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천적이 환생했다 45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검은 달의 수장은 방금까지만 해도 그런 얼굴이었다.
아래쪽에서 고통이 밀려오기 전까지는.
“끄, 끄으으아아아아아아악-!!!”
그것은 비명도, 절규도 아니었다.
그저 울부짖음.
남성성을 잃은 한 남자의 처절한 외침이었다.
‘아…… 괜히 미안해지네.’
터져 버린 고간을 부여잡고 끅끅거리는 말록의 모습에 동정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일부러 노린 거긴 하지만 지크는 저질러놓고도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저기, 괘, 괜찮…….”
“끄으으그그극…….”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미안하네.’
물어본다 해도 말록에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급소가 터지고도 죽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진정한 모양.
지크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남자는 그거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악마 같은 새끼. 자기 것 아니라고 막말을…….”
“그래도 죽진 않았으니 다행 아니야?”
“차라리 죽여라, 이 악마야! 크윽…….”
“어, 어쨌든 잠시 쉬고 있어라. 마취 정도는 시켜줄게.”
마취시킨다는 이유로 지크는 처음에 흡수한 패럴라이즈를 사용했다.
‘방출.’
그러자 부들대던 말록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동시에 기다렸던 완료 메시지도 떠올랐다.
[검은 달의 수장 제압 완료!]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새로운 기본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기본 스킬 : 빛의 축복]
-효과 : 대상의 상처 및 상태 이상을 완전히 치유합니다. 치유 후엔 30분간 모든 상태 이상에 면역이 됩니다.
-특이사항 : 시전 후 30분의 쿨타임이 있습니다.
‘내가 빛의 축복을 얻다니!’
힐러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스킬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힐러가 될 생각은 없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지.’
스킬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퀘스트 보상으로 각성자나 받을 수 있는 고유 스킬을 준다는데 거절할 이가 어디 있으리.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라다.
수장을 제압하는 일이 지크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나저나 이 자식 기절했네?”
마비 상태로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보니 눈을 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하긴 거기가 터졌는데 기절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편이 녀석으로서도 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아찔한 충격이었을 테니까.
물리적인 면에서도,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렇다고 마음 편히 기절하게 놔둘 의향은 없다.
짝-! 짝-!
“야.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그냥 자버리면 어떡해?”
뺨을 두들기며 깨우려 해봤지만, 마비 마법 때문인지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일어나고 싶지 않은 건가?
현실보다 꿈이 더 달콤할 테니.
‘어쩌지? 안 일어나는데?’
이대로 들쳐메고 궁정에 있는 아버지에게 넘길까?
그렇게만 해도 문제 대부분은 해결되리라.
‘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엔 너무 깊이 개입해 버렸단 말이지.’
이왕 개입한 이상 놈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뽑아야 한다.
아버지에게 맡긴다고 정보를 얻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
‘일단 놈이 일어나기 전에 여기부터 뒤져볼까?’
수장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시선을 옮긴 지크가 서랍을 뒤적였다.
안에는 꽤 많은 통신구가 있었지만 정작 연결되는 건 별로 없었다.
고의로 고장 낸 흔적이 보인다.
‘아마 발루두크의 흔적도 녀석이 지웠겠지.’
한숨을 쉬던 지크가 다른 증거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시선이 바닥으로 고정됐다.
고리가 달린 나무판자를 발견한 것이다.
설마 하며 다가간 지크가 고리를 잡아 올렸다.
끼이익-
‘역시. 지하로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있었네.’
힐끔 시선을 돌려 암살단 수장이 깨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한 지크가 계단을 밟았다.
삐걱거리며 내려서자 좁고 컴컴한 지하 공간이 보인다.
저 끝에서 노란 불빛이 일렁이는 게 횃불이라도 켜둔 모양.
지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하의 끝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거, 거기 누구요?”
철창 안에 사람이 갇혀 있었다.
나이는 40대로 보이는 갈색 머리칼의 중년 남자.
‘설마……?’
지크가 떠오르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이스 브라이언트 백작님?”
“그, 그렇소만 누구시오, 그대는?”
“저는 맥러플린 가문의 사공자, 지크 맥러플린이라고 합니다. 일단 여기서 풀어드리죠.”
자신을 소개한 지크는 벽에 걸린 열쇠를 집었다.
상대가 브라이언트 백작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진실로 나온 데다가 형상 변형 마법의 흔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철커덕-!
