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뭐가 신기해서 그리 두리번거리는 거냐?”
앞장서서 걸어가던 해골 교장은 이한을 보며 물었다.
물론 수도는 제국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었고, 그 심장에 위치한 황제의 궁전은 위엄의 정수(精髓)였다.
평범한 제국 사람이라면 수도로 들어와 황제의 궁전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의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그런 호화로움에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차라리 ‘저기 장식을 녹이면 금화가 몇 개나 나올까요?’라고 물을지언정...
“아. 황제 폐하의 궁전인데 제국의 관료 분들이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금 둘은 수도의 성문을 통과한 뒤 어로를 사용한 최단거리로 수도 중앙 황궁에 도착한 상태였다.
같이 정문을 통과한 알시클은 제국 재무관들이 머무르는 관청을 향해 먼저 가버렸는데, 이 또한 궁전 안에 위치했다.
처음에는 궁전 안의 별관을 관료들이 쓰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해골 교장을 따라서 궁전의 복도를 걷는데, 나오는 방마다 제국 관료들이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궁전에는 황족들이 지내는 게 아니었나?
“그걸 신기해하고 있었던 거였군. 하긴 그럴 만하다.”
해골 교장은 이한의 호기심을 이해했다.
영리한 만큼 이질감을 더 빨리 잡아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작은 도시만한 넓이의 이 궁전에 왜 황족들은 없고 관료들만 돌아다니는가?
옛 삼왕국 시절이었다면 궁전은 오로지 황족들만을 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궁전 밖을 근위기사단이 철통 같이 지키고, 안에는 황제의 친족과 심부름하는 내관들만이 살았으리라.
그리고 설령 칠왕국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관료들이 서류더미를 바닥에 퍼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때였다면 아마 궁전은 왕을 접견하고 싶은 왕국 전역의 귀족들이 방문하고 무도회나 연회가 연일 열리는 살롱 같은 곳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제국의 궁전은 해골 교장이 봐온 역사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형태였다.
황제가 사용하는 장소는 극히 일부였고 나머지는 전부 다 제국의 관료들이 관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익숙해진 수도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해도, 워다나즈처럼 지금 당장 제국 역사 시험을 봐도 만점 받을 박식한 놈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가 황제 폐하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나?”
“어... 없었습니다.”
이한은 기억을 더듬고 대답했다.
사실 가주, 그러니까 이한의 아버지는 본인도 대귀족이면서 제국의 정치나 시사(時事)에 대해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보통 마법이나 마법이나 마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혹은 신성 마법을 욕하거나...
“그럴 것 같았다. 비열한 놈. 어린놈의 새끼가 지 혼자 마법에 전념하고 귀찮은 일은 나한테 시키지.”
“......”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하마.”
해골 교장은 품위 있는 제국 귀족으로서 사과했다.
아무리 평소에 분노가 쌓여있어도 그렇지 그 가문의 아들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물론 제국 마도방벽의 관리를 혼자 맡아서 할 때마다 워다나즈 가문으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긴 했지만 그래도...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그보다 황제 폐하에 대해서는 왜 여쭤보신 겁니까?”
“네가 그냥 폐하를 만나면 놀랄 것 같아서.”
해골 교장은 놀랍게도 살짝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만나기 전에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제가 에인로가드에서 일년을 보냈는데 만나는 것만으로 놀랄 수가 있습니까?”
“...사과했잖냐. 꼭 그렇게 빈정대야 행복하겠느냐?”
“빈정댄 게 아닙니다만...”
진짜로 이한이 진심이었다는 걸 깨달은 해골 교장은 더 얄미웠다.
“관료들 중에서도 폐하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극소수다.”
“그렇게 영광인 자리를 제가 독차지해도 되는 겁니까?”
이한은 기쁘기보다는 걱정이 됐다.
하늘같은 선배 관료들이 이한을 싸가지 없는 후배라고 생각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영광인 자리는 아니고 그냥 폐하께서 게으르셔서 그런 거지.”
“...?”
“하여간 그만큼 관료들 중에서도 폐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넌 폐하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지?”
“오래 군림하신 분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황제는 정말로 오래 살았다.
정확히 언제 즉위했는지 모를 정도로.
제국의 신문이나 여러 서책들은 황제의 언급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다른 역사와 달리 황족이 아닌 외부인은 체계적인 계산이나 셈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황제가 일이백년은 옥좌에서 군림했다는 건 추측 가능했다. 도중에 황제가 바뀌었다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간접적인 언급이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뛰어난 마법사이실 것 같다?”
“그건 왜지?”
“오래 사셨으니까요?”
일반인들도 각종 물약과 아티팩트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지만 결국 한계가 있고 연장할수록 불안정해졌다.
어떨 때는 수명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해골 교장이 투덜거리면서도 황제의 말에 따르는 거 보면 그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겠는가.
“재밌군. 둘 다 맞다. 이런 식으로 추측할 줄은 몰랐는데.”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악마 대공 정도 되나?
하지만 악마 대공이라면 이한이 놀랄 것 같지 않았다.
이한은 대체 황제의 정체가 뭐길래 해골 교장이 저러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혹시... 교장 선생님께서 만든 키메라 같은?”
“...넌 워다나즈 가주보다 더 미친놈이다...!”
아무도 안 듣는다지만 황궁 복도에서 ‘황제 키메라설’을 제안하는 담력에 해골 교장은 경악했다.
이한은 시무룩해졌다.
“놀랄 것 같다고 하셔서 추측한 겁니다.”
“그, 그래. 놀랍긴 하군. 내가 놀랍지만...”
