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하.”
우레걸음 교수는 쌀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은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우레걸음 교수는 소금에 절인 무를 으적 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꾸 한숨을 쉬는 거냐? 입맛 떨어지게.”
번개걸음 교수는 조카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하루 동안 열심히 일했으면 기분 좋게 먹어야 할 것 아닌가.
기껏 저택의 요리사들이 동부 출신의 입맛에 맞춰서 따로 요리를 준비해줬더니...
우레걸음 교수는 앓는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학생들은 ‘오늘 정말 힘들었다’ ‘우레걸음 교수님은 역시 교장 선생님하고 친한 사람답게 우리를 괴롭히시는 걸 즐기신다’라고 막말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우레걸음 교수에게도 교수만의 고충이 있었다.
학생들이야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됐지만 우레걸음 교수는 전체적인 일정을 관리하고 기간 안에 의뢰를 끝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정해진 기간 안에 의뢰를 끝내지 못한다면?
-우레걸음 교수. 혹시 내가 자네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건가? 정해진 기간 안에 의뢰를 못 끝내다니. 그로 인한 학생들의 학업 손해는 자네가 책임질 건가?
조금 늦어지는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의뢰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다면?
-우레걸음 교수. 혹시 학생들이 마법을 공부하는 게 싫은가? 지금부터 바짝 벌어놔도 연구비가 없다는 핑계로 내 금고를 도둑질할 놈들인데, 왜 보수를 받는 걸 방해하는 거지?
...해골 교장은 학생들과 달리 교수는 매우 존중해주는 편이었지만, 가끔 예외도 있었다.
당장 버두스 교수가 징벌방에 간 것만 봐도...
“저런. 그래도 오늘 일은 꽤 잘 풀린 걸로 아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일정이 꽤 촉박해서 문제입니다.”
우레걸음 교수는 해야 할 일들이 적힌 종이를 노려보며 만두를 입에 쑤셔 넣었다.
다행히 오늘 그림자 순찰대가 사냥이면 사냥, 마법이면 마법 등 열심히 활약해준 덕분에 해로 파악과 지도 작성은 얼추 끝이 보이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내일 안에 끝이 나리라.
‘아. 무심코 워다나즈를 그림자 순찰대 일원으로 생각했군.’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이 들었으면 고함질렀을 생각을 했다.
하도 잘 어울려서 무심코 둘을 묶어서 같이 생각했던 것이다.
재고 분류와 기준 작성, 채집 교육은 지금 저택 공방에 있던 학생들이 열심히 하고 있었고...
‘이건 내일, 늦어도 모레 안에는 끝나겠군.’
학생들의 긴장이 풀어질까봐 굳이 말해주진 않았지만, 지금 1학년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우수했다.
워다나즈 같은 이례적인 미친놈을 제외해도 각 탑에 연금술에 뛰어난 학생들이 한 명 이상 있어서 어느 상황이 벌어져도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했다.
잠깐 학생들을 쉬게 해줘도 일은 굴러갈 것 같았지만...
‘아니지. 그건 학생들을 위하는 게 아니야.’
우레걸음 교수는 다 끝날 때까지 학생들한테 말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느슨해졌다가 일정이 늦어지면 학생들만 고생 아닌가.
이런 부분에서 엄격해야 하는 것도 교수의 일이었다.
‘남은 문제는 중재인데.’
이 주변 길드들 사이의 마찰, 그리고 길드들과 주민 사이의 갈등.
안정적으로 꽃을 수확하고 싶다면 이들의 문제를 중재해주고 가야 했다.
어떻게 보면 해로 작성과 몬스터 소탕보다 더 귀찮은 문제일 수도 있었다.
‘가능한 내일 안에 해결을 봐야 일정이 안 어그러질 텐데.’
내일 안에 소탕과 해로 작성을 마무리 짓고 관계자들과 접촉해서 요구사항을 듣고 방안을 고민해보면...
우레걸음 교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교수들을 쳐다보았다.
번개걸음 교수와 볼라디 교수의 모습을 차례대로 한 번씩 본 우레걸음 교수는 오늘 내뿜은 한숨 중에서 가장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후우우...”
“뭐냐? 방금 한숨은 좀 기분이 나빴는데. 혹시 속으로 내 욕을 한 거냐?”
