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너희는 왜 안 도와주는 거냐?”
이한은 새벽별을 들고서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팔목에 칭칭 감겨 있던 바실리스크가 동의한다는 듯이 꼬리로 친구들을 힐난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배은망덕하게 대꾸했다.
“도와줄 시간도 없었잖아!”
“너였어도 무리였을 거다!”
“제가 보기에도 시간이 좀...”
화를 내던 친구들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잡은 거냐? 아. 알겠군.”
살코는 묻다가 깨달은 표정으로 바실리스크를 쳐다보았다.
“이 바실리스크의 사안을 쓴 거군. 맞나?”
-......
새끼 바실리스크는 멋쩍어하며 시선을 피했다.
옆에 있던 지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실리스크의 사안이었으면 우리도 느꼈겠지. 투탄타. 넌 칼잡이가 아니라서 모르는 모양인데, 워다나즈가 들고 있는 걸 봐라.”
이한은 새벽별을 들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 바실리스크의 독을 검에 바른 거겠지.”
-......
바실리스크는 그냥 이한의 외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한은 꼬리를 토닥이며 달래주고서 설명에 나섰다.
“바실리스크가 아니라 이 검의 힘 때문이다. 흑자석(黑紫石)으로 되어 있는 검이라 마력을 강하게 흡수하거든.”
반마법주의자가 사용하던 명검, 새벽별은 특정 상황에서는 더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유령 마법사는 원래라면 이한과 아덴아르트 단둘이서 이렇게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가까이 접근해서 접촉형 마법을 시전하려고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른 풋내기 마법사였다면 마법사로서 거리를 뺏긴 상황에 당황하며 지팡이를 떨어뜨렸겠지만 이한은 상대가 마법을 뚫고 가까이 다가오자 바로 새벽별부터 뽑아들었다.
설마 마법사인 이한이 새벽별 같은 검을 갖고 다닐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령 마법사는 크게 데미지를 입었다.
-크아아악...!? 대체 이 검을 왜 마법사가...!?
“운이 좋았지.”
“...아니, 진짜 그런 검을 왜 갖고 다니는 거냐?”
살코의 질문에 다른 친구들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저런 아티팩트를 왜 갖고 다닌단 말인가.
저건 마력 고갈은 물론이고 각종 마법 시전에 악영향을 끼칠 아이템이었다.
그걸 굳이 갖고 다니면서 마법을 연습하다니...!
“생각해봐라. 살코. 여기 학교에서 마법사하고 싸울 일이 많겠냐, 마법사 아닌 사람하고 싸울 일이 많겠냐.”
“......”
살코는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넘기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뭔가 그럴듯했다.
‘...그런가?’
“투탄타. 지금 설마 저 개소리를 듣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라 믿는다. 네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 * *
어쨌든 시련을 극복한 학생들은 올라가는 대신 잠시 기다렸다.
펑!
연기와 함께 보상이 학생들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저번에 뭘 얻었지?”
“우린 충격 흡수의 갑옷을 얻었지.”
앙라고가 바로 대답하자 지젤은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누가 보면 같은 탑인 줄 알겠군.’
“오. 좋은 아이템이군. 난 본 적 없는데, 아직 꺼낸 적이 없는 건가?”
“...저번에 너한테 맞을 때 안에 입고 있었는데...”
“......”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이한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기 보상이 나왔군!”
“보상이 맞나?”
살코는 초라한 보상의 모습에 눈썹을 찌푸렸다.
놀랍게도 종이 한 뭉치가 보상의 전부였던 것이다.
물론 겉모습만으로 아이템의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저건 좀...
“이건 통신 아티팩트군.”
이한은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이 아티팩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번에 비밀기지에서 본 적 있는 만큼, 유사한 마력 패턴을 느끼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통신 아티팩트?”
“그래. 여기에 이렇게 잉크를 흘려 넣으면...”
이한이 종이 한 장을 들고 ‘가이난도 바보’라고 쓰자, 다른 종이들에도 똑같이 ‘가이난도 바보’라고 글자가 올라왔다.
