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친절한 펭귄 수인 마법사가 의뢰를 대신 해결하기 위해 밖에 나간 사이(조수로 한 명을 뽑았는데 가이난도가 걸렸다), 이한은 가왕국 시절 문자책을 펼치고 찬찬히 악보를 탐구했다.
확실히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되니 훨씬 흥미로웠다.
‘신기하군.’
제국의 마법을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효율성이었다.
대륙 마법의 역사는 제국의 역사보다 길었고 그만큼 그 종류와 학파도 다양했다. 지금도 제국이 존재를 모르는 원시 마법들이나 고대 마법들이 발굴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역마다 다르고 시대마저 뒤섞인 수많은 마법들을 어떻게 하나로 엮을 수 있는가?
제국의 마법사들은 효율성을 잣대로 엮어냈다.
낡고 비효율적인 마법들은 버린다.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마법이 있다면 더 빠르고 간결한 마법을 남긴다.
이 방법은 꽤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풍습도 역사도 서로 다른, 제국 서쪽 끝의 마법사와 제국 동쪽 끝의 마법사가 만나서 같이 연구를 진행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니 말이다.
당장 옛 동화 중에 <화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달랐던 두 마법사의 불행한 사고 이야기> 같은 게 있듯이, 다른 마법사들이 같이 협력하는 건 원래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이한도 이런 방법론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이론에는 예외가 있는 법.
낡고 비효율적이라 외면당했지만 가끔씩 튀어나와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예외들이 있었다.
그게 이제 가왕국 시절 마법사들의 마법이었다.
지금 제국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음악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법은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주변을 지배하려고 했다.
소리에 마력을 담아서 통제하는 방식으로!
소리만큼 주변 매질(媒質)을 빠르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지만 아무도 안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주문 자체에 마력을 담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난이도고, 해낸다 하더라도 마력 낭비가 심하니까.’
해골 교장이 괜히 이런 거 할 바에는 그냥 언령 마법에 도전하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마법사의 주문이란 건 원래 일종의 자기 암시지, 주문 자체에 마력을 담는다면 그건 그냥 언령 마법의 입문인 것이다.
당연히 보통 의지와 집중력으로는 불가능했다.
당장 이한도 몇몇 노래만 제한적으로 가능했으니...
가왕국 시절 마법사들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이런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이들의 지혜는 이한을 놀라게 만들었다.
먼저 무덤 벽면에 있었던 부조와 같은 마법진들이었다. 이건 주변 마력의 농도를 올리는 역할을 했다.
‘마력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음악 마법을 쓸 수 있을 테니까.’
이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이한에게는 별로 안 중요했다. 그냥 자기 마력으로 해결 가능한 부분이었다.
‘다음은... 아티팩트인가?’
놀랍게도 가왕국 시절 마법사들은 악기를 아티팩트처럼 사용했다.
곡 하나를 정한 뒤, 오로지 그 곡을 위한 악기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것이다.
이 악기는 그 곡의 음률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였고, 마법사의 노래와 함께 공명해 부족한 힘을 완성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음악 마법을 성공할 줄이야.
놀라운 집념이었다.
‘전용 악기로 한 곡만 20년에서 30년 가까이 연습하는 방식이라니. 노래에 없던 마력도 담기긴 하겠다.’
효율성은 개나 줬지만 경외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한이 보기에 현재 음악 마법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이것 외의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에인로가드에서 음악 마법을 연구하려는 선배들이 다 이한처럼 마력을 낭비하거나 주문에 담을 수는 없을 것 아닌가.
‘나한테도 좋은 방법이다.’
현재 이한이 몇몇 노래를 음악 마법처럼 부를 수 있다지만, 정작 본인도 어떻게 했는지를 잘 몰랐다.
이런 건 마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마법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악기의 힘을 빌리는 식으로 마법 완성에 부족한 요소들을 채운다면, 이한이 음악 마법을 연습하기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마침 해골 교장이 준 악기도 있겠다...
징-
이한이 바이올린을 꺼내서 켜기 시작하자 친구들이 시선을 보냈다.
“이 노래, <나쁜 드래곤이 온다네>였죠?”
“응.”
랫포드의 질문에 요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손으로 턱을 괴었다.
