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화
“아니... 잘 생각해봐라.”
제자의 슬픔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우레걸음 교수가 설명에 나섰다.
“지금 내가 정령을 못 오게 하려는 거지, 정령과 원수를 지려는 게 아니다.”
정령을 부릴 줄 아는 마법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정령을 힘으로 위협하고 억압해서 부리는 이들.
이들은 제국에서 주류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이런 방법은 득보다 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흑마법사들이 사나운 언데드들의 환심을 사려고 얼마나 노력하던가.
이계의 존재들과 사이가 나빠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런 악명은 전파성까지 있어서 악명 높은 마법사와 계속 어울리면 그 마법사도 정령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아졌다.
그런 만큼 정령을 힘으로 위협하고 억압해서 부리는 이들은 보통 제국의 음지나 그늘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령과 대화해 친분을 쌓아 계약하는 이들은 달랐다.
제국에서 주류인 이들은 정령의 위협에도 비교적 안전했으며, 한 정령에게 쌓은 좋은 평판이 다른 정령한테까지 전달되는 일도 잦았다.
그런 이들끼리 서로 친밀히 지내면 더더욱 정령들의 호평이 많아지는 만큼 더 강력한 정령과 교섭하기에도 유리해지는...
“교수님. 교수님.”
“왜?”
“그걸 지금 왜 저한테 말해주시는 겁니까?”
이한은 살짝 정색하며 물었다.
“지금 설마 제가 전자에 속한다고...?”
“아니, 아니지!”
우레걸음은 뜨끔했다.
사실 말하면서 은근슬쩍 비유하긴 했던 것이다.
“너는 정령을 위협하거나 억압한 적 없잖느냐?”
“어. 정령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건 괜찮죠? 정당방위에 가까웠습니다만.”
우레걸음 교수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다음 말했다.
“하여간 중요한 건 내가 정령을 못 오게 하려는 거지, 정령과 원수를 지려는 게 아니라는 거다.”
정령과의 친분을 중요시하는 우레걸음 교수 같은 사람은 정령들이 장난을 치거나 피해를 끼치더라도 온건하게 대응하는 편이었다.
냉기 정령들이 나타나서 오두막 안을 어지럽혀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정도?
우레걸음 교수 정도의 실력이라면 마음만 먹을 경우 얼마든지 정령들을 퇴치할 수 있었지만, 괜히 정령들을 토라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이한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까지 들었는데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 그러니까 정령들이 화나지 않게, 온건하게 접근을 막으라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제 계약이 무리인 게 그거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그야 워다나즈 네가 계약하자고 쫓아다니면 위협이나 억압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
이한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우레걸음 교수는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진심으로 상처 받은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해졌다.
“야. 너무 슬퍼하지 마라. 꼭 정령의 사랑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교장 선생님 봐라. 정령들이 그렇게 질색을 하는데도 위대한 대마법사시지 않느냐.”
“전 교장 선생님처럼 강하지 않잖습니까.”
“얼마 안 걸릴 것 같은데...”
“예?”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우레걸음 교수는 진심으로 현명한 사람이었기에, 미래에 강력한 대마법사가 될 수 있는 제자를 원수로 만들지 않는 노련함을 선보였다.
“그래. 너 저번에 정령하고 계약했다면서?”
“예... 대해와 비바람의 호민관 칭호를 갖고 있는 정령의 문양을 사용해서 간신히 계약했습니다.”
“......”
우레걸음 교수는 괜히 말을 꺼냈다고 후회했다.
이 상황에서 정령 군주의 도움이 있어야 간신히 계약할 수 있다는 슬픈 사실을 꺼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지. 분명 정령들도 그럴 거다. 날 믿어라. 워다나즈. 정령계는 무한한 곳이니까.”
“그럼 저 안 피하는 정령 보이면 계약 시도해봐도 됩니까?”
“아니.”
“......”
* * *
우레걸음 교수는 식량 보수를 두 배로 늘림으로서 이한을 달랬지만, 이한은 계속 투덜거렸다.
“스승으로서 제자의 도전을 막다니.”
“......”
“......”
이한을 도와주려고 따라온 시아나 사제와 요네르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정령들하고 계약 못 하게 한 것 같은데...
-어째서요?
-정령들한테 안 좋은 소문 퍼지면 교수님이 부를 때 곤란해지니까.
-정령들한테 왜 안 좋은 소문이 퍼져요?
