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그, 사실 메이킨 가문에서 여러분들에게 의뢰를 맡긴 것도 닐리아가 말해서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지만 이한은 그래도 말했다.
그래야 나중에 닐리아한테 변명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분명히 말했는데 사냥꾼들이 무시하더라고.
“우하하하하!”
“푸핫핫핫핫!”
“......”
예상은 했지만 그림자 순찰대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이한의 농담에 감탄한 이들은 숨을 헐떡이며 눈물까지 고일 정도로 웃었다.
이한은 닐리아가 왜 그림자 순찰대를 싫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중에 메이킨 가문 사람들한테 꼭 물어보고 확인해보십시오. 꼭.”
“잠깐.”
옆에서 듣고 있던 우레걸음 교수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이킨 가문이 닐리아가 말해서 의뢰를 맡겼다는 게 무슨 소리냐?”
“...배그렉 교수님! 배에 승선하기 전에 바다 위에서 싸우는 법에 대해 여쭤볼 게 있습니다!”
먼저 배 위에 올라가있던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외침을 듣자마자 소리 하나 없이 날아왔다.
그림자 순찰대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였다.
* * *
이스란 시의 사람들은 도시에 자부심이 강했다.
인어의 눈물로 만들어졌다는 낭만적인 전설을 가진 성문부터 시작해서 고대 시절 마법사가 남긴 물의 동상까지 여러 자랑거리들이 도시에 즐비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빠지지 않는 것이 도시의 항구였다.
남쪽에 위치한 항구는 도시의 심장을 연상시키듯 모든 활력이 모여 있었다.
채울 수 없을 듯이 드넓은 선착장을 꽉 메운 상선들에서 갓 도착한 선원들이 내렸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제국 징수관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물품을 확인하고 밀수품이 없나 고함을 질러댔다.
그 뒤로 시선을 돌리면 항구 대로를 뛰어다니는 여러 종족들이 보였다. 길은 마차가 여덟 대는 오갈 정도로 넓었지만 다섯 걸음만 가도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곳곳에서 수상쩍은 복장을 한 행상인들이 좌판을 깔고 호기심 많은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꾀는 말을 던졌다.
항구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일꾼이나 징수관들은 이 숨가쁜 풍경에도 익숙하다는 듯이 덤덤히 지나갔다.
가끔 다른 함선들과 전혀 다르게 생긴, 드워프나 엘프 장인들이 새로이 진수하는 기묘한 모양의 배가 나와도 이들은 놀라지 않았다.
“......”
“...으헉!”
그러나 날렵한 쾌속선을 타고 돌아다니는 북부 출신 사냥꾼들은 달랐다.
이들은 노련한 뱃사람들도 놀라게 만들었다.
“오른쪽으로 90도 돌려서 쫓아갑시다!”
“사냥꾼 님. 배는 그렇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 그래? 이거 미안합니다! 그럼 왼쪽으로 270도 돌려서 쫓아갑시다!”
“......”
메이킨 가문의 깃발이 걸린 날렵한 쾌속선들에 탄 사냥꾼들은 과격한 사냥을 뱃전 위에서 펼쳐댔다.
“안 되겠다. 나를 던져라!”
사냥꾼 중 한 명은 몸을 밧줄로 묶은 다음 돛대와 연결하더니 창 한 자루를 들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상어처럼 생긴 몬스터를 창에 꿰고서 기어 올라왔다.
“사냥꾼 님! 발석상어는 굳이 사냥하실 필요 없습니다! 놈은 이 정도 크기의 함선은 노리지 않는 몬스터입니다!”
“하지만 작은 어선들을 노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않겠습니까!”
‘음. 우레걸음 교수님이 왜 왔는지 알 거 같군.’
이한은 사냥꾼들과 선원들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림자 순찰대는 유능한 사냥꾼이었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냥을 너무 좋아했다.
인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산고리아 꽃의 위치를 확인하고 거기로 갈 때 필요한 만큼의 몬스터만 처리하면 되는데, 몬스터만 보였다 하면 죽자 살자 달려드니 시간이 불필요하게 소모됐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잡아야 할 몬스터는 우리가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우레걸음 교수는 번개걸음 교수한테 부탁한다는 시선을 보냈다.
