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이한은 해골 교장과 살짝 시선을 교환했다.
해골 교장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마라.’
‘알겠습니다.’
아무리 황제 앞이라 하더라도 이한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리 해골 교장과 입을 맞춘 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말 즐겁습니다.”
에인로가드는 즐거운 곳이 아니라 종족들에게 고통을 줘서 마법을 각성시키는 곳일 텐데...
‘아니. 괜히 드래곤이 아니군!’
이한은 지혜로운 황제의 모습에 감탄했다.
황궁 구석에 계시면서도 에인로가드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에인로가드는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입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수와 오기 전에 준비했나보구나.
“......”
“......”
두 사제(師弟)는 속으로 뜨끔했다.
어떻게 알았지?
황제는 둘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걱정되어서 물어본 거란다. 오수의 제자들은 언제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지. 대륙을 불태우려고 하거나, 자신을 불태우려고 하거나, 혹은 오수를 불태우려고 하거나 했으니...
“그게 언제 때 일인...”
해골 교장은 투덜거렸다.
옛날에 좀 마법 교육이 거칠었을 때 참을성 없는 제자들이 사고 친 것 가지고 너무 언급이 많았다.
드래곤이 보기에 네 재능은 오수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단다. 그래서 대륙을 불태우거나 자신을 불태우지 않았으면 하는 거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대륙의 종족들에게 얼마나 슬픈 일이겠니.
‘해골 교장을 빼먹으신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워다나즈는 다른 제자들과 다르니 말입니다.”
그래서 구울의 왕을 상대하게 했나?
황제는 아가리를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동시에 심드렁한 눈빛으로 해골 교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제가 의도한 게 아니라...”
그렇겠지. 오수. 우연히... 이상하게 자네 주변에는 우연이 많고...
“......”
해골 교장은 더럽게 억울했지만 참았다.
실제로 우연을 가장해서 의도한 전적들이 많았기 때문에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황제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씨 서펜트도 우연히 상대했고...
“진심으로 우연입니다.”
그래. 알겠네.
황제는 더 이상 듣기 싫었는지 콧김을 내뿜었다. 해골 교장의 긴 머리카락이 치렁대며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갔다.
다행히 제자의 눈빛에서 증오나 대륙의 파멸이 느껴지진 않는군.
황제가 이한을 부른 건 직접 대면하고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인데다가 오수의 제자가 훗날 폭주라도 한다면 제국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1학년 동안 험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딱히 눈빛에는 증오나 대륙의 파멸이 엿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오수와 사전에 준비까지 해온 걸 보면 꽤 친해보였다.
아직 어렸지만 그릇이 크고 단단한 마법사가 분명했다.
자네가 드래곤한테 완전히 거짓말한 건 아니어서 기쁘군.
“저는 폐하 앞에서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황제는 해골 교장을 무시하고 다시 이한에게 말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구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단다. 네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더 이상 귀찮게 하진 않으마. 얼마든지 위험에 뛰어들도록 해라.
“감사합... 그런데 제가 위험에 뛰어드는 걸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그냥 넘어가려던 이한은 순간적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황제 앞이라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건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겸손하구나.
“워다나즈 녀석의 단점이 바로 겸손함입니다.”
자네도 그 단점을 가지지 그러나.
“하하, 농담도 참!”
하하. 농담이 아닐세.
황제와 해골 교장이 서로 웃었다. 이한은 하나도 안 웃겼다.
‘매우 억울하군.’
순간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넓은 동굴 같은 황제의 거처에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해골 교장은 의아해했다.
새로운 방문객을 알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오늘 다른 손님이 있었습니까?”
글쎄... 아아. 드래곤의 정신을 좀 보게나. 이걸 잊고 있었군. 제국의 후계자를 추가로 만드는 날이었네.
“저런. 고생이 많으십니다.”
“...?”
이한은 둘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제국의 후계자를 추가로 만든다는 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참. 네 녀석도 보는 게 좋겠구나.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게 대체 무슨 미친 소리십니까?”
이한은 황제한테 들리지 않게 경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체 뭐에 도움이 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무시하고 황제한테 부탁했다.
“폐하. 워다나즈가 견학을 해도 되겠습니까?”
상관없네만 놀라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 아닙니까. 설명을 들으면 이해할 겁니다.”
하긴 자네 제자인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것도 많이 봤겠지...
“아닙니다. 왜 그런 음해를 하십니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문이 열리고 일련의 무리가 들어왔다. 총 11명이었다.
검술 길드 출신의 오크 여성,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의 인어 여성, 레인저 길드 출신의 라미아 혼혈 여성, 세 개의 상단을 이끄는 대상인 인간 여성, 남부의 마탑을 운영하는 락샤샤 남성, 동부 자경단의 우두머리인 켄타우로스 여성, 신전 출신의 천사 혼혈 여성, 전장에서 명성 높은 용병단장인 늑대 수인 여성, 제국 서부 제빵 길드의 최고 장인인 도마뱀 수인 남성, 청동 드워프 은행 소속의 드워프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우거 혼혈 여성까지.
‘오우거 혼혈...?!’
이한은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제국 희귀 종족들이 있긴 했지만 오우거 혼혈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희귀 종족이었다.
하지만 이한의 놀라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다들 들어왔나?
들어온 사람들은 최대한 격식을 갖춰서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잉태하라!”
‘언령!’
이한은 지금 황제가 보여준 게 어떤 경지인지 깨달았다.
선언만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강력한 고등 마법!
단순히 바람을 불러오고 물을 솟구치게 하는 것도 까마득한 난이도가 필요할 텐데, 다른 사람을 임신까지 시키다니.