-그게... 음... 난 잘 모르겠네?
요네르는 말하다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한테 안 좋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글부글-
“이 정도면 될까?”
“훌륭하세요.”
시아나 사제는 존중의 눈빛을 담아 요네르를 쳐다보았다.
플레맹 교단의 사제들은 연금술이 뛰어난 사람들을 존중했지만, 그 중에서도 플레맹 교단에 많은 헌금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더 존중받기 마련이었다.
지금 솥에서 끓고 있는 건 여덟 가지 약초와 응달의 진흙 세 덩이, 마수의 성긴 털 두 움큼.
누군가를 죽이려는 독약을 끓이려는 건 아니었고 정령들이 좋아하는 탕을 끓이고 있었다.
장난을 좋아하고 짓궂은 정령들은 배불리 먹여주면 별다른 심술을 부리지 않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잠깐 정령을 불러와주시겠어요?”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령을 불러왔다. 바람을 날다람쥐 형태로 빚은 것 같은 정령이 나타나더니 솥에 슬며시 접근했다.
“잘 먹는 것 같은데? 이한. 너도 확인해볼래?”
사실 이한의 정령까지 불러올 필요는 없었지만, 요네르는 시무룩해진 이한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꼭 새 정령과 계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 계약한 정령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면 그런 생각은 쉽게 사라질지도 몰랐다.
“잠깐.”
말을 듣자 이한도 지팡이를 꺼내 정령을 불러왔다.
요네르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살짝 얼굴이 밝아진 것 같았다.
화르륵-
사나운 화염으로 만들어진 참새 정령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강렬한 눈빛으로 오두막 안의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순간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와! 굉장해!!”
“정말 귀여운 참새 정령이에요!!”
“그래?”
이한은 살짝 기뻐하며 참새 정령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계약을 했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가 좀 똑똑하긴 하더라. 저번에 불렀을 때 책 사이를 날아달라고 부탁했거든? 조금도 안 태우고 잘 날더라고.”
“정말 대단한데?”
“완전 대단한데요?”
두 친구의 열렬한 호응에 이한은 흐뭇해하며 말했다.
“이거 좀 먹어볼래?”
손가락 끝으로 솥을 가리키자 참새 정령은 알겠다는 듯이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퍼더덕 날아서 솥 밑의 장작을 한 입 베어 물고 화염을 붙였다.
화륵!
참새 정령은 잠시도 쉬지 않고 호다닥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의 명령도 어기지 않겠다는 철벽 같은 완고함이 느껴졌다.
“아니... 이 수프 먹어보라고...”
참새 정령은 깜짝 놀랐다. 마치 자신이 그런 걸 먹어도 되냐는 듯이 날개를 퍼덕였다.
“...그냥 좀 먹어줘라.”
참새 정령은 알겠다는 듯이 날아들었다. 부리를 몇 번 위아래로 부딪친 참새 정령은 욕심을 내지 않고 곧바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한은 요네르의 날다람쥐 정령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뭘 하던 말던 아직도 볼을 부풀리며 먹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참새 정령은 마치 십 년 넘게 전장에서 구른 병사마냥 조금의 방심도 없는 모습이 마치...
“겁먹은 것 같...”
“쉿.”
요네르는 시아나 사제의 옆구리를 급하게 찔렀다. 시아나 사제는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
“......”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우리 그냥 일이나 마저 하자.”
“네!”
“좋은 생각이야!”
* * *
우레걸음 교수의 작업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든 지혜는 비범했다.
오두막과 텃밭 주변에 간단한 마법진을 그리고, 그 마법진을 따라 정령들이 들어올 만한 길에는 정령들이 싫어하는 탕약을, 정령들이 나갈 만한 길에는 정령들이 좋아하는 탕약을 배치하는 것이다.
말은 쉬워보여도 정령들의 움직임을 유도할 수 있는 마법진, 정령들이 싫어하는 탕약, 정령들이 좋아하는 탕약 모두를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솔직하게 감탄하며 메모했다.
“대단하네요. 정령들은 그저 쫓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저도요. 이런 식으로 물약을 쓸 줄 몰랐습니다.”
우레걸음 교수는 연금술에 재능 있는 제자들이 보여주는 열정적인 태도가 흐뭇했는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사실 연금술사는 강의 때만 배우는 게 아니라 강의 밖에서도 배우는 법이지. 제작법은 다 기록했느냐?”
“네.”
