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에인로가드 학생만 아니었다면 부관으로 앉혔을 겁니다.”
“그래. 그래. 나도 드래곤을 탈것으로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드래곤이 싫다더군.”
해골 교장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워다나즈를 모라디 가문 부관에 앉혀놓으면 바로 황제한테 연락이 올 게 분명했다.
지금 자신한테 반항하는 거냐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좋겠군.”
“?”
가주는 해골 교장의 말에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해골 교장은 이한과 지젤을 가리키며 말했다.
“둘이 친하게 지내잖나? 탑 다른 놈들끼리 밖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건 보기 드문 일인데.”
효율주의자인 가주 입장에서 자식들이 워다나즈와 친분을 유지하는 건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워다나즈 가문과 교류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저리 자식들끼리 친분을 유지하다니.
지금쯤 가주는 신나서 ‘워다나즈 가문과 함께하는 북부 패권 획득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좋지 않습니다.”
“??”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가주는 차갑게 부정했던 것이다.
해골 교장은 의아해했다.
“왜 안 좋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검술 대련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다니. 마땅히 영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했는데...”
“......”
해골 교장은 경악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자식이 친구랑 노는데 그걸 아까워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 저런 미친 놈이.’
“농담이지?”
“아닙니다만? 친분은 에인로가드 가서 쌓아도 되잖습니까.”
“......”
물론 가주 입장에서는 모처럼 찾아낸 인재와 영지의 앞일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보통 자식이 친구랑 놀고 있으면 ‘허허 그래 영지는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니 친구와 친분을 쌓도록 해라’라고 하지 않나?
거기다가 ‘내 일이 먼저니까 너는 에인로가드 가서 놀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건 보통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음에 방문하면 자네 일정을 먼저 다 잡아버리던가.”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가주는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이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다음 방문 때는 지클린이나 지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먼저 일정을 다 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 굳건한 모습에 해골 교장은 존재하지 않는 골치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야. 술 갖고 와라.”
“각하께서 술도 드십니까?”
“왜, 언데드한테 주는 술은 아깝나?”
“아닙니다.”
시종이 기겁해서 술을 갖고 왔다. 해골 교장은 진절머리를 내며 투명한 액체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가주님.”
지젤이 잠깐 쉬는 사이 이한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해골 교장을 보며 물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술도 드십... 아니, 왜 이러십니까!”
“왜, 언데드가 술 마시면 안 되나?”
해골 교장은 잔에 든 술을 이한에게 뿌렸다. 이한은 좌우로 움직여가며 술을 피했다. 지클린한테 한 번 당한 덕분에 반응이 빨랐다.
“무슨 일로 왔나, 워다나즈 군?”
“이번 방문을 기념할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이한은 주섬주섬 선물을 꺼냈다.
저번 너도밤나무 기사단에게 받은 술, 40년산 <기사의 환희>였다.
마음 같아서는 팔고 싶지만 역시 이런 선물은 팔기 조금 그랬다. 제국 시장을 돌다가 기사단이 보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큰 그림을 보고 뇌물, 아니 선물로 사용하는 게 좋았다.
“북부의 방패를 이끄는 가주님께 이 선물을 바칩니다.”
“...고맙군.”
가주는 별 반응 없이 받았지만, 해골 교장은 가주가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자기 무덤을 깊숙이 파는구나.’
해골 교장은 혀를 차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아마 다음에 여길 방문하게 되면 차라리 지하 뇌옥에 들어가는 게 더 편할 것이다.
거기는 최소한 옆에서 계속 말을 걸 가주는 없을 테니까!
* * *
“으, 으윽. 으으윽.”
영지를 떠나는 날.
알시클은 괴로워하며 마차의 침실에서 드러누워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사람들은 간이 튼튼해야 했다.
보는 사람마다 술을 권하니 안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법으로 해정(解酲)하면 안 됩니까?”
“취기와 숙취 때문에 힘들어...”
마법은 만능이 아니었다.
특히 술 취한 마법사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좋은 마법이 있다 하더라도 술 취한 마법사에게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교장 선생님한테 부탁하면 안 됩니까?”
