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쓰레기 같은 놈!”
“!”
부하들은 파셔가 다른 길드에게 분노한 줄 알았지만, 사실 파셔가 분노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다른 길드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생각만 하느라 어린 학생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가만히 있다니.
파셔는 부들부들 떨더니 외쳤다.
“가자!”
“예?”
“따라오란 말이다!”
‘왜 이러시지?’
늙은 어부가 분노를 터뜨리자, 밑의 사람들은 걱정이 됐다.
외부인들에게 시비를 걸어서 좋을 게 없었다.
다른 길드들과 마찰이 심하다지만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그걸 이해해 줄 리는 없지 않은가.
최대한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
볼라디 교수와 같이 암초에서 나오던 이한은 저 멀리 성난 얼굴로 몰려오는 어부들을 보고 의아해했다.
“뭡니까?”
“어부들이군.”
볼라디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닙니까?”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우레걸음 교수한테서 들었듯이 이 주변 길드들은 오랜 기간 마찰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고, 당연히 외부에서 온 이들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친절하고 부드러운 신사들은 아니지 않은가.
‘혹시 어부들의 사냥감을 뺏거나 한 건 아니겠지.’
워낙 사냥에 미친 이들인 만큼, 미리 허가를 받은 영역을 몰래 넘어가 다른 것까지 사냥하지 않았나 의심이 됐다.
“그럴지도.”
“어떻게 하죠?”
“준비해라.”
볼라디 교수는 몬스터를 소탕하기 위해 암초 위에 올라갔을 때처럼 이한에게 말했다.
이한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이런 미친...!’
지금 어부들하고 싸울 준비를 하란 소리였나!?
“...교수님, 어부들하고 싸우면 안 됩니다! 도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정당방위라고 생각하겠지.”
“......”
그건 맞긴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빨리 상황을 해결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불필요한 충돌을 늘리면 어떡한단 말인가.
있는 충돌도 피해야 할 상황에...
“어부들의 그물을 조심해라. 한 번 발이 묶이면 위험할 수 있다.”
“어부들하고도 싸워보신 적 있습니까?”
이한은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물은 질문이었지만 볼라디 교수는 긍정했다.
“그렇다. 배 위에서는 특히 위협적이지.”
“......”
‘이 정도면 여행 다니다가 눈만 마주쳐도 바로 공격하신 거 아닌가?’
이한이 고민하는 사이 어부들이 도착했다.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늙은 어부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스란 시 공인(公認) 길드의 대표로서, 또 이스란 시의회 의원의 일원으로서, 진심을 다해 사과드리겠습니다!”
“?”
“?”
이한도 사냥꾼들도 의아해했다.
“왜 저러는 거지?”
“설마 오늘부터 사냥을 막으려는 건가? 그런 무도한 짓을 했다가는 산맥의 저주를...”
“여긴 바다야.”
“바다의 저주를 받을 걸세!”
사냥꾼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파셔는 말을 이었다.
“저는 길드의 조합장으로서, 외부에서 도시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직 어린 에인로가드의 학생께서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소탕했습니다!”
“?”
이한은 무슨 소린가 싶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아, 그러니까 지금...’
볼라디 교수가 지팡이 들고 협박해서 몬스터 소탕하고 있는 모습이, 인력 부족으로 학생이 나선 것처럼 보였던 것인가?
물론 당연히 오해였다.
메이킨 가문의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인력을 잡지 않았다.
“이에 마땅히 근신하겠으니, 관대한 처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늙은 어부는 우렁찬 목소리로 자기 할 말만 하고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더니 배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물었다.
“저게 뭔 소리입니까, 마법사 님?”
“그러니까 스스로 벌을 주겠다는 건가?”
보통 북부 산맥에서 죄를 지은 사냥꾼들은 시련으로 속죄를 하기 마련이었다.
화살 하나만 꼬나쥐고 맨몸으로 설산 산봉우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정해진 몬스터 하나를 잡아온다거나...
여기도 그런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반성하겠다는 겁니다.”
“반성은 좀 더 고통스러워야 하지 않...”
사냥꾼들의 말을 무시하고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방금 한 말에 좀 정치적인 수사(修辭)가 있어서 이해하기 힘들긴 했지만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있었다.
잘못했고, 반성하고 있고, 앞으로 협상에서 에인로가드 일행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겠다.
이한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긴 한데...
‘뭘 잘못 먹었나? 왜 갑자기?’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옆에서 사냥꾼 한 명이 말했다.
“마법사 님 혼자서 사냥하는 걸 보고 미안해진 거 아닙니까?”
“...아니...”
이한은 설마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거 말고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볼라디 교수에게 시선을 던지자, 교수는 왜 그러느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볼라디 교수의 장점 중 하나는 쓸데없는 말이 적다는 것이었다.
만약 해골 교장이 여기 있었다면 ‘나 덕분에 네가 설득할 수 있었던 거다, 감사하거라’하며 이한의 속을 뒤집어놓았을 테니까!
* * *
파셔와 어부 길드 사람들이 외부에서 온 에인로가드 일행과 접촉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모험가 길드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 완고한 길드 사람들이 벌써...”
“저희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뇌물이라도 준비하거나.”