문을 열었음에도 브라이언트 백작은 멍하니 서 있을 뿐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탈출한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는 모양.
“안 나오십니까?”
“아아, 그, 그래. 나가야지.”
철창에서 나오면서도 백작은 지크를 흘끔거렸다.
겨우 15세나 될 법한 소년의 도움으로 이곳을 탈출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조금 의심의 눈빛도 섞여 있다.
“맥러플린 가문이라면…… 데칸에서 3대 마법 명가라 불리는 곳이 아닌가……? 쿨럭!”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디 아프십니까?”
“아, 아닐세, 크흠……. 며칠간 물 한 모금 못 먹어서 그렇다네. 신경 써줘서 고맙네. 그나저나 맥러플린에서 나를 구하러 와준 겐가? 나는 어떻게 알고 찾은 거지? 아니, 그 전에 위에 누군가 지키고 있지 않았나? 어떻게 여길 들어올 수가…….”
“물어보실 게 많겠지만 일단은 천천히, 나가서 얘기하시죠.”
“아, 알겠네.”
지크는 백작을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며칠 만에 햇빛을 본 루이스 백작이 올라오자마자 눈을 찡그렸다.
잠시 후, 눈을 뜨던 백작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저, 저 사람은!”
“이 사람 맞죠? 백작님을 가둔 사람이.”
지크가 암살단의 수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백작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맞아!”
‘상황을 보아하니 루이스 백작도 이 녀석의 정체는 몰랐던 모양이군.’
아무렴, 암살단의 수장이나 되는 놈이 납치한 인질에게 쓸데없는 정보를 발설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결국엔 이 녀석을 깨워서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건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어나질 않는다.
‘설마 죽은 거 아니야?’
지크가 발로 툭툭 건드리자 그 모습을 백작이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그의 눈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는 생쥐로 보일 따름이었다.
“왜, 왜 그러나? 뭘 굳이 깨우려고 들어? 그보다 맥러플린 공작님은 어디 계시는가? 정말로 나를 구하러 와주신…….”
“여긴 저 말고 없어요.”
“뭐?”
“아, 한 명 더 있네요. 올 시간이 됐는데…….”
지크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때, 백작은 오두막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메, 메리!”
“아빠!”
두 부녀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껴안는다.
감격스러운 부녀 상봉의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는 두 사람이었으나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설명은 나중에 메리한테 들으시고요, 일단 이 녀석 좀 깨워볼게요.”
그리 말한 지크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말록의 고간을 건드렸다.
퍼억!
“끄흐, 흐그으윽!”
“일어나. 언제까지 자고만 있을래? 팍, 씨!”
순간 달콤한 잠에서 깬 말록은 흡사 저주하는 눈빛으로 지크를 올려다봤다.
두려움과 원망, 원한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네, 네노오옴……. 가, 감히!”
“감히 뭐? 그렇게 당하고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아니면 이젠 잃을 게 없다, 이거야?”
“크윽…….”
지크의 윽박에 말록이 꼬리를 내렸지만 정작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건 메리의 아버지였다.
“메, 메리.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저자가 왜 사공자에게 꼼짝도 못 하는…….”
“맥러플린 공자님은 생각보다 더 강하신 분이에요. 저를 구해주신 것은 물론 여기까지 위치를 추적하고 알아내신 것도 저분이시고요.”
“너를 구해줬다고……?”
만약 그렇다면 브라이언트 백작가는 저 소년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이 된다.
이미 자신을 구해준 것으로도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지만.
백작은 달라진 표정으로 지크를 눈에 담았다.
불한당처럼 사내를 협박하고 있는 지크를.
“이름.”
“…….”
퍼억!
“이름, 새끼야!”
“……마, 말록 피어스다.”
뒤통수를 맞은 말록은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고자가 된 것은 억울하지만 그걸 떠나서 힘의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저기 있는 통신구. 네가 고장 낸 거냐?”
“그, 그렇다.”
“고장 내지 않은 통신구는? 누구와 연결되지?”
“1대장부터 4대장까지. 행동대장들과 연결되는 통신구였지. 지금은 녀석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건 내가 알아. 전부 시체가 되어 썩어 문드러지고 있겠지.”
“역시 네놈이…….”
“누가 말하래? 확!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팔을 들자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말록이었다.
“너 발루두크 알지?”
“…….”