“아, 아닙니다.”
속마음을 들킨 우레걸음 교수는 식겁했다.
하지만 그래도 두 교수가 이런 중재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번개걸음 교수는 협상 자리에서 몬스터라도 풀려나야 도움이 될 것이고, 볼라디 교수는 협상 자리에 암살자들이 쳐들어와야 도움이 될 테니...
길드와 도시 주민들이 어떤 요구를 해올지, 또 어떤 방안을 받아들일지 고민하던 우레걸음 교수는 옆을 지나가는 이한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워다나즈.”
“예?”
“그나마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뭘 시키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이한의 불신 가득한 시선에 우레걸음 교수는 에인로가드를 대표해 살짝 반성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이한은 해로 작성과 소탕을 마무리 짓기 위해 교수들과 같이 저택을 출발했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새벽부터 나와 있었는지 소형선을 타고 바다 위를 잽싸게 누비며 몬스터들을 하나씩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 한 명이 산봉우리에 들어가면 그 산봉우리의 몬스터들은 멸종한다더니, 과연 소문이 틀리지 않는군.”
번개걸음 교수는 감탄했지만 이한은 다른 생각을 했다.
이한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살짝 당황하고 시선을 피하는 걸로 봐서, 이들은...
‘우리가 오면 사냥감 필요한 것만 잡으라고 할까봐 일찍 와서 잡고 있었던 거다.’
다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풍기는 분위기에 속고 있었지만 이한은 속지 않았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에게는 은근히 가이난도 같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쪽을 마저 확인할 테니, 배그렉 교수께서는 반대쪽을 부탁드립니다.”
우레걸음 교수는 번개걸음 교수와 함께 아직 해로 작성이 덜 된 곳으로 향했다.
볼라디 교수는 이한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보냈다. 이한은 체념하고 말했다.
“암초 위에 남은 몬스터들 소탕하러 가시죠.”
“그래. 서두르지 말도록.”
이한은 나룻배 위에서 볼라디 교수를 한 번 밀어볼까 생각했지만, 보는 사냥꾼들 눈이 많아서 참기로 했다.
촤아아악-
배가 이동하면서 이한은 어제 우레걸음 교수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뭘 시키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라...!
-예. 그런 뜻이 아니시겠죠.
-수염에 맹세코 그런 뜻이 아니었다니까! 들어봐라!
우레걸음 교수는 오죽 억울했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남은 이틀 동안 깔끔하게 해결하고 가야 에인로가드의 명성도 유지되고 학생들도 보수를 받고 우레걸음 교수도 행복한데, 지금 남은 일들이 꽤 빡빡하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맡은 일들은 제법 여유가 있었지만(이한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이 사실을 친구들한테 전달했다), 중재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골치가 아프다는 게 우레걸음 교수의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날 보고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했던 이한이었지만, 번개걸음 교수와 볼라디 교수를 보니 바로 이해가 갔다.
‘음. 하긴. 저 둘에 비하면 내가 낫긴 하다.’
이한이 자신감 넘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저 두 교수와 사교 영역으로 붙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우레걸음 교수가 잘 중재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다.
다른 두 교수는 안 도와줄 테니 우레걸음 교수가 메이킨 가문의 사람들과 고민해야 할 텐데, 일이 꼬이면...
‘보수가 줄어들고, 보수가 줄어들면 학생들의 연구비도 줄어들고, 그러면 분노한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에인로가드는 멸망하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한이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볼라디 교수가 물었다.
“아, 중재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우레걸음 교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까.”
“......”
원래라면 ‘학생은 학생의 일을 하고 교수의 일은 교수에게 맡겨라’라는 좋은 뜻으로 들려야 하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좀 ‘내가 알 바인가?’하는 나쁜 뜻으로 들렸다.
‘기분 탓이겠지.’
“상륙하도록.”
“예.”
“이번에는 얼음 마법을 활용해보도록.”
“예...”
옆에 있던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물었다.
“정말 도움은 필요 없으십니까? 전위가 앞에서 막아주지 않으면...”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 없습니다. 마법으로 극복할 테니.”
“마법으로! 과연...!”
사냥꾼들의 눈빛이 빛났다.