번개걸음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내렸다.
“일단 발석상어는 굳이 건드릴 필요 없는 놈이니 넘어가고...”
그림자 순찰대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이 깃들었다.
평생 북부 산맥에서 지낸 사냥꾼들에게 있어서 ‘저 몬스터는 위험하지 않고, 저 몬스터는 위험하고’ 같은 논리가 잘 통하지 않았다.
위험하지 않은 몬스터가 얼마든지 위험해질 수 있는 게 북부 산맥이었던 것이다.
몬스터가 보이면 잡는다.
평생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 온 이들인 만큼 가만히 있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지시가 나올 때까지 참으라니.”
“몰래 잡으면 안 되나?”
“저기 칼날오징어가 보이는데...!”
번개걸음 교수는 노련한 탐험가인 만큼 이런 사냥꾼들의 생태에 대해 잘 알았다.
지시를 내렸다고 말을 순순히 듣는다면 이들의 명성이 그렇게 높을 리도 없었다.
이들이 가진 사냥꾼으로서의 집요함과 끈기는 저런 고집불통인 성격과도 연관이 깊었으니까.
저럴 때는 설득을 해야했다.
“워다나즈. 꽃 산지 찾는 동안 네가 사냥꾼들을 좀 돌봐야겠다. 섣불리 사냥에 나서지 않도록 말려라.”
“......”
이한은 그걸 자신한테 시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일을 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부정하진 못했다.
우레걸음 교수는 꽃 산지를 찾느라 집중해야 하고, 번개걸음 교수와 볼라디 교수는 주변 몬스터의 생태를 파악하느라 집중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잘 될지 모르겠군.’
닐리아한테서 그림자 순찰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한은 아직 자신감이 없었다.
이 괴팍한 북부 산맥의 사냥꾼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앗. 닐리아의 친구시잖나?”
“아냐. 아까 물어보니 워다나즈 가문이라고 하더라고. 그냥 같은 학년이지 친구는 아닐 거야.”
“친구 맞는데요.”
“그래요. 하하. ‘친구’겠지.”
이한은 슬쩍 뱃전을 쳐다보았다.
밀어버릴까?
‘어차피 밀어버려도 기어오르겠지.’
사냥꾼들이 보여준 육체적 능력을 생각해봤을 때 밀어버린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이한은 자신이 참기로 했다.
“마법사로서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무엇이든 편하게 말해주십시오.”
사냥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는 시선을 돌려야했다.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가 꽃의 산지를 찾기 전까지 이들과 대화해 볼 생각이었다.
“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사냥꾼은 목소리를 낮추더니 슬쩍 말했다.
“여기 마법 걸린 화살들을 산맥에 챙겨갖고 가고 싶은데...”
“......”
다른 사냥꾼들은 살짝 부끄러워하면서도 ‘된다면 나도 갖고 가고 싶다’하는 표정을 지었다.
메이킨 가문에서 나눠준 화살들이 워낙 고급이었던 것이다.
7년 된 질 좋은 싸리나무로 된 몸체에, 페가수스의 깃털로 된 화살깃, 거기에 촘촘하게 새겨진 문양으로 작동되는 여러 부여 마법들까지.
“남으면 갖고 가시도록 메이킨 가문에 말해보겠습니다.”
그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메이킨 가문의 넉넉함을 봤을 때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남는 화살 정도는 선물로 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그러나 사냥꾼들은 이한의 말에도 머뭇거렸다.
“안 남을 것 같아서 문제입니다.”
“지금 쓰는 속도를 보면 다 떨어지고도 남을 것 같아서...”
‘그럼 사냥을 줄이면 될 텐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친절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일반 화살을 섞어서 쓰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바다의 몬스터들은 꽤나 껍질과 가죽이 두터워서, 이런 화살이 아니면 확실하게 숨통을 끊기 어렵습니다. 의뢰를 받았는데 화살을 아끼다가 문제를 일으키면 본말전도 아니겠습니까.”
그림자 순찰대는 노련한 사냥꾼인 만큼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했다.
적을 얕보고 아끼다가 다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냥을 줄이면...’
물론 이한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사냥을 줄이면 그 문제 또한 해결될 텐데!
“그런 문제라면 저도 방법이...”