드워프 교수는 솜씨 좋게 탕약을 그릇에 담았다.
정령들이 싫어하는 탕약은 뼈 그릇에, 정령들이 좋아하는 탕약은 나무 그릇에.
“으음. 양이 좀 부족하겠군.”
우레걸음 교수는 정령들이 싫어하는 탕약의 양이 살짝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 꺼내오겠습니다.”
“아니다. 오두막 안에 있는 타라스크의 비늘은 이미 다 썼거든. 뛰어난 연금술사라면 이럴 때 대체할 줄 알아야 하지.”
우레걸음 교수의 말에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진을 완벽하게 죽죽 그리고 완성된 탕약을 배치했다.
“자. 다들 말해봐라.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까?”
타라스크의 비늘은 정령들이 두려워하고 꺼림칙하게 여기는 존재의 요소였다.
이런 위압감을 줄 시약이 없다면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까?
“불꽃나무 정향(丁香)을 써보고 싶습니다. 냉기 정령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두 가지 실수가 있구나. 하나는 냉기 정령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지. 냉기 정령들이 늘어나면 다른 정령들도 놀러올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여기 들어가 있는 유수석이 그 효과를 상쇄시킨다는 거지.”
“아!”
“이런...!”
두 재능 있는 연금술사는 아쉬움의 탄성을 내뱉었다.
시아나 사제가 골똘히 고민하더니 말했다.
“아칼나무 잎을 사용해보면 어떨까요? 혼동 효과를 주니 정령들이...”
“저런. 급할 때는 쓸 수 있는 방법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안 된다. 취한 정령들이 화가 날 수 있으니까.”
우레걸음 교수는 껄껄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연금술사의 번뜩이는 영감이지. 워다나즈. 잠깐 이리 와봐라.”
“?”
그 사이 마법진을 전부 끝낸 이한이 의아해하며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머리카락 한 올 빌려주겠느냐?”
이한은 의아해하면서도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우레걸음 교수한테 건넸다.
우레걸음 교수는 솥 안에 머리카락을 던져 넣었다. 탕약의 색이 변하더니 그대로 완성되었다.
“자. 타라스크의 비늘보다야 효과는 확실히 약하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거다. 다들 알겠느냐? 주변에서 필요한 걸 재치 있게 찾는 방법을?”
“......”
이한은 빤히 교수를 쳐다보았다.
껄껄 웃다가 뒤늦게 깨달은 우레걸음 교수는 헛기침을 했다.
“교육이잖느냐. 네 친구들을 위한 일인데 설마 토라진 건 아니지?”
“......”
“알겠다. 알겠어. 지하실에 들여놓은 절임통도 갖고 가라! 그거 귀한 거다!”
* * *
배치를 끝내고 텃밭에서 정령들이 오나 기다리는 동안, 이한은 친구들에게 설득에 나섰다.
“딱히 화나거나 하진 않았어. 다들 알지? 내가 이런 걸로 화낼 리 없잖나.”
“으, 으응.”
“물론이죠.”
“배워야 할 마법이 몇 개인데 하나 막혔다고 화를 낼 리가 없잖아.”
멀리서 얼음으로 된 다람쥐가 나타났다. 느껴지는 정령의 기운을 봤을 때 냉기 정령이었다.
다람쥐 형태의 정령은 마법진의 길을 따라 돌고 돌더니 퇴치 탕약의 냄새를 맡고 후다닥 물러났다.
“잘 먹히는군.”
“잘 먹히네. 둘 덕분이야.”
요네르는 이한과 시아나 사제를 칭찬했다.
그 말을 듣자 시아나 사제는 자신도 둘을 칭찬해줘야겠다는 압박감을 받았다.
“사실 두 분 덕분이죠. 특히 워다나즈 님의 머리카락... 앗. 아앗.”
“......”
“......”
분명히 벽난로의 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추운 기분이었다.
쿵-
“?”
생강차를 홀짝이던 요네르는 멀리서 부글거리는 형체 하나가 사납게 달려오는 걸 목격했다.
설치해놓은 마법진을 무시하고 달려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막아야 하나?! 잠깐, 정령을 공격하면 안 된다고 하셨...’
“번쩍여라!”
이한의 지팡이 끝에서 번개가 사납게 튀었다.
번개를 맞은 적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제야 모습을 확인한 시아나 사제가 외쳤다.
“언데드에요!”
“뭐? 언데드였나?”
“이한?”
“잘못 말했군. 언데드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