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다행히 발파탄은 그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엄격하시다니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선배라고 이한은 좋게 말해줬다.
“그래도 정해진 훈련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기사도 사람인데 어떻게 훈련만 하고 살아?”
“?”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장 마법사 가문인 이한도 알라르롱 밑에서 훈련만 하고 살았는데, 기사 가문인 발파탄이라면 더 혹독하게 해야 하지 않나?
“기사는 원래 훈련에 몰두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알시클도 그렇게 말했다. 발파탄은 손을 내저었다.
“그건 다 옛날이야기나 동화가 왜곡해서 그렇습니다. 요즘 기사들은 훈련도 훈련이지만 사교 활동이나 다른 친구들과의 우정을...”
“뭐라고 했습니까, 발파탄?”
뒤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발파탄은 기겁해서 넘어질 뻔했다.
“...중요시하려는 놈들이 있는데, 그건 자기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도 모르는 놈들이지! 워다나즈. 기사는 피와 땀과 철로 먹고 사는 거다. 알겠나!”
“아, 예.”
이한과 알시클은 자세가 무너져서 엉거주춤하게 쓰러진 발파탄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뒤의 문으로 들어온 건 이한과 맞먹을 정도로 키가 크고 늘씬한 엘프 기사였다.
엘프 기사는 긴 금색의 머리칼은 하나로 질끈 묶어서 뒤로 넘기고, 마법처리가 된 두꺼운 중갑을 편한 옷을 입은 것마냥 자연스럽게 걸치고 있었다.
아무리 각종 마법을 걸었다 하더라도 기사가 전투 시 입는 중갑은 그 무게와 불편함 때문에 평소에 잘 입지 않았다.
그런 중갑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입고 돌아다니는 것에서 상대가 기사로서 얼마나 강한지 느껴졌다.
‘저 사람이 모라디의 누... 아니, 언니신가.’
“안녕하십니까. 혹시 모라디 가문의 지클린 님이 맞으십니까?”
이한의 질문에 엘프는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디 가문에 방문한 걸 환영합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 님. 우호의 뜻으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엇.”
이한도 알시클도 놀랐다.
공식 방문도 아닌 해골 교장을 따라 적당히 놀러 온 비공식 방문에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접대를 해주다니.
이러면 오히려 받는 사람이 좀 더 민망했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이런 걸 받을 자격이...”
그러나 지클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제국의 마도를 지탱하는 가문이잖습니까.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펭에린 가문은 비버 수인들의 반란을 막은 가문. 평소 존경해왔습니다.”
‘워다나즈 가문하고 같이 붙여놓으니까 이상하게 들리는데.’
알시클은 속으로 떨떠름했다.
물론 어느 가문이든 워다나즈 가문하고 같이 붙여놓으면 제국 공헌도에서 밀리긴 했지만, 면전에서 이렇게 들으니 좀 많이 민망했다.
차라리 그냥 넘어가지!
“감, 감사합니다. 나중에 워다나즈 가문에 방문하시게 된다면 저도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이한은 지클린이 내준 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질 좋은 강철을 깔끔하게 제련해서 만든 검이었다. 균형이 탄탄하고 장식품으로서의 가치도 있을 만큼 겉모습도 괜찮았다.
‘이거 나중에 팔 수 있나?’
“초대한 겁니까?”
지클린은 표정 변화 없이 되물었다.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예?”
“초대한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렇죠?”
당연히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상대가 저렇게 말하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한이 그렇게 말하자 지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음에 시간을 같이 정하도록 합시다.”
“......”
알시클은 ‘언제 한 번 방문하시죠’라고 인사차 말하려다가 이한이 당한 걸 보고 꾹 삼켰다.
지클린은 진지하게 둘을 응시했다.
“오늘 방문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발파탄. 왜 여기 있습니까? 오늘 훈련은?”
“다, 다 했습니다.”
“어제 훈련량이 부족했을 텐데, 왜 벌충을 하지 않는 겁니까?”
발파탄의 눈동자가 상하좌우로 흔들렸다.
위기를 느낀 발파탄은 후배를 팔아먹었다.
