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화
닐리아는 손을 들고 이한의 말을 끊었다.
“왜?”
“그, 심해 정령들의 영역을 내가 가보진 않았지만 위험하잖아!”
“그래. 위험하더라.”
“그럼 거길 왜 들어간 건데?”
“속아서.”
“......”
친구가 속았다고 하니 닐리아도 할 말이 없었다.
속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덤비는 정령하고 싸웠는데...”
“싸웠다고!?”
“닐리아. 자꾸 말을 끊으면 이야기를 못하겠잖아.”
“아, 아니...”
닐리아는 억울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여간 싸웠는데 다행히 우피눔을 아는 정령이 와서 도와줬어. 그 정령한테 계약할 수 있는 정령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니까 들어주더라.”
“그렇구나.”
친구의 말을 듣고 끄덕이려던 닐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해 정령들은 근데 난폭하고 위험하지 않아?”
“그래서 다른 영역의 무난하고 친절한 정령들을 계약시켜달라고 했지.”
“그렇구... 잠깐. 다른 영역의 정령을 계약해줄 수 있다고?”
“가능하던데?”
“???”
닐리아는 자신이 배운 상식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아무리 강한 정령이어도 다른 영역의 정령에게 멋대로 명령할 수는 없지 않나??
“내가 계약한 정령 볼래?”
“어? 응. 보여줘봐.”
닐리아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이한과 계약한 정령을 보고 싶어서 수락했다.
“법칙과 계약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비교적 짧고 간단한 주문과 함께 문양이 빛나더니 정령계에서 화염의 정령이 나왔다.
작은 참새처럼 생긴 화염의 정령이었다.
‘평범하네?’
닐리아는 살짝 당황했다.
워다나즈가 소환하는 거라 드래곤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지레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원래 이런 정령을 소환하는 게 보통이었다.
더군다나 워다나즈는 예전부터 화염 마법의 위력을 제한해서 사용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지 않았던가.
“화염 마법 때문에 얘하고 계약한 거지?”
“응. 아무래도 화염 정령이 가장 괜찮을 것 같더라고.”
다른 마법은 이한이 어떻게든 쓴다고 쳐도 화염 마법은 너무 정신력 소모가 심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령한테 맡기는 게 나았다.
닐리아는 화염 참새 정령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진심으로 노려보는 게 아닌, 정령을 위압하기 위한 시늉에 가까웠다.
“말 잘 들어야 해!”
하급 정령들이라 하더라도 다루기 쉬운 건 아니었다.
강력한 정령은 강력한 대로, 약한 정령은 약한 대로 멋대로 구는 것이다.
특히 화염 정령 같은 경우는 성격이 급하고 장난이 심한 녀석이 많아서 더 조심해야 했다.
-......
참새 정령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각 잡힌 자세로 이한의 어깨 위에서 멈춰 있었다.
닐리아는 순간 정령의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말 잘 들어야 해?”
“닐리아 말을 못 들었나?”
이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참새 정령은 날개를 퍼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나보군.”
퍼덕퍼덕!
“한 번만 끄덕여도 돼.”
퍼덕!
이한은 말 잘 듣는 참새 정령을 기특하다는 듯이 두드려줬다.
힘들게 계약한 만큼 괜히 더 기특하고 귀여웠다.
다른 친구들이 정령들을 다룰 때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걱정했는데...
‘운이 좋군.’
이한은 운좋게 착한 참새 정령을 만난 게 분명했다.
“......”
닐리아는 저 참새 정령과 비슷한 모습을 산맥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림자 순찰대한테 포위당한 사냥감들이 보통 저런 표정을 지었다.
‘...겁 먹은 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일반적인 계약보다는 강압과 협박으로 따르게 하는 계약이었다.
“왜 그래? 닐리아.”
“아, 아무것도 아닌데? 아주 둘의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닐리아의 말에 이한은 매우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저런 모습을 보여주자 닐리아는 더욱 더 진실을 말해주기 힘들어졌다.
“정말 정령이 착하고 성실한데? 말도 잘 따르고...! 저런 정령을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지! 맞아!”
“하하. 고맙다. 닐리아.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운이 좋았지.”
이한의 손목에 감긴 바실리스크가 꼬리로 불만스럽다는 듯이 탁탁 소리를 냈다.
