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무슨 이딴 팔찌를?’
이한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티팩트를 선물한 해골 교장을 욕했다.
안에 있는 악마가 튀어나와서 몸을 뺏을 수도 있는 아티팩트라니.
제정신인 마법사라면 차고 다닐 이유가 없는 아티팩트였다.
그러나 사실 해골 교장도 할 말은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 만마의 팔찌에 갇힌 악마들은 그냥 갇힌 게 아닌, 존재 자체가 귀속되고 봉인된 이들이었다.
즉 잠깐 나오는 건 가능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세 팔찌 안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안에 갇혀 있는 악마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던가.
이 악마들이 서로 섞여서 봉인된 상황인데, 거기서 자기 자아를 되찾고 직접 기어 올라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설령 그런 짓을 한다 하더라도 징조가 있고 또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마법사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안푸르사스는 곧바로 자아를 되찾고 바로 정신을 회복해 이한이 반응하기도 전에 팔찌 밖으로 튀어나왔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전쟁의 열기가 투쟁과 전투의 악마인 안푸르사스를 깨운 것도 있었지만, 사실 본질적인 이유는 착용하고 있는 마법사의 강대한 마력 덕분이었다.
이한이 의식적으로 주입하지 않더라도 마법을 시전하거나 마력을 유용할 때 흘러들어가는 마력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이한은 해골 교장을 욕했다.
“헛소리 하지 마라. 악마. 내가 악마와 타협할 것 같나?”
-나 안푸르사스를 얕보는군, 마법사! 내가 비록 여기 봉인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 때는 모든 적들의 악몽이자 공포였도다!
이한의 말에 안푸르사스 또한 코웃음을 쳤다.
만마의 팔찌에 존재가 봉인되고 귀속된 상태라 언젠가는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안푸르사스는 강력한 악마였다.
이런 마법사의 몸 하나 정도는 간단하게 뺏을 수 있을 정도로.
-봉인의 주인이자 마력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 은혜가 있으니 심하게 다루지는 않겠다.
“...잠깐. 마력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 은혜라니. 그게 무슨 소리...”
-보아라, 그리고 나를 두려워하라, 나는 안푸르사스다!
대화를 끝낸 안푸르사스는 이한의 몸을 뺏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잠깐 몸을 빌려 진정한 전사의 전투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
-......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안푸르사스도, 악마의 선언에 긴장했던 이한도 서로 당황했다.
-힘이 덜 회복된 것인가?
안푸르사스는 다시 한 번 존재를 부풀렸다.
그러나 인간 마법사의 육신은 마치 거대한 산맥을 개미가 미는 것처럼 막막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한동안을 낑낑대며 버티던 안푸르사스는 기진맥진해서 물러났다.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미친 놈 아닌가 이거?’
기진맥진해서 물러난 이상 얌전히 팔찌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계속 버티자 이한은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악마에게 양심이나 염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면 그러고 있어라.”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
이한은 봉인이고 뭐고 간에 해골 교장을 찾아가 ‘만마의 팔찌 안에 있는 악마들을 모두 다 소멸시켜버리면 안 될까요?’라고 묻고 싶어졌다.
“가이난도. 잘 들어봐라.”
-나는 안푸르사스다!
“아. 미안. 순간적으로... 하여간 안푸르사스. 잘 들어봐라. 나도 물론 네 염원을 들어주고 싶지. 너희 갇힌 만마의 주인인 만큼 그런 부탁을 왜 안 들어주겠나.”
귀가 따갑게 떠드는 악마 때문에 이한은 무시 대신 설득을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전투가 아니라 축제다. 잘 봐라.”
-서로 피를 흘리는데?
“...축제가 흥겨우면 서로 피도 좀 흘릴 수 있지.”
-저기 부서진 잔해들과 시체들이 있는데?
“...시체가 아니라 잠깐 쓰러진 사람들이야. 축제가 흥겨워서 그래.”
악마는 이한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팔찌의 주인인 만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정 내게 전투의 기회가 없단 말인가? 정말로 아쉽...
쿠르르르르릉!
차원 균열이 열리더니 갑자기 소름끼치는 냉기가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
다른 차원의 적수가 찾아오는 걸 직감한 선배들이 인상을 굳히며 주문을 외웠다.
‘냉기라면...’
‘설성이면 골치 아픈데.’
‘제발 펭귄 군대만 나오지 마라. 펭귄 군대만 나오지 마라.’
각자 자기가 경험했던 최악의 냉기 관련 적들을 떠올리며 선배들은 긴장했다.
또 이 마법사들의 영지인가? 너희 마법사들은 왜 이렇게 불안정하게 사는 것인가?
“......”
낯익은 상대의 모습에 이한은 고개를 푹 숙였다.
푸른 얼음 왕관을 쓰고 나타난 지성 넘치는 거인의 모습.
균열을 뚫고 나타난 건 서리거인의 왕이었다.
* * *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선배들의 모습을 본 이한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선배들이 서리거인의 왕을 퇴치하는 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괜히 서리거인의 왕이 이한을 알아보고 부르면 일이 귀찮아지는 것이다.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닥쳐라 좀.”
이한은 귀가 따갑게 소리치는 악마에게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제 안푸르사스가 팔찌 안으로 돌아가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부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절대로 부르지 않겠다!
어린 도전자로군. 그동안 잘 지냈나? 별로 늙지 않았군그래.
“......”
서리거인의 왕은 이한을 바로 알아보고 인사했다.
생각해보니 이한의 지팡이에 서리거인의 왕이 주고 간 돌이 박혀 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러면 그 사이 얼마나 늘었는지...
“젠장.”
예지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직감되는 미래에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선배님들. 피하십시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필은 이한의 말에 농담하지 말라는 듯이 대꾸했다.