저번에 얻었던 것과 같은 원리지만 이건 여럿이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었다.
“이런 아티팩트가 있었나!”
“그래. 참고로 학교에서 이런 아티팩트를 줍게 되면 조심해라. 선배들은 가차없이 사기를 친다더군.”
‘이 자식은 이걸 어떻게 아는 거야?’
친구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이한은 종이 뭉치를 챙겼다.
“안 그래도 한 번 외출을 하려고 했었으니, 다음 외출 때 팔아서 은화로 바꾼 다음 너희한테 나눠주마.”
“......”
“...???”
이한의 설명을 듣고 있던 친구들은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티질링 사제가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그걸 왜 파는데??”
지젤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서 질문을 던졌다.
이한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걸 안 팔면 뭐하려고?”
“...워다나즈. 나도 아티팩트를 팔아서 자금을 확보하는 건 좋아하지만, 이것까지 팔 필요는 없지 않나?”
살코는 황당해하며 말했다.
이 시련의 보상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아티팩트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원래라면 친할 일 없는 다른 탑 학생들이 교훈을 얻고 서로 좀 더 친해지라는 뜻이 분명했다.
근데 그걸 그냥 팔아버리는 건 좀...
“그런가? 가격이 별로 안 되려나?”
“그 뜻이 아니었다. 우리끼리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락하기 쉬울 것 아니냐.”
“살코. 네 말도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은 은화를 더 선호할 걸.”
이한은 안타깝다는 듯이 살코를 쳐다보았다.
그냥 만나서 하면 되는 이야기를 아티팩트로 하기 위해 은화를 포기할 학생들은 많지 않을 터.
“이걸 팔지 않고 우리끼리 나눠서 쓰길 원하는 사람?”
이한의 질문에 전원이 손을 들었다. 이한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아덴아르트까지 손을 들고 있었다. 이한이 쳐다보자 아덴아르트는 아주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정말로??”
“은화는 다른 기회에서 벌 수 있을 거야.”
“그런 안일한 생각이라니. 언제 벌 수 있을지 알고... 어쨌든 알겠다. 다수결이니까.”
이한은 놀라워하면서도 친구들의 결정을 따랐다.
다 같이 해결한 시련인 만큼 모두의 의사가 중요했던 것이다.
“거 참.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
“이게 그렇게 쓸모가 있을까? 그냥 종이 새를 보내도 될 것 같은데.”
“......”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지는 않은...”
“작작 좀 해!”
이한이 종이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계속 말하자 친구들은 결국 폭발했다.
* * *
학생들이 무사하게 걸어 나오자 해골 교장은 투덜거렸다.
다들 쓸데없이 친한 게 문제군.
원래 다른 학년 학생들이었다면 이런 협력의 시련에서 서로 헐뜯고 견제하고 싸우다가 자멸하기 마련했을 텐데, 이번 1학년들은 서로 너무 친했다.
이런 소꿉놀이 같은 환경에서 무슨 마법이 탄생하겠는가.
“안 친합니다!”
“누가 누구하고...”
시끄럽다.
몇몇 학생들이 강하게 부정하려고 했지만 해골 교장은 듣지 않았다.
“워다나즈 저 녀석은 무슨 서로 합의해서 숫자를 줄여야 하는 게 시련일 거라고 하지 않나...”
살코는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이미 끝난 일을 끌고 왔다.
그 말을 들은 해골 교장은 매우 흥미를 보였다.
흥미로운 의견이군. 내년 신입생들은 저 시련을 추가해볼까...
“......”
“......”
친구들은 살코를 쏘아보았다. 살코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하다. 후배들아.’
하여간 다들 겁쟁이처럼 시련 하나만 도전하고서 고생 많았다. 내년에도 이 자리에 참가하길 비마. 패배자처럼 징벌방에 가지 말고 승리자처럼 여기 참가하란 말이다. 알겠느냐?
“예...”
“정말 기쁩니다. 의욕이 막 생기네요.”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워다나즈 넌 날 따라와라.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뭐지? 무슨 마법을 가르치려고?’