친구의 바이올린 솜씨가 훌륭해서 잠시 듣고 싶어졌던 것이다.
레드 드래곤이 와서 울타리를 부수고, 블랙 드래곤이 와서 집을 부수고, 화이트 드래곤이 와서 잔해를 짓밟고 가버렸다는 옛날 동요였다.
...교장 선생님이 와서 울타리를 부쉈다네. 포악한 교장 선생님! 이보다 더 끔찍한 재해가 있을까?
그러자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 와서 집을 부쉈다네. 지독한 교장 선생님! ...
랫포드와 요네르, 닐리아가 에인로가드 버전으로 부르자 에안두르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래곤 아님니까...?”
“...드, 드래곤이지. 드래곤이라고 했어.”
“교장 선생님이라고...”
“아니야! 드래곤이야!”
뒤늦게 후배의 존재를 깨달은 선배들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그러는 사이 연습을 끝낸 이한은 천천히 악보를 연주했다.
‘암흑 원소를 기반으로, 주변에 마력을 퍼뜨리고, 왕의 희생을 찬미하고 장송하는...’
느릿한 노래가 연주됐다. 이한은 가사를 따라서 불렀다.
“왕의 희생을 모두 찬미하노라, 왕께서 희생하시니 모든 적들이...”
노래만 계속 연주되자 요네르가 일어서더니 닐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느릿하고 우아하게 춤을 췄다.
제국의 춤은 즐겁고 유쾌할 때만 추는 게 아니라, 영결식을 거행할 때 추는 춤도 있었다.
랫포드는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어라. 가이난도 님 없을 때 춤춰도 되나?’
알게 되면 진짜 펑펑 울 것 같은데...
“으음.”
“읏!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이한이 바이올린을 멈추고 멈칫하자 닐리아는 균형을 잃을 뻔했다.
산맥에서 단련되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어색한 춤이 더 망가졌을 것이다.
“지금 노래 들으면서 딱히 느껴지는 거 없었지?”
“???”
친구들은 이한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자 하나씩 말해봐.”
“노래의 저음부가 풍성하고 섬세하다?”
“왕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런 노래를 받으며 죽었으니 장례식에 훔칠 게 많겠다?”
“대체 워다나즈는 언제 바이올린 연습까지 한 거지? 하루를 두 배로 사나?”
대답 뒤 요네르를 제외한 다른 둘은 부끄러워했다.
노래 감상을 해야 했는데 다른 소리를 한 것이다.
“음. 역시 노래에 마력이 담기질 않는군.”
이한의 말에 요네르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말했다.
“노래 자체에 마력을 담으려고? 그게 가능해?”
“그러니까 이런 건데...”
방금까지 악보를 읽으며 공부했던 걸 요네르에게 설명하자, 요네르는 신기해하면서도 걱정되는 기색을 보였다.
“재밌네. 그런데 난 좀 걱정이야.”
“왜?”
“2학년 때 분명 한계치까지 강의를 들을 텐데 이거까지 같이 하려는 거잖아?”
“...아니. 한계치까지 강의 듣는다는 건 아직 안 정해졌잖아.”
“한계치까지 듣겠지.”
“한계치까지 들으실 겁니다.”
닐리아와 랫포드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 현실을 부정하는 이한과 달리 친구들은 냉정했다.
지금 이한을 아끼는 교수들 학파만 해도 거의 한계치에 가까웠다.
여기에 그 교수들이 여는 다른 강의 몇 개만 더 넣으면 바로 한계치 돌파였다.
“내 생각에 이건 음률의 문제가 아니라 가사의 문제야.”
이한은 악보를 꼼꼼히 점검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에인로가드의 문제가 아니라...?”
“음률이 마법 효과를 만든다면 가사는 마법사의 마력 자체를 담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인 거지. 즉, 가사는 바꿔도 돼. 아니. 바꾸는 게 맞아.”
이한은 열심히 깃펜을 끼적거리며 메모했다.
해골 교장을 따라 돌아다니며 음악 마법을 탐구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좀 더 빠르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마법에서 주문이 마법사의 자기 암시를 돕듯이, 가사 또한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한이 어떤 노래는 성공하고 어떤 노래는 실패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나한테 맞는 식으로.’
