르그는 이한이 물어보지도 않은 걸 대답하자 의아해했다.
-...내 남은 마력을 모조리 바치오니, 말들의 왕이시자 왕중왕은 계약에 따라 나를 도우시오!
언데드 마법사가 마력을 쥐어짜며 마지막 소환을 마치자 켄타우로스 구울들이 한쪽에서 뛰쳐나왔다.
거대한 괴수기병인 켄타우로스 구울들은 우두머리를 따라 돌격을 개시했다.
-자, 준비는 끝났다! 적들을 요격해라! 마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과감하신 거 아닙니까?”
이한이 걱정되어서 묻자 언데드 마법사는 힐끔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외쳤다.
-마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더욱 더 퍼부어라!
“......”
* * *
“어휴. 다 됐다.”
언데드 소환을 끝낸 코홀티는 털썩 주저앉았다.
저만한 숫자를 소환하는 건 에인로가드의 뛰어난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역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약이란 시약은 다 끌어다 쓰고 마법진을 수십 개 이상 사용했지만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가고 있지?”
“예.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
오골도스는 저 멀리 달려가는 언데드 군세를 보며 대답했다.
작년에도 본 적 있는 모습이었지만, 2학년이 되고 나서 더 많은 지식으로 보게 되자 새삼 저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느껴졌다.
저만한 숫자의 언데드를 소환한 것도 놀라웠는데 저 난폭한 언데드들을 강하게 통제하는 금제술까지.
수많은 언데드들이 지축을 울리며 마치 모든 걸 쓸어버릴 것처럼 달려가도 그 사이에 있는 후배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오골도스는 옛날 생각이 났다.
‘나도 저걸 보고서 흑마법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처음에는 정말로 무서웠었다.
강의실 안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다른 차원이 펼쳐져있고 앞에서는 언데드 군세가 달려오는데 무섭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벌벌 떨면서 이대로 끝인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언데드 군세가 학생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옆으로 흩어져서 지나갔다.
그제야 오골도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다 흑마법을 배우는 선배들의 화려한 연극이었다는 것을!
‘다시 봐도 정말 대단...’
“야, 야! 야!!!”
“왜 그러십니까? 잠깐. 제 등쪽에 오지 마십시오.”
오골도스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코홀티를 쳐다보았다.
코홀티는 억울하다는 듯이 양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고 외쳤다.
“저기 언데드 군세 보라고!”
“왜... 헉.”
둘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봐도 저 멀리서 보이는 광경은 싸움 같았던 것이다.
왜???
“무, 무슨 일이지? 설, 설마 금제가 덜 걸렸나? 후배들 공격하지 말란 걸 이해 못했나?”
코홀티는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었다.
지금 머릿속으로는 ‘1학년 전원 흑마법 학파 탈퇴’가 맴돌고 있었다.
아무리 모르툼 교수가 관대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터지면 코홀티를 징벌방에 영원히 가둘지도 몰랐다.
“...잠, 잠깐만요. 선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뭐가? 잘못 본 건가? 잘못 본 거지? 그, 그렇지? 내가 잘못 본 거 맞지?”
“그게 아니라! 지금 저쪽이 더... 저쪽이 밀어붙이고 있잖습니까!”
“???”
코홀티는 눈을 깜박였다.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언데드한테 명령을 잘못 내렸으면 그냥 후배들을 짓밟고 끝나야 보통인데 지금은 싸우고 있지 않은가.
싸우고 있다는 건 팽팽하다는 뜻.
그리고 지금은 팽팽이 아니라 이쪽이...?
“!!!”
급히 언데드 박쥐를 날려 보내서 시야를 확보한 코홀티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얼어붙었다.
웬 언데드 군세가 질서정연하게 아군 쪽 언데드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보통 스켈레톤 전사보다 몇 등급은 더 높아 보이는 정예 스켈레톤 전사들이 방벽을 치고 길을 막으면, 뒤에서 켄타우로스 구울들이 사정없이 치고 빠지면서 군세를 무너뜨렸다.
게다가 밴시 마법사들은 무슨 비의를 사용했는지 마력이 샘솟는 것처럼 연달아 마법을 날렸다. 녹색 악령 구름이 안개처럼 퍼지자 언데드들이 녹아내렸다.
‘이게 무슨...!’
