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요네르는 친구를 살짝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오래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숲 속에서 다른 언데드들이 슬며시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령 오염체? ...암흑 계열인가?”
이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제국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 오면 냉기 계열 정령들이 활발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반만 맞는 사실이었다.
겨울은 생각보다 다양한 존재들을 깨우는 계절인 것이다.
당장 칼바람이 부는 지역에서는 바람 계열 정령들이 더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광산 지역에서는 암석이나 금속 원소 정령들이 기세등등하게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귀찮은 경우가 바로 언데드였다.
겨울을 상징하는 건 추위나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죽음도 있었다.
일어난 언데드들이 겨울의 긴 밤 속에 몸을 숨기고 돌아다니는 것만큼 제국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일도 드문 것이다.
우레걸음 교수는 당연히 인근 숲에 언데드들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예방을 해놨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지금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정령 오염체가 그런 존재였다.
지역의 강한 마력 흐름 때문에 폭주하거나 난폭해진 정령이 다른 존재와 엉겨 붙은 부정형(不定形)의 괴물.
정령이 섞인 만큼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라서 평범한 예방법은 잘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눈앞의 오염체는 암흑 계열 정령과 언데드가 엉겨 붙은 놈이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정령들은 언데드를 싫어해서 폭주하더라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암흑 계열 정령이라고요?!”
시아나 사제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번개 계열 정령도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데, 암흑 원소라면 더더욱 드문 존재였다.
“신기한 건 알겠는데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거 같아!”
요네르가 다급히 안에 있는 물약을 꺼내오며 외쳤다.
시커멓게 일렁거리는 정령 오염체들이 숲 속에서 점점 기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
■■■■...
정령 오염체들 중에 몇몇은 오두막에 관심을 가졌지만 몇몇은 서로 치고 받고 싸웠다.
다 자란 돼지만한 덩치를 가진, 딱정벌레 형태의 정령 오염체가 옆의 오염체를 공격하자 그 오염체도 맞서서 뒷발을 휘둘렀다.
“여기, 발화(發火) 물약!”
“감사합니다! 메이킨 님!”
요네르는 평소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는 발화 물약을 시아나 사제에게 건넸다.
플라스크가 깨지고 공기와 접촉하면 맹렬하게 타오르는 이 물약은 에인로가드의 어딜 다니더라도 쓰기 좋은 물약이었다.
특히 암흑 정령 오염체라면 불과 빛 같은 원소에 약할 터.
“어 요네르? 나는?”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두 친구에게 강화 주문을 걸어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네르가 자연스럽게 이한은 안 주고 넘어간 것이다.
“응? ...아! 여기!”
요네르는 뒤늦게 이한도 발화 물약을 쓸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워낙 알아서도 잘 싸우는 친구라 순간 물약이 필요하단 생각 자체가 안 떠올랐다.
“......”
“주... 주려고 했어... 진짜.”
“그래. 고마워.”
이한은 오두막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각각 다른 생김새를 가진 오염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오염체 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연하게 발생할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선배 중에 암흑 원소 연구하다가 대충 숲에 갖다 버린 사람 있는 거 아닌가?’
만약 그럴 경우 이한은 선배고 뭐고 후배들의 분노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민폐란 말인가.
그리고 이런 소란이 벌어지면 제일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일학년이었다.
에인로가드의 고학년 학생들은 기숙사나 본관 안뜰에 온갖 흉폭한 몬스터들이 지나다녀도 자기 몸 하나 정도는 가볍게 뺄 능력이 있었으니까.
“교수님이 올 때까지 안에서 버티자.”
“교수님이 오실까?”
“안 오시면 자기 오두막 부서지는 건데 오시겠지.”
“......”
“......”
둘은 ‘혹시 워다나즈, 교수님하고 싸웠어?’라고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이한의 말과 별개로 지금 안에서 버티는 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밖에 지성 없는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우르르 돌아다니는데 얼굴을 내미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몬스터 무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 다음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정석이었다.
■■■■■...!
