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화
‘좋은 생각인가?’
이한은 기사들 말에 멈칫했다.
물론 이한이 모라디와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원래 우정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었다.
그 중에는 남의 저택에 찾아가서 ‘야 놀러왔어!’하면 상대가 짜증내는 우정도 있었다.
이한 생각에 모라디는 쪼잔하고 인색한 면이 있어서 친구가 찾아오면 냉대할 가능성이 높...
“엇. 모라디 님 오셨습니까!”
“!”
갑자기 나타난 모라디 가문의 혈통에 이한은 깜짝 놀랐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모라디도...
“모라디 가문의 발파탄입니다. 반갑습니다.”
‘아. 아니었군.’
안에 들어온 건 모라디 가문의 다른 핏줄이었다.
발파탄 모라디.
모라디 가문에 소속된 에인로가드의 3학년 학생으로서, 이번에 펭에린 가문의 마법사와 에인로가드의 후배가 가문에 방문했단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서 찾아온 거였다.
사실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은 이미 유명한 만큼 어떤 사람인지 꽤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배는 달랐다.
들어보니 그 워다나즈 가문 소속이지 않던가!
-잉칸 님. 정말 워다나즈 가문입니까?
-예. 정말입니다.
-정말 잘 됐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단순히 워다나즈 가문이라서가 아니었다.
이미 에인로가드의 몇몇 선배들 사이에서는 워다나즈 가문의 1학년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부여 마법 학파라던데.
-미친 해골 새끼 수제자라는 말이 있던데 위험한 놈 아니야?
-일렌딜하고 친하다던데...
-그럼 위험한 놈 맞잖아?
-아냐. 흑마법 학파하고 친하댔어.
-그럼 진짜 위험한 놈 맞는데?
그 외에도 구울의 왕과 싸웠다느니 서리거인의 왕과 싸웠다느니 밖에 나가서 마법범죄자나 반마법주의자들을 토벌했다느니 이런 뜬소문들까지 돌곤 했으니 호기심이 안 생기려고 해도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발파탄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한 가지 궁금한 게 더 있었다.
“펭에린 님. 반갑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마친 발파탄은 이한을 보며 물었다.
“...그, 가이난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한은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 * *
이한에게는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얼굴 표정을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밀고 나가는 재주였다.
여기에 당한 사람들은 ‘어라? 그런가?’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발파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 그런가? 그 때 정신없어서 잘못 들었던 건가?”
“예. 가이난도는 제 친구 이름입니다. 아마 친구가 같이 있어서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야. 이거 좀 민망한데. 선배가 되어가지고.”
발파탄은 머쓱해했다.
선배가 되어가지고 이름도 잘못 듣다니.
그 실수로 뒤에 했던 오해들을 생각하니 더 민망하게 느껴졌다.
“하여간 반갑다, 워다나즈!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이번에는 이한도 놀라지 않았다.
침착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기사단 기사들한테 들으셨겠군요?”
“다른 에인로가드 학생들한테 들었는데?”
“...?!”
예상 밖의 대답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흑마법 학파 선배들한테서요?”
“아니. 난 흑마법 놈들하고는 별로 안 친해. 그냥 탑 친구들 몇 명이 말하던데. 차원 균열 때 후배 하나가 여러 학파 뛰면서 일했다고. 참! 그 때 다른 차원의 펭귄 검객들 썰어버렸었지!? 그건 대체 어떻게 한 거냐?”
발파탄의 말에 느슨하게 앉아 있던 기사들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 갖췄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게 사실 제가 한 게 아니라 다른 소환체의 힘을 빌린 건데...”
“맞아! 검술 강의에서 수석이라면서? 여러분들. 제가 들었는데, 워다나즈는 검술 강의에서 수석입니다! 다른 기사 가문 출신들을 제치고 말입니다!”
‘이 사람 내 말을 안 듣나?’
대답하기도 전에 새 화제를 꺼내는 발파탄의 모습에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
“수석...”
기사들은 눈빛을 빛내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건 딱히 왜곡된 것도 없었기에 이한도 할 말이 없었다.
“검술을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좀 들어보도록 하자고.”
발파탄은 의자를 끌어오더니 이한 앞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에인로가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젠장. 선배만 아니었어도 무시하는 건데.’
기사들 앞에서 부풀려진 자신에 대한 소문을(몇 개는 안 부풀려졌지만)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하다니.
선배만 아니었어도 대충 끊었을 텐데!
* * *
“...그렇게 반마법주의자들을 처리한 겁니다.”
“아. 잠깐. 눈물이 좀.”
발파탄은 감동해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다른 기사들도 약간 울컥한 표정이었다.
“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
“무슨 소리냐? 얼마나 감동적인데. 이야. 진짜 좋은 이야기다. 나중에 내 친구들한테도 말해줘야겠군.”
기사들의 감수성은 이한과 많이 달랐다. 발파탄과 기사들은 어린 마법사들이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운 전투에 매우 감명 받은 기색이었다.
“맞다. 지젤하고 친하냐? 같이 싸운 거 보니까 친한 거 같은데 정말이야?”
발파탄의 질문에 다른 기사가 대답했다.
“예. 아주 친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주’라고는 말 안 했...”
“신기한데.”
발파탄은 신기해했다.
지젤과 친척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지젤은 친해지기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모라디 가문의 직계인 만큼 냉혹하고 칼날 같은 성격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던 것이다.