“참! 여기 워다나즈가 너도밤나무 기사단을 이끌고 반마법주의자 놈들과 이겼답니다!”
“...!”
이한은 경악했다.
‘역시 기사 놈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구나!’
누가 흰 호랑이 탑 학생 아니랄까봐 이렇게 배신하다니!
발파탄은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후배가 올해 세운 업적들은 기사들에게는 흥미로운 정도의 이야기였지만, 지클린처럼 충성과 명예와 기사도로 뭉친 사람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구울의 왕이... 반마법주의자... 서리거인의 왕이... 검술도 잘 하는...”
“잠깐.”
지클린이 손을 뻗고 발파탄의 말을 막자, 발파탄은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서 움찔했다.
너무 속이 보였나?
“직접 듣겠습니다. 발파탄. 어제 부족한 훈련량을 벌충하러 가십시오.”
“...알겠습니다.”
발파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빛을 보내며 걸어 나갔다.
지클린은 표정 변화 없이 착석했다. 이한과 알시클은 괜히 숨이 막히는 기분에 서로 쳐다보았다.
‘이거, 그냥 연회 전에 가볍게 인사하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지는 거 아니냐?’
알시클은 눈빛으로 말했다.
다른 기사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들 때가 차라리 나았지, 이 지클린이란 기사는 너무 진지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리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타고난 귀족 가문 출신인 알시클에게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게 뭐죠?’
“모라디 가문의 지클린 님. 제가 숙소에 놓고 온 특별한 정어리가 있는데, 그걸 좀 갖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알시클은 고개를 꾸벅이더니 재빨리 빠져나갔다.
그걸 본 이한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역시 마법사 놈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구나!’
자기 혼자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다니.
이한은 저 발상을 먼저 떠올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
후배는 주먹을 불끈 쥔 이한을 보고 의아해했다.
왜 저러시는 거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아. 편하게 불러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워다나즈.”
‘너무 편하지 않나?’
이한은 이 사람 앞에서는 농담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가문에 방문해서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기사들이 너무 귀찮... 아니, 없습니다.”
기사들이 귀찮다고 말했다가는 전부 다 불려 나와서 체벌이라도 받을 것 같아서 이한은 말을 돌렸다.
지클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가문에 방문해서 궁금한 점은 없습니까?”
옆에 있던 에안두르데가 자신도 모르게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언제나 투기장에서 전투만 겪어왔던 에안두르데에게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숨막히는 대화였던 것이다.
이상하게 숨이 막힌다!
“없습...”
“그러면 가문에 방문해서 서운했던 점은 없습니까?”
‘큰일났다. 뭐라도 생각해내야 한다.’
이한은 후배가 괴로워하는 걸 보며 집중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이 서투른 기사는 몇 개의 정해진 화제를 계속 반복해서 돌릴 것이다.
후배도 먼저 화제를 꺼낼 사람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이한밖에 없었다.
“아.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 갑옷은 어느 장인께서 만드신 겁니까?”
“갑옷에 관심이 있습니까?”
“예? 예.”
“음.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끼던 갑옷이지만,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께서 관심이 있다면 존경의 뜻으로 선물을...”
“정말로괜찮습니다!”
이한은 다급하게 지클린을 말렸다.
이 엘프 기사는 막강한 적이었다.
어떤 화제를 꺼내도 마치 모래지옥마냥 흡수해버렸다.
이 사람과 맞서려면 대체 어떤 화제를 꺼내야 한단 말인가?
* * *
밖으로 빠져나온 발파탄은 후배를 잊어버리고 훈련에 몰두하는 대신 열심히 지젤을 찾아다녔다.
발파탄에게도 양심이 있었던 것이다.
“지젤, 지젤!”
“?”
평복으로 갈아입은 채 마도서를 읽고 있던 지젤은 허겁지겁 달려오는 친척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이다. 지클린 님께서 네 친한 친구를 기절시키려고 하고 있어! 마법사 친구 말이다!”
“...?”
지젤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썹을 위로 휘게 만들었다.
언니인 지클린이 사람을 기절시킨다는 것에 놀란 건 아니었다. 그건 이미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었다.