냉정하게 계산해보면 의외로 해골 교장이 가르치고 있는 마법들도 볼라디 교수에 못지않게 많았다.
이한은 해골 교장이 무슨 마법을 재촉할지 빠르게 계산해보며 예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목적지에는 예상 밖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치유 마법 학파에 소속된 필과 칠 두 선배가 피곤한 얼굴로 앉아있었던 것이다.
고생이 많다.
“아,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그렇게 알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어이. 커피 좀 더 갖고 와라.
데스 나이트가 고개를 숙이더니 펄펄 끓는 커피가 든 양철 주전자를 들고 왔다.
두 선배는 호로록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셨다.
‘어라?’
이한은 평소 볼 수 없는 친절한 해골 교장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혹시 아무리 사악한 해골 교장이라 하더라도 치유 마법사들한테는 조금 약해지는 것일까?
마시고 힘내도록 해라. 그래도 너희들 아니면 누가 치유 마법을 전공하겠느냐. 혹시라도 그만둘 생각은 하지 말고. 정 힘들면 나한테 와서 말하도록 해라.
“......”
이한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뭐 이런...’
지금 해골 교장은 치유 마법 학파 선배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당근과 채찍에서 당근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 후배.”
“여기. 여기다.”
둘이 이한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한은 가볍게 인사하고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치유 마법 강의는 오늘이 아닌데요.”
해골 교장은 힐끗 밖을 쳐다보았다.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미친 놈.’
날짜를 떠나서 이 시간에 강의라고 생각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 강의는 아니고.”
“성 이악투스의 축제 때문에 왔어. 이번 주거든.”
‘제국에는 축제가 너무 많군.’
이한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놀 게 적어서인지 제국 사람들은 정말 별의별 축제를 다 만들어서 기념했다.
인기 있고 커다란 축제는 외부에서 사제들이 찾아와서 도와줄 정도였으니...
그나마 그 정도 되는 축제는 이한도 어느 정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었지만, 그 밑 규모로 내려가면 제국 신문 경제란 위주로만 보는 이한에게 너무 낯선 이름들이 됐다.
‘그리고 이건 나만 이상한 게 아니다.’
당장 3일 전에 가이난도가 탐정 축제라고, 친구들 중 아무나 한 명 시체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모두 무시하지 않았던가.
너무 많은 축제가 피로도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선배들 앞에서 불만을 토해낼 수는 없는 법.
이한은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축제 말입니까. 정말 기대되는군요.”
“너까지?”
“세상에. 왜 다들 이 축제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두 선배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한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 녀석은 좋아할 만하지. 너희들과 달리 사나운 맹수거든.
“폐하께서 이 축제를 제국법으로 금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이해한다. 이해해. 제국의 놈들이 참으로 야만적이지! 그래, 그래! 그래도 그만두면 안 된다!
해골 교장은 보기 드물게 학생들의 편을 들어줬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해골 교장에게 물었다.
“교장 선생님.”
왜?
“성 이악투스의 축제가 뭡니까?”
...넌 저 축제를 좋아하는 놈들보다 더 야만인이다. 그걸 어떻게 모르는 거냐?
해골 교장이 야만인 보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물론 이한은 무시했다.
‘하여간 축제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축제가 제국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성 이악투스는 돌멩이 하나로 사악한 마룡을 쓰러뜨린 꼬맹이다. 축제는 이 꼬맹이를 기념하는 거고. 참 나.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군. 그 돌멩이에 마법을 걸어준 날 찬양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해골 교장의 삶과 함께하는 옛 역사 이야기도 흥미롭긴 했지만 이한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군요. 어떻게 기념합니까? 케이크라도 만드나요?”
돌을 던지지.
“제물 인형한테 말입니까?”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각종 커다란 인형을 만들어서 제물로 바치거나 태우거나 하는 일들은 종종 있었다.
아니.
“그럼 호수에?”
호수에 돌을 왜 던지나? 정령이 화나면 어떡하려고. 서로한테 던지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