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화
같은 수인족이라 하더라도 유난히 그 외모가 동물에 가까운 핏줄들이 있었다.
이런 이들은 보통 ‘피가 짙다’는 말로 표현됐다.
그리고 그 동물이 일반적으로 호감을 사는 귀여운 동물일 경우, 제국의 일반적인 미남미녀를 능가하는 인기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버두스 교수처럼 말이지.
확실히 버두스 교수는 비버 수인 중에서도 눈에 띌 만큼 비버에 가까운 귀여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버두스 교수가 그 성격에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마법 실력도 실력이지만 외모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의심될 정도로.
“그럼 교수님을 데려가면 되잖습니까?”
-너 정신나갔냐???
“아. 죄송합니다.”
이한은 곧바로 사과했다. 해골 교장도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버두스 교수와 비교하면 펭에린은 사교장의 빛나는 별이지.”
“저는 사교장 가기 싫습니다만...”
알시클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뛰어난 마법의 재능을 갖고 태어난 만큼 알시클은 자신이 마법에 헌신할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운명을 가진 마법사라면 사교장에 가서 쓸데없는 사교활동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마법에 전념해야 했다.
“저런. 나도 마법학교 교장하기 싫다. 펭에린. 삶이란 게 그런 거지. 침입하다가 붙잡히면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는 거고. 자. 출발하자.”
해골 교장은 둘을 끌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문득 다른 침입자가 기억 난 이한은 물었다.
“그 조각상으로 변해 있던 침입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 첩자 놈. 공작이 보냈더군.”
“어느 공작이요?”
“이칼도렌 공작.”
“!”
이한은 깜짝 놀랐다.
제국의 대귀족 중 몇 번 만난 적 있는 공작이었던 것이다.
“그 변덕스럽고 괴팍하고 구두쇠인 공작 말입니까? 이런 짓을 할 줄이야!”
“...?”
해골 교장은 이한의 말에 의아해했다. 알시클도 이한의 말에 의아해했다.
‘구두쇠는 아닌데?’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성격 아닌가?’
“이칼도렌 공작이 구두쇠는 아니지 않나? 금화를 아끼는 놈은 아닌데.”
“맞습니다. 이칼도렌 공작이 후원하는 마탑을 몇 군데 아는데, 까다로운 후원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성격도 좀 의아한 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차가운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둘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나?
“소문이 과장된 거 아닙니까? 좀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이칼도렌 공작이 들었다면 ‘네놈 때문에 당황해서 그런 거다!’하며 분노했겠지만 불행히도 이 자리에는 공작이 없었다.
이한의 의견에 해골 교장과 알시클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사람의 성격은 변할 수 있지.”
“하긴 그것도 맞는 말씀이십니다.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스러워져서 첩자를 보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지에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구두쇠가 된 이칼도렌 공작이었다.
“제국에 믿을 사람이 드물군요. 그래도 나름 공작이란 사람이 이런 짓을 하다니.”
“깨달음을 얻었구나. 이 제국을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 나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
“...아, 예.”
알시클과 이한의 대답이 좀 늦어졌지만 해골 교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 가는 길에 공작부터 만나실 겁니까?”
“아니. 그런 피라미 때문에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다.”
해골 교장은 이칼도렌 공작의 일은 아주 사소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명성 높은 제국의 대귀족이라 할지라도 해골 교장이 보기에는 그저 운 좋게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난 애송이일 뿐이었다.
제국 정계에서 이름을 날린다거나 사교계에서 명성을 드높이거나 하는 일들은 그저 가소로울 뿐.
그런 놈들 때문에 일정을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디저트를 생각나면 먹듯, 공작의 일 또한 그런 부류에 속했다.
“나중에 생각나면 처리해야겠지.”
“어, 침입자 때문에 분노하신 줄 알았습니다.”
“못 잡았을 때야 분노했지. 무능함에 말이다.”
앞에서 마차를 몰던 데스 나이트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잡은 이상 분노할 이유도 없다.”
해골 교장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침입했다는 사실보다 못 잡았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는 게 진심으로 들릴 정도로.
“애송이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저런 놈은 에인로가드에 매년 하나씩 나온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에인로가드에서 무언가 가져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놈들.”
말을 한 해골 교장은 알시클을 쳐다보았다.
알시클은 양심에 찔려서 급히 변명했다.
“저는 뭘 가져가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 마법을 가르쳐주려고...”
“시끄럽다. 도둑질이 같은 도둑질이지.”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한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공작이 뭘 가져가려고 했던 걸까요?”
“보나마나 하찮은 것들이겠지. 영생이나 불멸에 관한 보물들 말이다.”
‘하찮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꺼냈다가는 해골 교장이 경멸의 시선을 던질 것 같아서 참았다.
침묵.
대화가 끝난 마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밖에서 데스 나이트들이 마차를 몰고 날아가는 소리만 아득히 들릴 뿐이었다.
심심했는지, 혹은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알시클이 입을 열었다.
“냉기 마법은 많이 익혔고?”
“아. 하급 냉기 정령하고 계약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미리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고 있던 이한은 알시클의 질문에 뿌듯하게 대답했다.
“?”
“?”
물론 알시클이나 해골 교장은 이한의 대답에 ‘이 자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하는 눈빛을 보냈다.
자랑할 게 없어서 저런 자랑을?