이한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어느 순간 주변이 매우 조용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궁전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수많은 명화와 조각상. 금과 은으로 장식된 천장과 벽.
창문을 대신하는 자수정, 공작석, 녹주석 등으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
평범하게 생각하면 깊숙이 들어와서 사람의 인기척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됐겠지만 이한의 예민한 본능은 다른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설마 여기, 마법으로 숨겨진 장소입니까?”
“!”
해골 교장은 떠들다가 깜짝 놀랐다.
이 애송이가 눈치 챌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맞다. 대단하구나!”
“하하. 제가 에인로가드 징벌방에서 얼마나 헤맸는데요.”
“...그거하고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어이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이 궁전 속의 궁전, 황제의 심궁(深宮)을 지키는 외부 미로는 제국의 가장 뛰어난 마법사들이 달라붙어서 만든 걸작이었다.
비싼 궁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황제는 관료들을 여기서 일하게 했지만, 동시에 길을 잃고 자신의 거처에 들어오지는 못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난폭하고 강압적인 수단을 쓰면 훨씬 편했겠지만 황제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다치게 만들고 싶지 않아했고...
마법사들만 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도 덕분에 이 외부 미로는 과거의 대마법사들이 보면 황홀경을 느낄 만큼 아름다운 마법의 걸작으로 완성되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반응해, 황제가 만날 의사가 있는 사람만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위화감이나 당황스러움도 없었다. 둘이 같이 복도를 걸어도 정신을 차려보면 한 사람은 심궁에 도착해있고 다른 사람은 여전히 궁전의 복도를 돌고 있었다.
“무언가 마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녀석...”
해골 교장은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원래 제자가 스승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보답은 스승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학년 전원 외출 같은 것도 예상을 뛰어넘긴 했지만 그런 건 해당 안 됐고...
지금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보여준 모습 같은 게 바로 해골 교장을 기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 개같은 에인로가드를 운영하는 보람을 아주 조금 만드는 일!
“다 도착했다. 황제 폐하는 네가 직접 뵙고 판단하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만 당부하겠다. 원래 황제 폐하를 뵙는 사람은 금제가 걸린다. 밖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에인로가드처럼 말입니까?”
해골 교장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이한의 머리를 한 대 때렸다.
“그래. 됐냐?”
“예...”
“그런데 너는 금제를 못 걸 거다. 에인로가드에서도 그랬지만 너한테 금제 하나 걸자고 제국의 반 년 치 예산을 소모할 수는 없을 테니까.”
“과장이 너무 심하십니다.”
“과장 아닌데?”
“......”
“하여간 입조심하란 소리다. 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를 밖에서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한은 살짝 긴장했다.
황제 모독죄 같은 걸로 제국법에 따라 처벌받나?
“황제 폐하께서 토라지실 거다.”
“어, 농담하시는 겁니까?”
“농담 아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토라지시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찮을 거라는 걸 명심해둬라. 자. 준비는 됐나?”
“...예!”
이한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상대가 해골 교장이 만든 키메라라 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황제 폐하! 당신의 미천한 종이 여기 도착했습니다!’하고 발등에 입을 맞출 준비가.
“그래. 들어가자.”
해골 교장은 문을 열었다.
* * *
황제의 거처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도, 조각도, 장식도, 보석도.
안은 궁전보다는 거대한 동굴처럼 보였다. 만약 이한에게 이곳과 에인로가드의 거인 동굴을 던져놓고 차이점을 찾으라고 하면 바로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한은 이런 살풍경한 거처의 모습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거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황제의 놀라운 위용 때문이었다.
드넓은 거처를 꽉 채운 듯한 거대한 육신.
그 어떤 황금보다도 감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위엄 있는 날개.
천천히 끔뻑이면서 이한과 해골 교장을 바라보고 있는 현명하고 자애로운 눈빛까지.
황제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
이한은 너무 놀라서 말도 잇지 못했다.
해골 교장은 이해한다는 듯이 가볍게 이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대신 인사했다.
“폐하. 명을 받고 이렇게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을 데리고 왔나이다.”
오수...
황제는 해골 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래곤과 반년 전에 나눴던 이야기들은 자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이한은 해골 교장이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오해가 있습니다. 폐하.”
자네 이름이 오수인가, 오해인가?
“하하! 폐하의 유머 감각은 저처럼 오래 산 마법사도 웃게 만드는군요.”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오래 산 마법사는 무슨... 자넨 아직 젊네. 새파랗게 젊지. 그에 비해 드래곤을 보게. 산맥과 강물보다 더 오래 살았어. 다른 드래곤들이 승천했는데도 떠나질 못하고 있네. 비열한 맹세 때문에.
“또 그러시는군요. 폐하. 폐하께서 직접 하신 맹세잖습니까.”
드래곤은 선의로 맹세했네. 사람들을 믿었지... 그런데 사람들은 드래곤을 속여서 이용해먹고 있네. 이렇게 비열한 사람들은 산맥과 강물이 태어난 뒤로 처음일 거야.
해골 교장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한은 그 표정에서 익숙한 감정이 느껴졌다.
마치 교수가 술 먹고 취해서 자신의 힘든 인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자들이 짓는 표정과 가까웠다.
좀 속되게 표현하자면 ‘또 지랄이시군’의 표정이었다.
“폐하. 정말 새파랗게 어린 마법사가 듣고 있습니다.”
아... 그래. 미안하네. 정말 어린 마법사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지. 에인로가드 생활은 즐겁니?
“예.”
거짓말하지 말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