“하하. 내가 해줄 것 같으냐?”
해골 교장은 신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술부리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원래 자연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걸 억지로 마법으로 당길 필요가 없는 것뿐. 너도 배웠을 텐데?”
“아. 배웠습니다.”
마법이란 게 기본적으로 세상의 섭리를 마법사의 의지로 뒤바꾸는 것이라 오해하기 쉬웠지만, 마법사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건 마법을 자제하는 법이었다.
마법에 의존하는 마법사일수록 마법에 잡아먹히기 쉽다는 건 유명한 격언이었다.
‘근데 교장 선생님은 그냥 알시클 님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어하시는 것 같은데.’
“북부에서의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그래. 네 덕분에 좀 더 편하게 끝난 것도 있지. 저렇게 행복해하는 지더프는 처음 보는구나.”
“딱히 행복해하시지는 않았는데요?”
“저 정도면 행복해하는 거다. 날 믿어라.”
해골 교장은 멀어지는 북부 산맥을 보며 말했다.
“제국의 벽지가 위험한 것은 단순히 그 자연환경이 험난해서가 아니다. 그런 곳에 고인 마력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지.”
험난한 자연환경일수록 그 곳에 서리는 마력 농도도 짙어지기 마련.
제국을 지키는 입장에서는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드넓은 제국의 곳곳에서 언제 차원 관문이 열리고 외계(外界)의 존재들이 넘어와 날뛸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북부 산맥도 그런 악명 높은 곳 중 하나였다. 그림자 순찰대 같은 레인저들이 결성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므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찾아봐야 한다.”
“...?”
이한은 갑자기 모라디 가주 이야기하다가 북부 산맥과 우리 제국 안전하게로 넘어가는 해골 교장의 이야기에 의아해했다.
그걸 왜 자신한테 알려준단 말인가?
“어, 예. 알겠습니다.”
“그래. 다른 차원의 괴물들만 해도 성가신데, 악신숭배자 놈들까지 날뛰니... 언제나 성가신 일들은 함께 오는 법이지.”
해골 교장은 한숨을 쉬며 편지를 꺼냈다.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현재 북부의 상황을 보니 마법사들을 투입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휙!
일필휘지로 써내려가기 시작해서 완성된 편지는 곧바로 마차 밖으로 새처럼 날아갔다.
“연구에 쓸 황금도 없는데 악신숭배자 놈들 찾느라 낭비를 해야 한다니... 뼈를 갈아버리고 싶군.”
해골 교장의 마지막 말은 음산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한은 재빨리 동의했다.
“지하 징벌방에 영원히 가둬버리시죠!”
“그건 좀 잔인하지 않느냐?”
“......”
날아가던 마차 안에 편지 하나가 새로 날아 들어왔다.
북 찢어서 안의 내용을 읽던 해골 교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부탁이 들어왔군. 빌도츠칼 교단의 주교가 상담할 게 있다는구나.”
“빌도츠칼 교단이면...”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밤의 교단이죠?”
“도둑놈 교단이지.”
“...일부러 돌려서 말한 겁니다.”
빌도츠칼, 밤과 도둑의 신.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니 저게 악신 아닙니까? 제국에 망조가 들었나 저딴 신을?’이라고 반응할 수 있었지만, 사실 빌도츠칼의 사제들이 도둑놈들은 아니었다.
빌도츠칼을 모시는 사제들은 어디까지나 밤의 상징이자 현신인 빌도츠칼을 믿는 것이다.
...문제는 도둑놈들도 빌도츠칼을 매우 믿는다는 점이었다.
그 역사가 워낙 깊어서 이제는 빌도츠칼을 ‘밤의 신’이라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밤과 도둑의 신’으로만 기억됐다.
‘랫포드도 빌도츠칼 믿던 거 같은데.’
랫포드가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가끔 제국 동화를 던지면서 ‘좋은 거 나오게 해주십시오’정도로 빌 정도의 신앙은 갖고 있긴 했다.
사실 이 정도면 이한보다 훨씬 깊은 신앙심이었다.
