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화
"예, 알겠습니다."
이한의 대답에 코홀티는 예뻐 죽겠다는 듯이 후배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배려심 깊은 후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다른 학파, 다른 학교에도 이런 후배는
없을 것이다.
"내가 디레트를 두서워해서는 아니고... 사실 무서워하긴 하는데 이게 좀... 미안하다.
어떻게든 보답해줄게."
"하하, 아닙니다. 후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이한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코홀티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보내며 감동받는 사이 옆으로 학생 한 명이 엇갈려
서 지나갔다.
'누구지?"
지금 이한과 코홀티가 나온 치유 마법사들의 천박 쪽으로 향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
다.
미치광이 축제에서 나온 부상자.
하지만 지금 걸어간 학생은 매우 멀쩡해보였다. 게다가 낮까지 띄었다.
'어디서 봤지? 내가 만난 선배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이한은 곧 지나간 학생의 정체를 깨달았다.
"방금 지나간 분, 부여 마법 학파 선배님 아니십니까?"
저번에 버두스 교수 대신 중간고사를 준비해줬던 부여 마법 선배, 안파곤이었다.
"어? 그렇겠지. 그건 왜?"
“겉으로 봤을 때에는 멀쩡해 보이셨는데 왜 치유 마법사들의 천박으로 가나 해서요.”
"아마 내장이 다쳤겠지. 위나 간, 혹은 비장(脾)이 돌로 변했을지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끔찍한 소리를 하는 선배의 모습에 이한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것도 모르고 코홀티는 후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히 떠들었다.
"...그렇게 뼈를 훔칠 수 있었던 거야. 재밌지?"
"앗, 예."
"그렇지? 재밌을 줄 알았다니까. 이게 사실 뼈가 뼈 원소 마법뿐만 아니라 저주 쪽에도
쓰이거든. 저주 마법이 흑마법 쪽에서도 좀 가장 연구가 덜 된 부분이긴 한데 그만큼 흥미
로워서... 아까 내장 이야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혹시 심장을 파먹는 기생충 알아?"
부여 마법 학파 중에서 가장 사교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안파곤답게, 천박에 도착하자
치유 마법사들은 금세 알아보았다.
"앗, 너는... 음... 부여 마법... 누구였지?"
"엇, 선배님은... 음... 부여 마법... 성함이?"
안파곤은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안파곤."
"미안하다."
"미안할 것 없지. 나는 내 마법을, 너희는 너희 마법을 배우러 학교에 들어온 거지 서
로 이름을 외우러 들어온 게 아니니까. 우리는 서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자신
의 마법에 몰두하는 마법사들 아닌가."
알파곤의 말에 치유 마법사들은 존중의 시선을 보내...
...는 대신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이 자식들이 누구랑 누굴 같이 등급으로 놓는 거야?"
'너희 학파 놈들하고 우리가 같아 보이냐?'
학교의 궂은 일이 있으면 매번 참가하는 치유 마법 학파 학생들과, 학교가 멸망해도 자
기네들 공방에서 아티팩트 만들고 있는 부여 마법 학파 학생들은 절대 같지 않았다.
“그, 그래서... 왜 왔냐?"
"혹시 내장이라도 당하셨습니까? 멀쩡해보이시는데."
"여기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가 있지 않나? 분명 1학년이 있다고 들었는데.”
"......"
치유 마법 학생들은 황당해했다.
사교성 없기로는 소문 난 부여 마법 학파 놈들에게까지 들어갈 정도면 대체?
"왜 찾지?"
"괜찮다면 힘을 빌리고 싶어서."
“설마 마력을 빌리려고 온 건 아니겠지?"
"뭐? 지금 날 모욕하는 거냐?"
안파곤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사교성이 없는 거지 자신을 모욕하는데도 가만히 있을 만큼 안파곤이 멍청하진 않았
다.
치유 마법 학생들은 멋쩍어하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마력을 빌리려고 온 사람이 있어서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군,'
안파곤은 속으로 경멸했지만 지적하진 않았다. 시간 낭비였다.
“복합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온 거다. 그런데 자리에 없어
보이는데."
"음, 잠깐 다른 선배의 부름을 받고 나갔지."
"그래? 한 발 늦었군, 어느 학파지?"
"흑마법 학파."
"흑마법...? 아. 맞아, 흑마법도 듣고 있었지. 그쪽은 뭐 때문에 도움을 요청한 거지?"