후배를 데리고 와서 도망치는 선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여긴 에인로가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홀티는 언데드 군대를 발진시켰다.
여기서 서리거인의 왕과 이한의 관계를 가장 잘 아는 범인, 아니, 선배인 만큼 책임감이 막중했던 것이다.
“서리거인의 왕이여, 어린 마법사를 건드리지 마라!”
흑마법사? 기운이 낯이 익은데...
“...어디서 헛소리를!”
코홀티는 유령 군대를 이끌고 서리거인의 왕을 쳤다.
그러나 서리거인의 왕도 만만치 않았다. 바로 균열에서 펭귄 군대를 불러오더니 코홀티의 유령 군대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펭귄 군대를 본 몇몇 선배들은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펭귄 군대잖아!!”
“하필이면!”
“?”
이한은 선배들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펭귄 군대가 싸우는 모습을 보자 바로 이해가 갔다.
살벌한 냉기 마법을 몸에 두르고 유령 군대를 물어뜯으며 돌파를 시도하자 그 대단한 위세의 유령 군대도 밀릴 정도였다.
“지원! 지원!!”
“저기 뚫리면 위험해진다! 펭귄 군대부터 처리해!”
펭귄 군대를 본 선배들은 대경실색해서 그쪽부터 처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안파곤 또한 아티팩트를 감히 서리거인의 왕에게 조준하지 못했다.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펭귄 군대를 향해 조준했다. 조금이라도 그쪽으로 움직일 경우 바로 발사할 기색이 역력했다.
서리거인의 왕은 다시 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
가라.
서리거인의 왕이 명령을 내리자, 얼음으로 된 성성이들이 나타나더니 포효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냉기로 된 길이 만들어지더니 이한을 향해 쭉 뻗었다. 얼음 성성이들은 그 위에서 더욱 더 강력해졌다.
치유 마법 학생들이 올 테면 오라는 식으로 전투를 준비했지만 이한이 보기에는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치유 마법을 전투적으로 쓰려면 상대가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
상대의 신경, 기관, 장기 등 다양한 요소들을 파악하고 뒤트는 것으로 최대한의 파괴력을 불러오는 게 치유 마법의 전투적 사용법.
그러나 얼음으로 된 이계의 정령한테는 저런 게 의미가 없었다. 한쪽 팔을 묶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저번처럼 서리거인의 왕이 불러온 공격을 피하는 거였다면 나았을 텐데, 저번 시련을 통과해서 그런지 서리거인의 왕은 기준을 대폭 높인 것 같았다.
저 얼음 성성이들은 아무리 봐도 대충 잡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화염 마법을 통제 없이 풀어버리면... 젠장. 선배들이 더 타격 입을 것 같은데.’
-나, 안푸르사스에게 팔을 빌려다오!
“좀 닥치라니까.”
슬슬 인내심이 바닥난 이한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안푸르사스는 악마답게 상대방의 감정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안푸르사스의 진명에 맹세코 저 무리를 해치우게 해주면 돌아가겠다!
“해치울 수는 있고?”
이한은 떨떠름했다.
물론 안푸르사스의 원래 상태였다면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꽤나 강력한 악마였으니까.
그러나 안푸르사스는 지금 이한의 몸을 빌려서 싸워야 하는 상태.
빌려준다고 해도 과연 잘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만약 다 해치우지 못한다면 마법사의 가장 하찮은 몸종이자 노예가 되어 섬기겠다. 나, 안푸르사스는 전사로서...
안푸르사스는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전사였는지, 또 자기 차원에서 얼마나 많은 적수들을 쓰러뜨렸는지 떠들어댔다.
이한은 사실 크게 믿지는 않았다. 저런 식의 포장은 이한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족을 쓰러뜨리고 바실리스크를 붙잡았으며 구울의 왕을...’
하지만 점점 더 시간이 없어졌다. 얼음 성성이들이 치유 마법 학생들을 뚫고 넘어오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을 붙잡은 나무덩굴을 찢어발기고 선배를 치려고 하자 이한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만약 제대로 해결 못하면 나도 맹세코 소멸시켜버리겠다. 가라!”
* * *
필은 얼음 성성이들을 보고 짜증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펭귄 군대보다는 낫지만 저 적들 또한 최악의 상대였다.
얼음으로 된 놈들이라 쓸 수 있는 마법이 한정되는 것이다.
“차라리 펭귄 군대 쪽 있는 놈들을 불러오자! 펭귄 군대를 우리가 상대하는 게 낫겠다!”
“알겠습니다. 지금 신호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뒤에서 검은 빛이 날아오더니 얼음 성성이를 그대로 쪼개버렸다.
“?”
“???”
지금 치유 마법사들의 육체적 능력은 마법으로 강화된 상태였다.
그런 그들의 인지를 뚫고 날아온 공격에 마법사들은 당황했다.
“무슨...”
그러나 놀라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새벽별을 뽑아든 이한이 살기를 내뿜으며 얼음 성성이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촤촤촤촤촤촥-!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가 보여주는 모습은 마법사보다는 경지에 오른 검사에 가까웠다.
얼음 성성이들은 분노하며 뾰족한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후배는 잔상을 남기고 사라지더니 성성이들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오러잖아!?’
흰 호랑이 탑 출신 선배가 이한이 오러를 뽑아내는 걸 보고 경악했다.
재능 있는 검사가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어야 완성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
얼음 성성이들은 이한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전사라는 걸 깨달았는지 전략을 바꿨다. 한 놈이 검에 쪼개지는 순간 동시에 달려들어서 일단 붙잡으려고 들었다.
그러나 이한은 남은 주먹을 휘둘러 얼음 성성이들을 힘으로 박살내버리고 포효했다.
“......”
“...후, 후배가 오늘 화가 많이 났...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