고작 하급 정령 하나에 다들 너무 관심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정령계에 들어가게 되면 우피눔의 영역에 같이 가보겠어?”
“...거기 가도 되는 거 맞아? 정말?”
그 때 밀레이 교수가 이한을 불렀다.
“이한 학생.”
“예. 교수님.”
“정령계에 들어갔을 때 다른 영역으로 가는 통로가 생겨도 그 영역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밀레이 교수는 이한을 불러서 원래 정해진 길 밖으로 벗어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번에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쉬지 않고 설명했다.
닐리아는 학년 수석인 친구가 혼나는 보기 드문 모습에 시선을 피했다.
* * *
해골 교장은 이한이 기분 좋아 보이자 의아해했다.
뭐지? 저번에 배운 마법이라도 마스터한 거냐?
“아뇨. 정령하고 계약했습니다.”
오. 무슨 정령하고? 혹시 고대의 정령이라도 찾은 거냐?
“하급 화염 정령하고 계약했는데요?”
......
해골 교장은 경멸 섞인 시선으로 이한을 오물 보듯이 쳐다보았다.
너희 다른 탑 수석들은 이 녀석처럼 행동하지 마라.
“......”
“근데 워다나즈가 학년 수석 아닙니까?”
살코의 질문에 해골 교장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저번 학기와 구성이 똑같군. 바뀌어야 재미가 있는데 말이야.
낙제생들에게는 징벌방이.
우등생들에게는 포상이.
해골 교장의 지론에 따라 각 탑의 수석과 차석들은 포상의 탑에 접근이 허락됐다.
층마다 있는 시련을 극복하고, 보상을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곳!
그러나 이미 1학기 때 쓴 맛을 본 학생들은 속지 않았다.
“저희 포상 필요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
“그냥 돌아가면 안 돼요?”
겸손할 필요는 없다. 너희들이 받고 싶어한다는 걸 나는 알아. 자. 흰 호랑이 탑부터!
“징벌방이 나을 것 같은데.”
이한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해골 교장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타박했다.
네가 감히 그런 소리를?
“?”
너 때문에 이번 학기의 낙제생들이 줄었잖느냐! 징벌방에 데리고 갈 인원도 안 나오게 됐는데, 감히 그런 소리를 해?
“...아, 예. 제가 죄송합니다.”
이한은 진지하게 귀 기울인 걸 후회했다.
‘그냥 개소리였군.’
입장!
옆에 서있던 아덴아르트가 잘 부탁한다는 듯이 가볍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새삼 황녀와 친해지긴 했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뇌물이 최고군.’
이렇게 계속 먹을 걸 바치다보면 2학년 때쯤에는 가벼운 보증을 부탁해도 가능할지 몰랐다.
보증이 무리라면 사업할 때 추천서라도...
협력의 도전
때로 가장 어려운 것은 협력일지니, 학생들이여. 서로 도울지어다.
“?”
이한은 도전의 설명에 의아해했다.
‘쉽지 않나?’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면 모를까, 이한은 황녀와 친한 편이었다.
어떤 도전이 나올지 몰라도 별로 어려울 것 같진 않은데...
‘아니다. 탑의 난이도를 생각해봤을 때 가혹한 도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나중에 부탁하려고 했던 보증을 지금 시련이 강요할지도 몰랐다.
이한은 그런 게 나온다면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더니 다른 방향에서 먼저 들어갔던 흰 호랑이 탑, 검은 거북이 탑, 불사조 탑 학생들이 걸어 들어왔다.
“......”
“......”
이한과 아덴아르트는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
* * *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이한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외쳤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우린 서로 협력할 수 있다!”
이한의 외침에 지젤과 살코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어이없어했다.
“지팡이나 내려놓고 말하시지?”
“지팡이를 왜 이쪽에 겨누고 말하는 거냐?”
“이건 습관 같은 거다. 하여간 움직이지 마라.”
“......”
둘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섣불리 움직이진 않았다.
저런 상황에서 워다나즈는 절대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창고의 음식을 훔쳐먹는 가이난도를 용서해줄 정도로 관대했지만,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든지 냉정해질 수 있는 놈이 워다나즈였다.
‘일단 반격을 하더라도 지금은 무리겠군.’