안파곤은 이한이 가진 아티팩트 관련 제작 능력을 매우 높게 샀다.
똑같은 아티팩트를 제작하더라도 그 성능을 훨씬 더 강화시키고 심지어 몇몇 구조들은
생략까지 가능한 그 능력은 어느 아티팩트 장인이든 탐을 낼 능력이었다.
여러 아티팩트들을 조합해서 그 힘을 증폭시키는 복합 아티팩트의 경우 더더욱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리라.
타고난 두뇌와 마력에 대한 감응 능력, 거기에 마력량까지 결합되었기에 가능한 일.
얼마나 감탄했는지 안파곤은 학파의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도 않았다.
"......."
"......"
"?"
치유 마법 학생들이 서로 쳐다보며 침묵하자 안파곤은 의아해했다.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인가보군, 알겠다.”
"아, 아니... 음."
“그, 그래요, 비밀입니다.”
***
박상 유물이 있는 자리에 도착하자 코홀티는 갑자기 후회가 됐다.
잠깐 놓았던 정신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후배의 마력을 빌려서 유물을 가동시키는 게 과연 옳은 일일
까??
"선배님, 이겁니까?"
"응? 으응."
"여기에 마력을 주입하면 될까요?”
"그렇긴 한데 잠ㄲ..."
우우우우우웅!
아무리 마력을 때려 박고 각종 물약으로 보조를 해도 꿈쩍 않던 유물이 빛과 소리를 내
기 시작했다.
그걸 본 코홀티의 정신은 다시 살짝 빠져나가고 마법사로서의 본능이 뇌를 차지했다.
"그래! 바로 그렇게!! 잘하고 있어!"
"유물이 특이하게 생겼군요."
"응? 옛날 유물들이 원래 이렇지."
유물은 옷을 넣어놓는 장통을 연상시키는 의장(衣)이었다.
흑마법과 관련된 유물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일상적인 물건이었다.
"일상에 쓰던 물건을 사용해야 절도나 도난의 위험도 적을 뿐더러 무슨 일이 생겨도
문제가 덜하거든,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아."
"과연."
이한은 말하면서 쉬지 않고 마력을 채워 넣었다.
다른 마법들에 비해 유물을 충전시키는 일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쉽고 단순했다.
그냥 마력을 부어넣으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코홀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장이 빛을 내며 들썩거렸다. 금세라도 닫힌 분
이 열릴 것 같았다.
“다 된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벌써... 다 됐잖아?!"
코홀티는 기겁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다 됐을 줄이야!
“정말 고맙다. 후배.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참, 내가 소환하는 거 보고 가!"
코홀티는 주문을 외우며 의장의 덮개를 열었다.
들썩거리던 분이 열리자 빛이 사라지고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름끼치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유령 군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됐다! 됐어!! 보이지?!"
"선배님."
"조종해보고 싶어? 기다려 봐! 명령어를 알려줄 테니까...”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치료하다가 나온 거라서 돌아가야 하는데, 이제 돌아가도 되겠
습니까?"
"...조금만 더 봐주면 안 되냐? 아직 완전히 전개 안 돼서 그렇지 조금 더 전개되면 분
코홀티는 본인이 추하다고 느끼면서도 차마 그냥 보내기 미안해서 질척거렸다.
***
"뭐야? 흑마법 놈들 미쳤나? 저 정도 되는 걸 어떻게 소환한 거지?"
"돈이 썩어나나? 젠장. 저럴 돈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저길 습격하는 거였는데.”
자리에 모여 있던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은 당연히 이변을 알아차렸다.
강렬한 마력 파동과 함께 벌어진 흑마법 유물의 소환.
대체 그 마력을 어디서 조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식하게 마법사의 마력으로 채우진 않았을 거고, 온갖 값비싼 시약을 총동원했을 텐
데...
그걸 어떻게 구한 거지?
수많은 소환수들을 뒤에 둔 채, 코홀티는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학생들
은 전율을 느꼈다.
'흑마법 보고 전율감 느끼기 쉽지 않은데..."
'저 놈들 무리하는 거 아닌가??
'대단하군 인상이 강하게 남겠어.'
이런 축제에서 활약해봤자 남는 건 무의미한 자존심밖에 없지 않냐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일단 무의미한 자존심도 상당히 중요했던 데다가(특히 각 탑 학생들에게는 더더욱)...