앞에서 막아주는 이들이 없다면 함부로 움직이기 힘든 게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참으로 편견이었다.
* * *
도시 어부 길드의 조합장, 파셔는 불만 섞인 시선으로 바다를 노려보았다.
“나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걸세. 자네들도 명심해두도록.”
“예!”
“혹여나 협상이나 타협을 생각하는 어린놈들이 있다면, 그 얄팍한 생각은 자기 뱃속에 넣어놓도록!”
머리카락은 하얗게 셌고 체구는 깡말랐지만 이 늙은 어부는 여전히 위엄을 흩뿌릴 줄 알았다.
근처의 젊은 어부들은 감히 대꾸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연금술사 놈들, 모험가 놈들, 시의회 놈들 모두 다 도둑놈들이나 마찬가지야. 황제 폐하께서 내주신 어업권의 인허장이 어디로 내려왔나? 우리 길드로 내려왔네!”
‘산고리아 꽃을 누가 캐야 하는가?’의 문제는 생각보다 오래 된 문제였다.
먼 옛날, 어부 길드는 제국의 황제로부터 수십 가지 가까이 되는 해산물을 거둬들일 수 있는 어업권 인허장을 하사받았었다.
그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도시 사람들은 어부 길드의 권리를 존중했고 어부 길드에서 잡아오는 해산물을 구매했으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갑자기 산고리아 꽃이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그 가치를 알아본 연금술사들이 산고리아 꽃을 채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과정에서 어부 길드는 처음 보는 꽃에 대해 알기 위해 연금술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당연히 꽃을 누가 캐야 하는가에 대한 권리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연금술사들의 의뢰를 받아서 채취에 나섰던 도시의 모험가 길드도 발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누가 탐욕스럽느니 염치가 없다느니로 계속 다투다가, 꽃을 채취할 때마다 일정 액수를 서로에게 지불하는 식으로 타협안을 봤었는데...
이번 해안가 소란으로 산고리아 꽃의 채취가 끊길 뻔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국의 관료들이 서로 힘을 모아 해결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견제만 하고 시간만 낭비한 이 길드들에 질색을 한 것이다.
-결국 미봉책이 이렇게 사태를 키운 것이다. 이 문제도 반드시 정리해라!
이렇게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 만큼 길드들도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
반드시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설득해서 우리 길드의 논리가 타당하다는 걸 증명하고 말겠다!
그리고 그건 어부 길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역사도 모르는 놈들이 뻔뻔하게 발을 들이민 탓에 이 모든 사태가 터진 거야.”
‘협상이나 타협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젊은 어부 몇몇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제국 관료들의 태도가 생각보다 완강했다.
일을 얼마나 해결 못했으면 외부인인 메이킨 가문이 해결하겠다고 나섰겠는가.
직접적인 이득 하나 없는데도 그럴 정도였으니, 관료들이 화가 난 것도 당연했다.
그러면 도시의 길드들도 일단은 서로 화해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서로 모두 ‘협상이나 타협 제안하는 순간 약점을 보이는 거다, 책잡힐 짓 하지 마라’이러고 있으니...
“저기 외부에서 온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입니다.”
파셔는 어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나고 심술이 났지만 외부에서 온 이들에게 나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파셔는 가서 인사를 하고 당당하게 주장할 생각이었다.
“...왜 안 올라가고 저러고 있는 거지?”
“글쎄요? 아. 저기 마법사들이 내려오고 있네요. 마법사들이 사냥한 모양입니다. 듣고 보니 어부들이 ‘마법사도 사냥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건 것 같...”
“...아직 학생이잖나?!”
파셔는 이한이 몬스터의 피를 털어내며 나오는 모습에 기겁했다.
몬스터의 숫자와 바다의 넓이를 생각했을 때 인력이 넉넉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학생이 저렇게 싸울 줄이야.
그 정도로 일손이 부족했던 것인가?
“그... 그러네요.”
“왜?? 어째서?”
“그, 아마 도시의 다른 길드들이 도움 요청을 거절한 거 아닐까 싶습니다만...”
“......”
파셔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건 부끄러움이었다.
외부에서 온 학생이 도시의 도움 하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저렇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본인은 평생 동안 이 도시에서 살아왔으면서 지금 뭘 하고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