너무나도 충격적인 마법의 경지에 순간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놀라워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한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서 황제가 마법으로 제국의 황족들을 만들고 있었다!
끝났네. 돌아가게.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들어왔던 사람들은 극진한 태도로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섰다.
드래곤은 한층 지친 눈빛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이번에는 제발 좀 괜찮은 후계자가 나왔으면 좋겠군. 오수.
“꼭 그럴 겁니다. 폐하.”
전혀 기대도 안 하면서 드래곤을 놀리지 말게. 그보다 자네 제자한테 빨리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해골 교장은 이한의 경악한 눈빛을 뒤늦게 깨달았다.
평소에 하늘이 무너지고 거인들이 쳐들어와도 담담하던 놈이라 이렇게 놀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음. 설명을 먼저 해줄 거 그랬나?”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제발 설명을 먼저 해주십시오.”
* * *
수많은 왕국과 제국들이 탄생했다가 스러져 간 대륙에서, 현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영혼에 드래곤의 피가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주장으로만 끝났다면 그 진위가 의심받을 수도 있었지만 황제에게는 그걸 증명할 약속의 신물이 있었다.
이 신물은 황제의 선조가 드래곤과 계약한 걸 증명하는 신물이자, 언젠가 선조의 후손들이 부탁한다면 이 신물과 교환해 도와주겠다는 맹약의 신물이었다.
다행히 초대 황제는 이 신물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제국을 건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번성했던 제국도 시간이 흐르면 쇠락하는 법.
역병, 반란, 내전, 습격...
제국의 운명이 기울자 치열한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진행되었다.
제국의 황족이란 황족들은 모두 다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고 칭제하며 일군을 이끌었다.
배신, 암살, 매수, 기습...
내전이 끝날 때쯤에는 제국의 황족들은 모조리 전멸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몇몇 야심찬 대귀족들이 황위를 이어보겠다고 칭제하고 나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몇몇 뜻깊고 충성스러운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태 해결에 골몰했다.
대체 이 혼란스러운 난세를 어떻게 끝낼 수 있단 말인가?
천만다행으로 제국에는 아직 행운이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대마법사였다.
“......”
이한은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지만 해골 교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혜롭고 현명한 대마법사는 가주들과 함께 마지막 황족이 남긴 유언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남긴 신물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둘을 조합해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냈다.
-위대하신 드래곤이시여. 당신의 후손이 남긴 마지막 유언에 따라, 이 신물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황위의 마땅한 후계자가 생기기까지, 당신께서 제국을 통치해주소서!
물론 드래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왕국을 다스리는 걸 좋아하는 드래곤은 아무도 없었다. 드래곤이 좋아하는 건 명상과 칩거지 군림과 통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맹세는 신성한 법.
결국 드래곤은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받아들였다.
그 때는 제국의 혼란이 끝나고 후계자가 생기면 황제 노릇을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륙의 종족들은 대부분 권력욕이 강했으니...
지금이야 혼란스러워서 부탁한다지만 곧 다시 찾아가리라!
“...여기까지가 대충 제국의 숨겨진 역사지.”
해골 교장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뒤에서 황제가 해골 교장을 노려보았다.
“정...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 감동스럽겠지.”
‘감동했다고 하진 않았는데.’
“아. 그 혼란을 멈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헌신했던가!”
“그런데 교장 선생님. 후계자가 아직까지 안 나왔잖습니까?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다. 자격이 안 되니까 후계자가 안 나오는 거겠지.”
대륙의 종족들이 권력욕이 많으니 곧 제국을 찾아갈 거라는 판단은 드래곤의 오판이었다.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은 지금의 황제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황제가 바뀜으로서 새로운 혼란이 일어나는 걸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완벽한 황제가 있는데 왜 불확실한 후계자를 들여야 한단 말인가?
벌레 같은 놈들. 굴종당하는 걸 좋아하는 쓰레기 같은 놈들. 노예로 태어난 놈들 같으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해골 교장은 일장연설을 진행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다. 저 후계자를 판단하는 이들은 어떤 사리사욕 없이 냉정하게 판단을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오수... 드래곤이 인정하네. 물론 드래곤의 아홉 자식들은 다 황제로는 낙제감이야. 하지만 그 뒤는 제법 괜찮지 않나...
“그딴 놈들이 어떻게 제국을 다스리겠습니까.”
해골 교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아팠지만(사실 아프진 않았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매우 뛰어난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서 황제는 처음 아홉 자식들은 스스로 잉태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아홉 자식들은 드래곤의 성질을 지나치게 짙게 이어받아 황제로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심심하면 명상하고 칩거하는 이들이 어떻게 제국을 다스리겠는가.
실패 원인을 깨달은 황제는 그 다음부터는 상대를 구하고 드래곤의 피는 최대한 옅게 희석했다.
먼 선조가 드래곤과 인연이 있는 수준으로 옅게.
어차피 제국의 귀족들이 원하는 건 초대 황제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이니, 드래곤의 피는 짙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이야기였던 것이다.
“뭘 어떻게 됐겠느냐. 쓸만했으면 벌써 이어받았겠지.”
해골 교장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드래곤의 피가 짙어지면 그 능력도 탁월해졌지만 성격이 게을러졌다.
반대로 드래곤의 피가 옅어지면 능력적으로는 혜택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실상 안락한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놈들인데 이런 놈들이 어떻게 드래곤보다 더 뛰어난 황제가 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야심만 많은 얼간이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친구들 중에서도 황족이 있지 않니? 어떻더냐?
황제는 이한을 보며 물었다.
그 눈빛에는 기대감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 음. 그게 말입니다.”
해골 교장은 안쓰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