“그, 대, 대단한데? 냉기 정령하고 계약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
알시클은 부리를 흔들며 어떻게든 동의해주려고 애썼다.
해골 교장은 더 어이가 없었다.
“징벌방에서 정신이 나갔나, 펭에린?”
“정령 계약도 나름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오냐오냐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다른 건 없고?”
알시클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이야기를 돌렸다.
“워낙 바빴어서 많이 익히지 못했습니다만... 참. 냉기 원소 분신을 하나 만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컥.”
무자비한 천재의 말에 알시클은 할 말을 잃고 비틀거렸다.
* * *
제국의 수도는 도시가 가진 원래 이름보다 수도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진 곳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제국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드넓은 제국 땅에서 자신의 출신 지역에 자부심 많은 제국 사람들도 이름이 나오면 인상을 찡그리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곳.
그것이 제국의 수도였다.
수십 개가 넘는 도시 성문에는 벌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방문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인로가드의 방벽에 버금가는 역사를 가진 성벽들이 그런 방문객들을 굽어보았다.
성벽에 걸린 수많은 마법들은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아예 성벽 자체를 구경하기 위해 올라온 마법사들이 있을 정도로.
“저게 그 아니타의 호수인가? 축복을 내려준다는?”
“벌써 사람들이 몰려 있군.”
“성벽 위를 보게! 환상 마법사들이 새로운 마법을 보여주고 있네!”
“황제 폐하의 은덕에 맹세코 정말로 아름답구나!”
다른 도시나 성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이 나왔을 테지만, 수도에서는 그런 이들을 찾기 힘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이 쉬지 못할 만큼 화려한 볼거리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실 사소한 소란이라도 벌였다가는 곧바로 황제 폐하의 근위 기사단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무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국의 수도에서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뿌우우우우우-
요란한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음의 음산함을 두른 마차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마법사나 전사는 마차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에 전율했다.
뿌우우우우우-
-물러나시오. 물러나시오! 황제 폐하의 마령관이자 제국 마도방벽의 수호자, 고나달테스 각하시오!
데스 나이트들은 뿔나팔을 불며 성문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신호했다.
고나달테스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기겁해서 길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이봐, 비켜! 고나달테스 님이라잖아! 그 대마법사 님!”
“수염에 맹세코 제국의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마차에 시선을 두지 마! 두꺼비가 되고 싶냐!”
대마법사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과 오해로 사람들은 허둥댔다.
두려움, 존경, 호기심...
다양한 감정이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일렁거렸다.
그 모습을 안에서 보고 있던 이한은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다.
밖에서 마차 안이 보이진 않겠지만,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게 됐다.
“꼭 이렇게 요란하게 들어가야 합니까?”
“그럼 마차로 성벽 위를 날아서 들어갈까?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다.”
해골 교장은 마차 밖으로 나가 손을 흔들어줬다.
그러자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마법사 님 만세!”
“제 자식 놈이 대마법사 님처럼 뛰어난 영웅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런.’
이한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아무리 그래도 해골 교장을 본받게 하다니!
진실이 숨겨진 탓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고나달테스 각하. 감사드립니다.”
성문 구역을 관장하는 기사단장이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다.
일반적인 손님과 달리 고나달테스의 방문은 수도의 기사들을 모두 긴장시키는 대사건이었다.
“이번에는 성벽 위를 날아서 들어오지 않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안에 있던 이한과 알시클은 어이가 없었다.
제국 수도 성벽 위를 날아서 들어갔다고??
해골 교장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난 수백 년 넘게 이 도시 위를 날아서 들어왔다. 네놈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말이야.”
“제가 내린 명령이 아니란 거 잘 아시잖습니까.”
기사단장은 ‘제발 사고치지 말아주십시오’의 눈빛으로 애절하게 고나달테스를 쳐다보았다.
해골 교장이 날아서 들어오는 걸 막은 사람들은 기사들이 아니라 제국의 관료들이었다.
피땀을 흘려 제국의 법도와 규칙을 만들어놨더니 웬 고대의 대마법사가 비웃으면서 들어오는데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해골 교장이 한 번 날아서 들어오는 순간 관료들은 황제한테 쪼르르 달려가 징징대기 시작했다.
“안다. 알아. 그 놈들이 귀찮게 구니까 그렇겠지. 들어가도 되나?”
“예. 들어오십시오.”
기사들은 길을 열었다.
성문을 통과한 뒤 해골 교장의 마차가 들어선 대로(大路)를 본 이한은 깜짝 놀랐다.
제국의 수도는 그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길들이 핏줄처럼 깔려 있었고, 그 중에서는 특정 부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길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해골 교장의 마차가 들어선 길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어로(御路)였다. 주변이 인파로 혼잡한 와중에도 길 위에는 개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길 이용해도 되는 겁니까?”
“에이. 고나달테스 님이 쌓은 공로가 몇 개인데 이 정도는 이용할 수 있겠지. ...아마.”
알시클은 이한 앞에서 귀족답게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부리 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기사단이 달려오진 않았다. 정말로 허가를 받은 모양이었다.
“펭에린. 난 워다나즈를 데리고 폐하를 독대하고 오겠다. 넌...”
“근처에 친척이 있으니 거기에 머무르면 됩니다.”
“아니. 관료들 만나서 에인로가드 칭찬 좀 하고 있어라.”
“...예...”
알시클은 매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몸에서 징벌방 효과가 빠지지 않은 탓에 거절하는 게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