화술에 재주가 없고 매사에 과묵하고 진지한 지클린은 어느 자리에 가든 듣는 사람을 질식시키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새로 방문한 기사들이 뛰어난 기사인 지클린을 존경하는 마음에 찾아갔다가 숨 막혀서 쓰러지는 일들은 성채에서 매 해마다 일어나는 연례행사 같은 거였다.
지젤이 놀란 건 친한 친구 이야기였다.
지금 성채에 온 외부 손님 중 마법사는 해골 교장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해골 교장하고 친한 친구라는 건 좀...
“제가 교장 선생님하고 친한 친구 같지는 않습니다?”
“뭔 소리 하는 거냐? 워다나즈! 워다나즈 말하는 거잖아!”
지젤은 마시고 있던 차를 친척의 얼굴에 내뿜었다. 발파탄은 기사의 기술을 사용해 몸을 꺾어 피했다.
“뭐하는 거야?!”
“그... 대체... 무슨... 아니. 아니...”
사레가 들려서 괴로워하던 지젤은 마도서를 내려놓고 침착을 되찾았다.
“하나씩 확인하겠습니다. 워다나즈라는 게 혹시 이한 말하는 겁니까?”
“그렇지. 친하잖아.”
“...언제 어떻게 왜 방문한 거죠?”
“교장 선생님하고 같이 왔다는데?”
“...!”
지젤은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1학년 때부터 교장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사악한 마법을 이어받을 수제자였다.
당연히 해골 교장이 성채를 방문하면서 같이 올 수도 있었다.
‘이걸 놓치다니.’
지젤은 스스로의 판단력을 탓했다. 당연히 같이 온 사람을 확인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친하다는 겁니까?”
“어, 안 친하냐?”
“......”
지젤은 고민했다.
여기서 안 친하다고 말해도 되나?
‘가문 내는 물론이고 성채의 다른 기사들이 들을 때 워다나즈 가문과 굳이 안 친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사이가 안 좋거나 원한이 있다고 오해를 받을지도.’
“...합니다.”
“어?”
“친합니다. 친하다고요.”
“왜,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건데? 내가 뭐 잘못했어?”
발파탄은 지젤이 죽일 듯 노려보며 대답하자 당황했다.
딱히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니가 왜 워다나즈를?”
“손님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셔서 찾아오신 거지.”
“잠깐. 제가 못 들은 걸 보면 공식 방문이 아니었을 텐데 언니는 어떻게 들은 거죠?”
“...기사들이 훈련 빼먹고 찾아가서 떠들다가 들켜서...?”
“......”
지젤은 충격과 경악의 시선으로 발파탄을 쳐다보았다.
자기보다 어린 친척한테 저런 시선을 받자 천하의 발파탄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 나는 훈련 다 하고 갔어.”
“......”
“지,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야. 내가 빠져나오기 전에 봤는데 숨이 막혔다고. 네가 가서 지클린 님 좀 말려줘. 네 말은 들으시잖아.”
‘진짜 죽여 버릴까.’
지젤은 반드시 이 친척의 겨울방학을 지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하며 일어났다.
비공식 방문으로 왔으면 그냥 조용히 대접해주다 가면 됐지 뭔 가문의 기사들부터 시작해서 북부의 다른 기사들까지 찾아와서 떠들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시전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바로 그렇습니다. 역시 모라디 님. 훌륭하십니다. 전투 마법사들 중 미친... 아니, 뛰어난 사람들은 이런 기술에 능합니다.”
“놀랐습니다. 전투 마법사들은 늘 이런 식으로 수련하는 겁니까. 하지만 이렇게 시전 속도에 집중하면 파괴력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잘 맞추셨습니다. 역시 모라디 님. 훌륭하십니다.”
“과찬입니다.”
방 안에서 들리는 대화에 발파탄과 지젤은 놀라서 서로 쳐다보았다.
“아니, 안 쓰러졌잖아??”
“언니가 저렇게 수다스러운 건 처음 보는데...”
‘저게 수다스러운 거라고?’
발파탄은 지젤의 말에 질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