“쉿.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한테 섣불리 뇌물을 잘못 바쳤다가는 굼벵이가 될 수도 있네.”
사실 모험가 길드는 도시 내의 다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어부 길드와 연금술사 길드는 서로 공헌도가 있는 만큼 적극적으로 산고리아 꽃의 채집권을 얻으려고 했지만, 모험가 길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일단 길드의 단결력도 그렇게 높지 않은데다가 고용인의 입장으로 시작한 만큼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험가 길드는 누가 이기든 간에 모험가들이 적당량만 채집할 수 있게 보장해준다면 상관없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문제는 다른 두 길드는 단단히 독이 오른 만큼 이런 식의 협상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건 외부인인데...
‘아무래도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은 두렵다.’
‘괜히 접촉했다가 역효과가 나는 게 아닐까?’
모험가 길드는 다른 길드보다 훨씬 더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을 두려워했다.
평생 도시에서 직인(職人)으로 살아오는 이들과 달리, 돌아다닐 일 많은 모험가들은 마법사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곤 했으니까.
게다가 에인로가드라면 더더욱 그랬다.
“일단 인사라도 전해야겠소. 최소한 좋은 인상이라도 남겨야지.”
모험가 길드의 조합장은 사무원들을 데리고 항구로 움직였다.
마침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마법사와 사냥꾼들이 보였다.
“안, 안녕하십니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이한은 길드 사람들의 복장과 문양을 보고 어디서 나왔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모험가 길드에서도 나왔나?’
모험가 길드도 이번 갈등에 한 발 걸친 이들인 만큼, 해결하려면 호감을 사서 나쁠 게 없었다.
이한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혹시 제국의 가장 외지고 으슥한 골짜기를 누비면서 헌신하는 분들이십니까?”
“!”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무리 관용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무슨 모험가들이 제국의 가장 외지고 으슥한 골짜기를 누빈단 말인가?
북부 산맥에는 잘 오지도 않으면서...
“맞습니다!”
칭찬을 들은 모험가 길드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긴장이 살짝 풀렸다.
“에인로가드에서 나오신 마법사 분들답게 눈빛에 현기가 가득하십니다.”
‘살기 같은데.’
이한은 볼라디 교수와 자신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아직도 외투에 피가 좀 묻어있었다.
“혹시 어느 가문의 누구신지...”
“아. 저는 워다나즈 가문...”
“헉!”
누군가 숨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려고 애썼지만 이한은 길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에 공포가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한동안 대가문 출신 사람들이나 워다나즈 가문에 신경 안 쓰는 사람들을 만나서 잊고 있었지만,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은 생각보다 위압감이 있었다.
‘실수했나? 요네르나 다른 사람들한테 맡겼어야 했나?’
친근하고 상냥한 마법사가 되어서 길드를 설득해야 하는데 겁부터 주다니.
우레걸음 교수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비통의 눈물을 흘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워다나즈 가문의 업보지 이한의 업보가 아니었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한입니다.”
이한은 일단 말을 끝맺었다.
그러자 사무원 중 한 명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번에 그랑덴 시에서 모험가들과 같이 구울의 왕을 토벌하셨습니까?”
“...좀 이야기가 다르긴 한데 비슷하긴 합니다.”
“검은 바윗돌 숲의 이변도 조사를 도와주셨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맞긴 합니다.”
“아직 학생이셨습니까!?”
사무원은 진심으로 놀랐다.
거리가 멀긴 했지만 아무래도 흥미로운 일들은 서로 소문으로 퍼지기 마련.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한이란 마법사가 모험가들을 도와서 의뢰를 해결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 마법사인데도 모험가를 잘 챙겨주더라 등등의 소문들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소문이 의외로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예.”
“에인로가드의 학생이신데... 왜 모험가들하고 같이 일을...?”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돈 때문이지 뭘 왜야...’
모험가들한테 ‘왜 의뢰 해결합니까?’라고 묻진 않을 것 아닌가.
그래도 면전에서 돈 벌려고 했습니다라고 하긴 힘들어서 이한은 최대한 돌려서 대답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와...!”
“말도 안 되는...!”
모험가 길드의 사람들은 너무 놀라서 수군거리지도 못했다.
그래도 아까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놀라움이었다.
길드 사람들의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공포가 사라지는 게 느껴지자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대화할 때 방해가 되진 않겠군.’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이번 일로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아, 경황이 없어서 이쪽 교수님에 대해서는 여쭤보지도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존함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모험가 길드의 사람들은 볼라디 교수를 보며 물었다.
볼라디 교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배그렉 가문의 볼라디.”
“히이이이익!!”
아까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을 들었을 때보다 더 공포에 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한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볼라디 교수를 노려보았다.
대체 뭘 하고 다니셨길래...
* * *
먼저 저택으로 돌아와 있던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원래 지친 얼굴이긴 했지만 평소보다 몇 배로 더 지쳐보였던 것이다.
“그게...”
이한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자 우레걸음 교수가 혹시 싶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배그렉 교수가 씨 서펜트를 잡으러 가자고 한 건 아니지?”
“예? 이 주변에 씨 서펜트가 있습니까?”
“아까 흔적을 찾았다.”
“...절대 비밀로 해주십시오.”
이한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