가왕국 시절 마법사들은 한 곡을 수십 년 넘게 수련했다. 자신을 그 곡에 맞춰 바꾸기 위해서였다.
이한은 그 방법을 절충해 곡의 일부를 자신에게 맞춰 볼 생각이었다.
“찬미가, 장송가에 어울리면서 내가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가사...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혼자서 짜려니 힘들어.”
“음!”
“으으음!”
“으으으으으음!”
친구의 말에 세 명은 매우 부담을 느꼈다.
닐리아는 차라리 가이난도 대신 자신이 채집에 나설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나 제국 문학 강의 간신히 낙제 피했는데...”
“저도 작문 과제 때 도둑을 제국법으로 허가해줘야 한다고 했다가 교수님한테 따로 불려갔습니다.”
“......”
사실상 혼자 남은 요네르는 진땀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뭐라도 이 힘든 친구한테 꺼내서 던져줘야 했다.
찬미가, 장송가에 어울리는 가사면서 이한이 이입할 수 있는 가사.
“애들아?”
“에...”
“에?”
“에, 에인로가드는 어떨까.”
“에인로가드? 더 말해봐. 요네르.”
“그러니까 에인로가드는... 음... 에인로가드에 들어왔으면 장송가를 불러줘도 되잖아!”
“......”
닐리아와 랫포드는 황당해했지만 이한은 그럴듯하다고 느꼈다.
“과연. 그럴듯해. 찬미가는 이제 제국의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자신이 희생해서 들어온 학생의 고귀함을 찬미하는 거지.”
“그,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는데.”
요네르는 한 술 더 뜨는 친구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한은 이미 영감을 얻은 것 같았다.
“좋아. 암흑 원소를 기반으로, 에인로가드에 새로 들어온 학생들을 애도하고 찬미하는 노래... 괜찮은 거 같아. 이거 아산의 곡보다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하필 많고 많은 노래 중에 달카드의 곡이랑?”
에인로가드, 에인로가드 너무 좋다네 하면서 사기치는 노래를 듣자 친구들은 질색했다.
* * *
“펭에린 님. 저 덤불 속은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걱정하지 마라. 알려줄 테니까. 먼저 지팡이를 들고 절단 주문을 아래에 사용해. 위에 쓰지 마. 질겨서 통하지도 않을 거야. 그런 다음 구멍이 생기면 아래로 들어가.”
“크흑. 왜 저만...”
가이난도는 울면서 덤불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가시버섯을 채취해서 기어 나왔다.
저택 안에 있을 때는 귀엽기 그지없는 펭귄 마법사였지만, 밖으로 나오자 알시클은 매우 엄격한 선배 마법사로 돌변했다.
적당히 쉬운 재료만 채집하고 어려운 재료는 포기하려고 했던 가이난도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이건 힘들다고 하고 돌아가면 안 될까요?”
“가이난도 군. 그런 식으로 못했다고 하면 워다나즈가 널 어떻게 생각하겠나?”
“힘들어서 못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라.”
알시클은 얼음 사다리를 만들어주며 손짓했다.
이 황자는 자존심이라고는 해골 교장의 양심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이난도는 투덜대며 올라갔다. 하도 계속 투덜대자 알시클은 달래주기 위해 아래에서 외쳤다.
“잘 생각해봐. 가이난도 군.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그건 맞긴 해요. 하지만 펭에린 님은 오래 있고 싶어하시는 거 같아요.”
“그건 오해야. 나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으니까. 안 그래도 워다나즈가 음악 마법을 연구하는 걸 구경하고 싶거든.”
알시클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이한 같은 후배 마법사가 희귀하고 낯선 마법을 연구하는 모습은 마법사에게 즐거움 그 자체였다.
그로 인해 자신도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어. 펭에린 님.”
“왜 또?”
“그런 거면 지금 바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한은 마법 익히는 게 빨라서 돌아가시면 다 끝났을 수도 있어요!”
“...야, 지금 내 지능을 정어리로 보는 거냐?”
알시클은 참지 못하고 허공에 눈덩이를 만들어서 가이난도한테 쏘아대기 시작했다.
가이난도는 비명을 지르면서 외쳤다.
“진, 진짠데! 진짜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