‘모라디를 방패로 쓰면 우리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저. 여러분.”
티질링 사제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 도전이 정확히 어떤 도전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견제해서는 서로 손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야. 다들 서로를 믿자고.”
이한은 여전히 지팡이를 겨눈 채로 말했다. 지젤과 살코는 뭐라고 지적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지적해봤자 지팡이는 계속 들고 있을 테니까!
살코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워다나즈. 네가 가장 늦게 들어왔지. 혹시 이 시련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아니. 나도 딱히 정보가 더 있진 않다. 하지만 짐작 가는 건 있지.”
이한은 냉정하게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마 서로 공격해서 몇 명 정도 줄여야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이겠지.”
“......”
“...?”
잠시 침묵이 돌았다.
옆에 있던 아덴아르트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디 그런 정보가...?”
“서로 다른 탑 학생들을 모아놓고 협력을 시험하려면 그 정도 시련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한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아덴아르트는 살짝 흔들렸다.
그...
그런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니 근거가 있는 것 같기도 한...
“자. 우리 서로 협력해서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줄일 수 있는 인원을 뽑는 거다. 알겠나?”
“미친 소리 같긴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밖에 없긴 하겠군. 괜히 싸우다 전멸하는 것보단...”
살코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새파랗게 어린 마법사들이군!
유령 마법사가 탑의 가운데에서 솟아났다.
불투명한 형체로 지팡이를 갖고 있는 유령은 안광을 내뿜으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어설픈 마법으로는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과연 서로 협력해서 나를 이길 수 있을까?
“?”
“...?”
이한이 말한 ‘서로 죽여서 몇 명 없애기’ 대신 유령 마법사가 나오자 학생들은 눈을 깜박였다.
살코는 주저하며 물었다.
“저희끼리 몇 명을 줄여야 나아갈 수 있는 시련이... 아닙니까?”
-뭐라? 무슨 그렇게 끔찍한 망상을 하는 거냐?
유령 마법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살코를 쳐다보았다.
서로 다른 탑의 학생들이 힘을 모아서 자신보다 강력한 마법사를 쓰러뜨리는 게 이 시련의 목표였지, 무슨 강제적으로 인원을 줄이는 시련이 어디 있겠는가.
“......”
“......”
-?
학생들이 대답 대신 친구 한 명만 빤히 쳐다보자 유령 마법사도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이한이 바로 마법을 갈겼다.
“번쩍여라!”
-제법!
유령 마법사는 당황했지만 노련한 마법사답게 지팡이를 휘둘러 번개를 튕겨냈다.
동시에 사방에 광풍이 휘몰아치며 사나운 바위 조각들이 산탄처럼 쏘아져나갔다.
학생들은 재빨리 각자 엄폐물 뒤로 피했다.
이한은 즉시 친구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저 유령을 공격하자!”
“워다나즈, 아까 분명...”
“살코! 지금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냐!”
이한의 호통에 살코는 살짝 억울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유령 마법사를 쓰러뜨리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이런 전투에서 워다나즈만한 지휘관도 없었다.
살코가 입을 다물고 싸울 준비를 하자 지젤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한 대만 때리고 싶다.’
괜히 ‘때로 가장 어려운 것은 협력이다’라고 도전이 말한 게 아니었다.
유령 마법사고 뭐고 그냥 평소 쌓였던 것까지 담아서 칼을 휘두르고 싶을 정도였다.
“모라디. 칼에 마법 건다!”
“그래.”
지젤은 엄폐물 뒤에서 마법을 준비하며 귀에 신경을 기울였다.
괜히 고개를 내밀었다가 되레 당하는 수가 있었다. 이럴 때는 청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해야했다.
‘반대쪽. 푸른 용의 탑 쪽이군.’
안전하다는 걸 파악한 지젤은 검은 거북이 탑 쪽에 신호를 보냈다.
바로 일어나서 적의 뒤를 치자는 신호였다. 투탄타도 이해했다고 답변했다.
“셋. 둘. 하나. 지금!”
곧바로 일어난 학생들은 유령 마법사에게 공격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거센 숨을 내쉬며 아덴아르트와 같이 유령 마법사를 쓰러뜨린 이한이었다.
“......”
“......”
지젤은 들고 있던 칼로 <협력의 도전>에서 ‘협력’을 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