여러 학파의 학생들에게는 자기 학파를 홍보하고 다른 학파 학생들에게 자기 학파 마
법의 우월성을 알리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저 유령 군대는 흑마법 학파의 인상을 강하게 남겼을 터,
'뭐, 하지만 강하게 남겼어도 흑마법을 배우진 않겠지.'
'그냥 신기해할 정도겠지.'
학생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흑마법은 활약해도 별로 견제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쿠오오오오오-
"?!"
"뭐야 저거?"
그러나 흑마법이 아닌 다른 학파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부여 마법, 그것도 3학년인 안파곤이 발리스타를 연상시키는 복합 아티팩트를 끌고 나
오자 모두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저런 복합 아티팩트를 완성했지?
"뭐냐? 나 빼고 다들 축제에 자기 마법 보여주려고 준비한 건가? 돌멩이 날릴 시간
"저거 몇 개를 합친 거야? 수십 개는 되는 것 같은데?"
"미리 만들어 놓고 갖고 나온 거 아닙니까?"
"아니. 그건 불가능해. 저 정도면 즉석에서 조립해야 하는데... 대체?”
부여 마법 학파의 결과물에 코홀티도 매우 놀라워했다.
'뭐지? 어떻게 만든 거지?"
자기는 반칙에 가까운 힘을 빌렸다지만 저 상대는 혼자서 만든 것 아닌가,
부여 마법 학파에 코홀티도 몰랐던 천재가 있는 모양이었다.
'...킁, 상관없지, 우리 학파에도 저 녀석 못지않은 천재가 있는데,'
코홀티는 다른 학파를 부러워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물론 그 후배가 모든 학파에 소속되긴 했지만 그 정도야...
***
"이제 시작되나보군.”
돌아온 이한은 치유 마법 학생들과 같이 천박 안에 앉아서 차원 균열을 주시했다.
공기는 심상찮았지만 서로 돌 던지는 게 중지된 덕분에 오히려 할 일은 줄어든 편이었
다.
'흠, 앞으로 이런 일 있을 때마다 뭐라도 소환되면 좋겠군.'
이한은 속으로 매우 끔찍한 생각을 하며 차원 균열을 주시했다.
물론 선배들이야 고생 좀 하겠지만 그건 이한이 알 바 아니었다.
서리거인이 나왔을 때도, 정령 흡수가 터졌을 때도 선배들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던
것처럼.
-전쟁의 열기가 나를 깨운다.
이
이한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치유 마법 선배들은 꿀과 찹쌀을 기름에 튀긴 과자를 베어 먹으며 어느 쪽으로 소환될
지 떠들고 있었다.
'뭐지? 교장 선생님인가?"
-전쟁의 열기가 나를 깨운다!
!!"
이한은 그제야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놀랍게도 목소리는 만마의 팔찌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쟁의 열기가 나를 깨운다!! 내게 무기를 들려다오, 그리하여 적들의 목을 베고 피를
얻을 수 있게 해다오!
이한은 무심코 들을 던지기 위해 모인 선배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이한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서 저 선배들을 베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걸까?
'설마 아니겠지.'
-내게 무기를... 잠깐...
목소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만마의 팔찌는 구울의 왕에게 패배한 악마들이 봉인된 장소,
그런 곳에서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악마들이 자아와 기억에 혼란이 오는 건 당연
했다.
정신을 차린 악마는 이한에게 연신 질문을 던졌다.
여기는 어디고, 마법사 너는 뭐하는 녀석이고, 어떻게 자신을 손에 넣게 됐고, 지금 부
슨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지.
"...전쟁 아니라 축제입니다."
- 전쟁은 축제의 다른 이름이지!
"아니 그냥 축제..."
-선혈과 고통, 비명이 나를 부른다! 나를 두려워하라. 나는 안푸르사스다!
순간 팔찌가 타오르며 이한의 손목에 새로운 분양을 새겼다.
악마, 안푸르사스가 팔찌 안과 밖을 오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는 분양이었다.
뒤늦게 그 분양의 정체를 깨달은 이한은 깜짝 놀라 분양을 닫았다.
이런 분양은 열어놓으면 팔찌 안에서 악마가 허락 없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통로를 빠져나온 안푸르사스가 이한의 몸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버티더니 고래고래 소
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 전투의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안으로 돌아가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