“빌도츠칼 교단에서 왜 교장 선생님을? 헉. 혹시 사제들을 공격하셨습니까?”
“거기서 입학하기로 한 녀석이 한 명 있어서 그렇지. 사제들을 공격했다고 날 부르진 않는다.”
‘공격 안 했다고 부정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해골 교장은 보기 드물게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 후배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 그냥 사제 놈들하고 말 섞기 싫어서 그렇다. 나까지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빨리 끝내시죠. 이게 마지막 아닙니까?”
이한은 빨리 잔업을 끝내고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해골 교장의 등을 떠밀었다.
* * *
가끔 도둑들이 환상을 품고 ‘빌도츠칼 교단에 들어가 진정한 밤의 기술을 배워봐야겠다’하고 신전에 방문하곤 하지만, 그런 도둑들은 입구에서 물러나곤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맞이하는 캄캄한 어둠.
이건 빌도츠칼 교단 신전만의 특징이었다.
이한과 해골 교장은 암흑 시야 마법을 걸고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교단의 사제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어둠 속에서 잘만 돌아다녔다.
“도둑 대장 어디 있나?”
“...고나달테스 님. 저희는 도둑이 아닙니다. 밤의 신을...”
“그래. 그래. 도둑 대장.”
사제들이 어둠 속에서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해골 교장을 쳐다보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한은 창피해서 일행 아닌 척 슬쩍 벽을 보고 섰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자비 없이 이한의 팔을 붙잡아 끌고 갔다.
“고나달테스 님. 오셨습니까.”
“?”
주교실의 문을 연 이한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도 없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해골 교장이 이한을 보며 말했다.
“아직 미숙하군. 어둠을 꿰뚫어봤다고 안심하지 마라.”
“!”
그 말에 이한은 자신이 암흑 시야 마법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법은 언제나 꼬리를 물듯이 대처법이 존재하기 마련.
‘신성 마법!’
빌도츠칼 교단의 주교라면 암흑 시야로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도 불러올 수 있을지 몰랐다.
이한은 시야를 거두고 마력 감각에 집중했다. 그러자 앞에 독특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눈이 마치 암순응하는 것처럼 주교의 모습을 잡아냈다.
주교는 선한 인상을 가진 노부인이었다.
“인사해라. 워다나즈. 이쪽은 그레 가문의 이네스다. 여긴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고나달테스 님. 반갑습니다.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자네도 도둑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이 많네.”
이한은 분위기가 싸늘해질까봐 급히 말했다.
“사제님들이시겠죠. 하하.”
“아니. 도둑 이야기한 건데. 여기 이네스는 말 그대로 주변 도둑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든.”
“...?”
“자선 말이다. 자선. 네가 다른 탑 놈들한테 하는 거. 불쌍한 놈들한테 식사 베푸는 거.”
‘돈 받고 하는 건데 그거.’
이한은 눈앞의 주교가 보내는 감탄의 눈빛에 해명할 타이밍을 놓쳤다.
“난 징벌방이 낫지 않나 싶은데.”
“징벌방이 필요한 도둑이 있고 식사가 필요한 도둑이 있는 법입니다.”
해골 교장의 심드렁한 말에도 주교는 품위를 잃지 않고 대꾸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불렀나? 신입생이 기도 때문에 에인로가드에 가고 싶지 않아한다면 알아서 설득하게. 그게 뭐 어렵다고.”
“그것 때문에 부른 게 아닙니다. 고나달테스 님. 신입생한테 아주 조그만 문제가 있어서 상담드리고자 부른 겁니다.”
“신성 마법 각성? 초능력? 마법 거부증? 귀족 혐오증? 마지막은 상관없네. 오히려 좋지. 에인로가드에 오면 제국법의 허가 하에 귀족을 두들겨 팰 수도 있는데.”
“사실 이번에 입학 제안을 받은 사제는 도둑입니다.”
“...이건 좀 감탄스럽군. 드디어 빌도츠칼 교단이 명성에 걸맞게 행동하려는 건가?”
“그만하세요. 좀.”
이한은 해골 교장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