“마법사 님께서 일반 화살에 마법을 걸어주시면 안 됩니까?”
“!”
사냥꾼들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게 아니라 다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싼 화살들을 쓰는 이유는 마법사가 없을 때에도 마법을 쓰기 위해서였다.
역으로 말하자면 마법사가 있다면 이런 비싼 마법 화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냥 마법을 일반 화살에 걸면 됐으니까.
문제는...
‘그게 그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닌데.’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마법을 잘 모르는 이들은 학파에 대한 개념이 없는 만큼 흑마법사한테 가서 ‘제가 식중독에 걸렸는데 치료 좀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치유 마법을 배우지 않은 흑마법사들에게 그런 건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죽은 다음 되살리는 정도였다.
지금 일도 비슷했다.
메이킨 가문이 어디서 화살을 구입했는지는 몰라도 아마 뛰어난 부여 마법사들이 세운 공방에서 구입했을 것 아닌가.
화살대부터 깃까지 하나하나 고급 재료를 골라서, 그 위에 마법이 반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온갖 복잡한 마법진을 깨알같이 새기고...
옆에서 간단히 봐도 그 기술과 실력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화살을 1학년인 이한이 마법 몇 개 건 일반 화살로 대체하려고 하다니.
성능 차이가 크게 날 게 분명했다.
‘내가 나은 건 즉석에서 걸었다는 점밖에 없지 않나?’
즉석에서 시전했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는 만큼, 이한은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건 대단한 마법사가 했고 저는 아직 학생...”
“아닙니다!”
“???”
뭐가 아니란 거지?
“마법사 님. 제가 마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지만 감히 한 마디 하겠습니다. 무릇 일이란 건 도전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맞습니다. 저희들의 일도 비슷합니다. 언제나 신참은 자신이 사냥감을 쓰러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신참에게 화살과 활을 쥐어주고 사냥감과 일대일로 대면시키면, 신참은 자기 자신에게 숨겨진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
이한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혹시 에인로가드 사냥꾼 아닌가? 해골 교장한테 매수당했나?’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개논리를 펼친단 말인가.
그 논리대로라면 이한도 해골 교장과 일대일로 맞붙어서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저희가 보기엔 마법사 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비싼 재료 써서 명품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기죽지 마십시오. 마법사 님을 믿으십시오!”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그림자 순찰대는 매우 용감했다.
이들은 이한을 재촉하며 한 번 해보라고 밀어붙였다.
“아니... 알겠습니다. 한 번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이한은 한숨을 참고 그냥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안 보여주면 이들은 ‘당신도 마법사고 이 화살 만든 사람도 마법사인데 왜 안 되겠어!’하고 계속 질질 매달릴 것 같았다.
“화살에 걸린 마법이... 와, 이건 정말... 대단하군.”
메이킨 가문이 사온 화살을 훑어보던 이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건 버두스 교수의 공방에서 공부할 때 본 적 있는 마법들이었다.
<젠바야의 영원한 관통>, <젠바야의 영원한 증가>, <젠바야의 영원한 명중>...
이한이 쓸 줄 아는 <하급 관통력 강화>, <하급 중량 증가>, <하급 명중 강화> 같은 초급 부여 마법들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를 정도로 정교한 고급 마법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효과가 약해지는 부여 마법의 단점을, 마법사의 찬란한 지혜로 해결해낸 아름다운 작품들!
같은 마법사로서 이한은 잠시 멈추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힘내십시오, 마법사 님!”
“마법사 님도 하실 수 있습니다!”
“...예. 뭐.”
이한은 매우 민망한 기분으로 마법을 준비했다.
앞에 명화가 있는데 조잡한 스케치를 새로 그리는 기분이었다.
파아앗!!
“일단 관통, 중량, 명중을 걸어봤는데 아무래도 완성도에서 너무 차이가 나고 거칠어서...”
이한이 이 화살과 저 화살의 마법적 완성도 차이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지만 사냥꾼들은 그냥 듣는 척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리고 화살을 받자마자 시위에 올리고 당겼다.
쐐애애액!
사냥꾼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서로 쳐다보았다.
“이게 더 좋습니다, 마법사 님!”
“지금 설마 화살 챙겨 가시려고 이러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