“!”
아까 오두막에 장난을 치려고 찾아왔다가 퇴치 탕약 때문에 물러났던 다람쥐 형태의 정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람쥐 정령은 오염체들이 주변을 돌아다니자 겁을 먹었는지 사방에 눈꽃을 피워내며 견제하려고 들었다.
“안 돼!”
“그러면...!”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
아무리 겁을 먹어도 그렇지 오염체들 앞에서 저런 식으로 주의를 끌다니.
멍청한 짓이었다.
실제로 제각각 행동하던 암흑 정령 오염체들은 순식간에 다람쥐 정령을 인식하고 쫓기 시작했으니까.
“도와줘야겠어.”
요네르는 조심스럽게 오두막 문을 살짝 열더니 나갈 준비를 했다.
이 주변에 깔린 마법진을 살짝 건드리면 다람쥐 정령을 안으로 들여보내줄 수 있었다.
“맞아요. 정령은 은혜를 잊지 않으니까요. 구해주면 분명 보답할 거예요.”
이한은 친구들의 뒤를 따라 텃밭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시아나 사제는 ‘과연 정령을 믿을 수 있을까? 이 배은망덕한 놈들을?’같은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못 들은 척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한. 내가 할게.”
요네르는 이한이 정령에게 쌓인 게 많다는 걸 느끼고 뒤로 보내려고 했다.
만약 기껏 구해준 다람쥐 정령이 이한의 손이라도 문다면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미래에 <정령토벌자>나 <정령혐오자>같은 칭호를 가진 대마법사가 탄생할지도...
“아냐. 설치를 내가 해서 내가 돕는 게 빨라. 잠깐 흐름 멈출 건데 엄호 좀 해줄래?”
“이한. 지금 저 정령이 들어와서 난폭한 행동을 보여줘도 그건 지금 상황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한은 어이없어하며 요네르를 쳐다보았다.
집중해서 마법진을 잠깐 멈추고 정령을 안으로 들여보내야 할 상황에 요네르가 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준비됐어!”
우우우웅-
지팡이와 발화 물약을 들고 이한을 엄호하던 요네르는 마법진의 변화에 감탄했다.
이 주변을 전부 덮을 만큼 범위가 크고 복잡한 마법진을 이렇게 쉽게 멈추다니.
마법진의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기본이고, 자신의 마력을 끼워 넣어서 흐름을 자유자재로 건드릴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정령들 때문에 투덜거리던 친구가 새삼스럽게 제국에서 손꼽힐 만큼 마법의 천재라는 게 느껴졌다.
시아나 사제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감탄의 시선으로 마법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들어와!”
이한은 마법진을 힘으로 억제하며 다람쥐 정령에게 외쳤다.
연신 쫓기던 다람쥐 정령은 이한의 소리를 뒤늦게 듣고 오두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도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다람쥐 정령이 후다닥 달리기 시작하자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한은 중얼거렸다.
“자기 목숨이 위험한데도 내가 오라고 하니까 무시하다니.”
“...아, 아니. 우연의 일치였겠지.”
“그런데 워다나즈 님이 부를 때 안 오긴 했어요...”
“시아나 사제...!”
요네르는 갑자기 일을 방해하는 시아나 사제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아나 사제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근데 이게 억지로 편들어주면 오히려 안 좋은 거 같아서요. 솔직히 좀 배은망덕하긴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애들아. 나 진짜 괜찮거든.”
이한은 한숨을 쉬며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물론 정령들이 이한이 보여주는 성의에 비해 너무 매몰차긴 했지만, 이한이 그것 때문에 계속 마음 쓸 정도로 유약하진 않았다.
정령이 이한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뭐 어쩌겠는가.
이한은 이한의 길을 가야 하는 법이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자꾸 저렇게 신경을 써주는 게 더 괴로웠다.
“정령이 날 좀 꺼려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써주지 마.”
“미안해. 이한.”
요네르가 사과의 뜻을 담아 이한을 쳐다보았다.