“눈빛 보니까 아네. 뒷배에 발루두크가 있는 거 맞지? 네가 부신 통신구 중에 녀석과 연락하는 통신구가 있는 거고.”
말록은 침묵을 지켰다.
지금까지 잘 말하다가 발루두크 얘기에 침묵한다?
“입 닫는 거 보니까 아는 사이 맞네.”
“아니다. 전혀 모른다.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도 없고.”
나름 시치미를 뗐지만, 지크의 눈에 통할 리가 없다.
[현재 바라보는 대상이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케이. 그럼 흑마법은 누구한테서 배웠어? 발루두크냐?”
“난 분명 모른다고 말했다. 그를 알지도 못하는데 뭘 배운단 말이냐?”
[현재 바라보는 대상이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크가 빙그레 웃었다.
보기엔 협조하지 않고 있지만, 대답은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도움을 주고 있다.
“네놈들 목적은 뭐야? 이 독약으로 뭐 하려고 했어?”
지크가 눈앞에서 약병을 흔들자, 말록이 눈을 감고 초연한 태도를 취했다.
“말 안 할 거야?”
“나한테 물어도 소용없다.”
“이걸로 누군가를 암살하려고 했지? 궁정에 있는 누군가를.”
“글쎄다.”
“브라이언트 백작가를 끌어들여 내 얼굴로 잠입하려 한 것도, 궁정에 있는 누군가를 암살하기 위함이잖아. 그렇지?”
“…….”
말록은 침묵하거나 대답을 회피하기만 했다.
그러자 답답한 건 지크였다.
‘뭔가 말대답이라도 해야 진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데, 협조를 안 하니 원.’
능력이 있으면 뭘 하나?
써먹을 기회를 주지 않는데.
“말 안 해? 또 처맞고 싶냐?”
“마음대로 해라.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주먹을 들고 협박해도 상대는 이렇다 할 정보를 주지 않았다.
마치 세상 달관한 모습.
‘어쩌지? 지금으로선 회유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지크가 고민하는 그때, 뒤에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아아, 괘, 괜찮다. 걱정 말거라.”
“무슨 일이야? 아까도 기침하시더니.”
지크의 물음에 메리는 이내 슬픈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지병이 있으셔서요…….”
“지병? 그거 거짓말 아니었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은 거짓이었지만…… 지병은 사실이었어요.”
[현재 바라보는 대상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백작가로 꼬드길 때 메리는 거짓말을 했었다.
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혼인할 사람을 급하게 구하고 있다는.
‘그때 지병에 걸렸다는 게 진짜였다고?’
메리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던 지크가 루이스 백작을 바라봤다.
간헐적으로 기침을 하는 것이 폐에 문제라도 있어 보인다.
‘흠. 그렇다면……?’
별안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크의 시선이 고집불통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말록에게 닿았다.
“야. 내가 제안 하나 할게.”
“……?”
“네가 아는 사실을 전부 나한테 불어. 그러면 망가진 그거, 고쳐준다고 약속하지.”
“뭐?”
말록은 잠시 자신의 고간을 바라보더니 픽 웃음을 지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도 들은 얼굴로.
“헛소리하지 마라.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네깟 놈이 나를 고쳐주긴 무슨. 네놈이 신성 제국의 성녀라도 된단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이거 보고 판단해.”
지크가 별안간 루이스 백작에게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새로 배운 스킬을 사용했다.
‘빛의 축복.’
상대를 치유하겠다는 의지와 시동어가 더해지자마자, 손에서 따스한 기운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루이스 백작의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지크 공자님? 지금 뭐 하시는…….”
“허엇?”
놀란 건 다름 아닌 당사자인 루이스 백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답답하던 속이 시원하게 가라앉았다.
고통과 함께 찾아오던 기침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 이게 된 거지? 지금 나한테 뭘 한 겐가?”
“백작님의 병을 치료해 드렸습니다.”
“뭐라? 그,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에요, 공자님? 저희 아버지의 지병은 십 년 동안 이어진 병이에요. 신관도 치료하지 못했다고요.”
“정말이야. 내가 좀 특별한 치유 능력이 있어서 말이지.”
신관도 치료하지 못한 병을 지크가 고쳐 버렸다.
씩 웃던 지크의 눈이 말록에게 향했다.
“어때? 이래도 안 믿을 거야?”
“…….”
흔들거리는 말록의 동공에서 어느덧 새싹 같은 희망이 피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