아군 쪽 언데드 군세는 애초에 전투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닌 만큼 전술적인 움직임도 없었고, 공격에 대한 방비도 없었다.
숫자만 빼고 모조리 다 열세인 만큼 이렇게 부딪치면 질 수밖에 없었지만...
없었지만...!
‘아니 이게 말이 되나!?’
그걸 떠나서 어떻게 이만한 군세를 1학년 학생들이 불러온단 말인가!?
코홀티는 봐도 봐도 믿기지 않아서 계속해서 관찰했다.
몇백년 먹은 리치 정도는 되어야 이런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언데드 소환도 소환이지만 구성이나 배치, 지휘가 무슨...
“...배님! 선배님!!!”
“어! 어!?”
뒤에서 오골도스가 부르자 코홀티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전투가 너무 박진감 넘쳐서 자신도 모르게 홀려있었던 것이다.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빨리 저쪽에 연락해서 싸움 멈추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다가 소환된 언데드 다 부서지겠습니다!!”
“...아!”
코홀티는 그제야 현실로 완전히 돌아왔다.
지금 중요한 건 1학년 학생들이 어떻게 저만한 언데드를 불러왔느냐가 아니었다.
아 물론 그것도 정말 궁금하긴 했지만...
‘안 돼!!’
지금 중요한 건 언데드 군세를 소환하는 데에 사용한 막대한 양의 시약이었다.
언데드들이 그나마 무사하게 역소환되면 회수 가능한 시약들이라도 나오지, 저렇게 파괴되어서 역소환되면 그런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디레트는 지금 옆 강의실에서 시연 끝나면 시약 회수하려고 준비중인데...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디레트가 왔을 때 볼 수 있는 광경은 처참한 폐허뿐이리라.
그리고 아마 코홀티도 그 폐허 옆에 거꾸로 묻히게 될 가능성이...
* * *
-후배! 오해! 오해! 중간고사! 연극!
언데드 박쥐 하나가 날아오더니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어찌나 급했는지 문장 군데군데가 날아간 상태로 외쳤다.
그래도 다행히 이한은 금세 이해했다.
“아. 중간고사를 앞두고 보여주는 시연이었던 겁니까? 어쩐지 공격성이 없다 싶었는데...”
-그래! 중지! 중지!
“함정 아니냐?”
“함정일지도 몰라. 이한. 다 부숴버리자. 그리고 나서 생각해도 되잖아!”
뒤에서 라파드엘과 가이난도가 속삭였지만 이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단 흑마법 학파 선배들이 이런 걸로 함정을 팔 정도로 추잡한 이들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정황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괜히 무리했군. 가만히 있었으면 됐을 텐데.”
-...뭔...?
옆에 있던 언데드 마법사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목숨이 위협받는 다급한 상황인 줄 알았는데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시험이었습니다. 그, 아시잖습니까? 스승에게 시험받는...”
-■ ■ ■■ ■■■■ ■■ ■■■■!
언데드 마법사는 다른 차원의 언어로 노발대발 날뛰었다.
이한의 목숨이 위험한 줄 알고 회복되지 않은 육신을 이끌고 기껏 군세를 조직했더니 뭐??
-그보다 어떤 얼빠진 흑마법사 놈들이 이딴 걸 보여주면서 자랑을 한단 말이냐! 언데드의 군세는 적을 부수는 망치이자 도끼지 자랑의 도구가 아닌데!
-......
박쥐로 듣고 있던 코홀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진짜 위험할 때 부르겠습니다.”
-귀중한 기회를 그렇게 낭비하면 너만 손해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언데드 마법사는 어지간히도 어이가 없었는지 몇 번이고 훈계를 했다.
강력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은 한 번 소환하면 힘이 회복될 때까지 다시 소환하기 힘들고, 더군다나 언데드 마법사는 부상도 있고...
옆에 있던 가이난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근데 아까 마력 많이 가져가셨으니까 부상 회복된 거 아니에요?”
-......
언데드 마법사가 시퍼런 안광으로 가이난도를 노려보자 이한은 재빨리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버두스 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만 들어가보십시오.”
-흥!
언데드 마법사는 가이난도를 한 번 노려보고 역소환되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언데드들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벌판은 조용해졌다.
옆에 있던 이미르그는 우물쭈물하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워, 워다나즈. 버두스 교수님을 언데드로 만든 거야?”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