괜히 친구를 신경써주려다가 더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아냐. 사과할 것도 없어.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응. 그럴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아나 사제가 요네르에게 살짝 물었다.
“그래서 아까 부를 때 안 온 거 맞죠?”
“응.”
못을 박는 요네르의 말에 이한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탁-
그 사이 다람쥐 정령이 마법진을 통과했다. 이한은 재빨리 마법진을 다시 작동시켰다.
오염체들은 다람쥐 정령을 쫓다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꺼림칙한 기운에 괴성을 내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겁내지 마. 우린 네 적이 아니니까.”
“맞아요. 보세요.”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는 겁먹은 다람쥐 정령을 달래듯이 양손을 펼쳤다.
겁먹은 정령은 오히려 더 위험할 때가 많았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폭주해서 난동을 피우는 것이다.
-......
다람쥐 정령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더니 이한의 발목을 타고 올라오더니 손목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듯이 머리를 비볐다.
“...????”
“이... 이한!”
“이건 기적이에요!”
“시아나 사제...”
“기, 기적은 아니고 반쯤 기적...?”
이한의 귓가에는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비벼오는 다람쥐 정령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한... 우는 거 아니지?”
“...아니.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
소매 안에 있던 바실리스크가 쉿쉿 소리를 냈다.
이한이 배은망덕한 정령들을 예뻐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람쥐 정령은 이한에게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워다나즈 님. 안에 들어가야 할 거 같아요. 저기...”
시아나 사제가 이한을 부르며 손가락을 앞으로 뻗었다.
숲의 깊숙한 곳에 있던 오염체들이 다른 정령들을 쫓고 있었는지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지금이야 오염체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지만 더 모여들어서 숫자가 늘어난다면 아까처럼 무식하게 돌파하는 놈이 나올지도 몰랐다.
“다른 쫓기는 정령인가?”
“글쎄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도와주자.”
“...어? 네?”
시아나 사제는 당황했다.
아까와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던 것이다.
아까는 근처 오염체들이 셋에게 별 관심이 없던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마법진을 열어준 거였고, 지금은 오염체들이 괴성을 지르며 오두막 쪽을 노려보고 있는 상황 아닌가.
아까보다 너무 위험해진 상황이었다.
“이 정도는 막을 수 있어. 날 믿어. 시아나 사제.”
“그야 믿긴 하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 충분해. 그리고 죄 없는 정령들이 오염체들한테 역소환 당하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순 없지.”
다람쥐 정령이 감동해서 이한에게 달라붙었다.
“......”
“...네... 준비할게요.”
* * *
우레걸음 교수는 갑자기 나타난 오염체들을 보고 짜증 섞인 호통을 쳤다.
“꺼-져-라!”
마법 나팔을 불자 오염체들이 진액을 토해내며 쪼그라들었다.
“환장할 선조의 수염에 맹세코, 학생 놈들이 소환시킨 거면 반드시 갚게 하겠다!”
드워프 교수는 불러낸 정령 사슴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다.
학교 부지 내에 지어 놓은 오두막들이 많은 만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능선을 타고 달리며 세 숲의 오두막을 확인한 우레걸음 교수는 뒤늦게 1학년 제자들이 생각이 났다.
‘아차!’
반대쪽에 위치해 있는 제자들의 오두막도 숲에 가까워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가장 먼저 휩쓸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다. 마법진이 있고 워다나즈 녀석이 있으니까.’
워다나즈를 떠올리자 한결 마음이 든든해졌다. 우레걸음 교수는 정령 사슴의 방향을 돌리고 서둘러서 날듯이 달려갔다.
‘역시...’
저 멀리서 오두막의 모습이 들어왔다. 멀쩡한 걸 보니 역시 괜찮은 게 분명...
콰지지지직...
“...전, 전쟁 났냐?!”
오두막 앞쪽 공터가 무슨 습격이라도 받은 것마냥 처참한 폐허 웅덩이가 되어 있자 우레걸음 교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이렇게 격렬하게 싸울 일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