발파탄이야 방계기도 하고 다른 기사 가문을 돌며 수련을 한 탓에 성격이 좀 털털해진 편이었지만, 지젤 같은 경우는 가문 내에서 직계로 가르침을 받은 만큼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했다.
“그러니까 모라디가 좀 무례하고 사회성이 부족하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말한 건 아닌데?”
발파탄은 이한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냥 좀 냉정하고 엄하단 거지. 아무나 쉽게 우정을 쌓을 사람이 아닌데.”
옆에서 듣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워다나즈 가문이라면 우정을 쌓을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럴지도.”
발파탄은 제법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제국의 여러 대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워다나즈 가문의 명성은 특출난 편이었다.
정계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도 않고 사교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는데 그 명성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부터가 가문의 힘을 증명했다.
가장 순수한 마법의 혈통.
그 잠재력을 생각해보면 지젤이 그걸 염두에 두고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서로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품위 넘치는 우정이었다.
“역시 지젤이야. 아주 똑똑해.”
“감탄했습니다. 친구를 사귈 때도 평범하게 사귀지 않으시는군요.”
“...?”
옆에서 듣던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라디가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친분을 쌓았다고 하기에는 좀 너무...
‘재수 없었던 것 같은데.’
푸른 용의 탑 학생이 강의 듣는다고 시비 걸지 않았나?
그래도 모라디의 가문인 만큼 이한은 친구 칭찬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과연! 어쩐지 제 핏줄을 존중해주던데...”
“역시 그랬군. 이야. 대단하네. 나중에 친구들한테 자랑해야겠다.”
발파탄은 개학하고 나면 모라디 가문의 핏줄이 이렇게 인맥이 넓다고 자랑할 생각에 뿌듯해했다.
가문의 다른 형제자매가 세운 업적은 곧 자기 자신의 자랑이기도 했던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알시클은 신기해하며 물었다.
“내가 잘 모르지만, 그 친구는 기사 가문 출신인데도 되게 품위 있는 귀족 같다?”
“어, 음. 뭐...”
지젤 이야기를 끝낸 발파탄은 목을 축이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이한은 그 모습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런데 구울의 왕은...”
‘신종 고문인가?’
했던 이야기를 하고 하고 또 하는데도 그걸 즐겁게 듣는 기사들의 모습에 이한은 전율했다.
얼마나 수다를 좋아하길래 이런단 말인가?
벌컥!
“모라디 님 오십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기사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
“모라디 님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나도 모라디인데.”
다급하게 외친 기사가 헉헉 숨을 고르더니 다시 외쳤다.
“모라디 가문의 지클린 님!!”
“!!!!”
기사들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파탄도 기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키시오!”
“이거 놓지 못해? 네놈은 선배도 없느냐?”
“저는 오늘 들키면 큰일납니다!”
기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둘러서 빠져나갔다.
발파탄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기사들이 입구에서 낀 탓에 한 박자 움직임이 늦었다.
그 사이 도착한 하인이 말했다.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님.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맞습니까? 앗. 발파탄 님도 계셨군요.”
“...나, 나는 가보려고 했는데...”
“그러면 지클린 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아니다! 남아있겠다. 생각해보니 별 일이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여하튼 두 분. 지클린 님께서 곧 선물을 들고 방문하려고 하십니다. 괜찮으십니까?”
알시클과 이한은 서로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방문하면 되는데, 저런 식으로 의사를 묻고 방문하는 건 귀족 가문에서도 꽤나 예법을 중요시하는 이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괜찮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하인이 나가자 발파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클린 님이 누구시길래?”
“어, 지젤한테 들은 적 없냐? 지젤의 언니인데.”
“과연. ...누나 아닙니까?”
“뭔 소리야?”
발파탄은 이한을 뭔 소리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한도 발파탄을 뭔 소리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펭에린 님. 제가 뭐 실례되는 행동을 저지른 것이나, 다른 기사들이 실례되는 행동을 저지른 게 있다면 지금 말해주십시오. 무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시클은 옆의 정어리 담긴 접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딱히 없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워다나즈. 내가 실례되는 행동을...”
“하하. 선배님.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지젤의 언니라고...”
“휴... 그래. 다행이다.”
발파탄은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알시클이 더 의아해질 정도였다.
“모라디 가문의 지클린 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아. 두 분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관이 있지요. 규칙과 법도에 엄격하신 분이셔서...”
발파탄도 모라디 가문의 가풍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지클린도 만만치 않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지클린은 직계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충성, 절의, 명예, 기사도...
요즘 기사들 중에서 이런 미덕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이들은 드물었다. 제국 기사들도 어느 정도 세속화된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클린은 이런 미덕들의 총체였다. 제국 북부의 기사라기보다는 옛 왕국 시절의 기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아직도 있군요!”
알시클은 감탄했다.
모라디 가문의 직계인데도 아직도 저런 옛 기사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실로 감탄스럽고 존경스러웠다.
“저희는 힘듭니다.”
발파탄은 투덜거렸다.
기사들이라고 매일 검을 휘두르고 수련할 수는 없었다.
가끔은 사교 활동도 하고 영웅담도 듣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 기사분들은 왜 나가신 겁니까?”
“훈련 안 하고 손님 만나서 떠들던 걸 들키면 혼나니까 그렇지. 난 그래도 오늘치 훈련은 했으니 괜찮을 거다. 아마.”
“......”
이한은 순간 가이난도를 보는 표정으로 발파탄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