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북부의 야만인 (2)
서릿골에서 불리던 이름은 코르디의 아들 칸. 대륙 인간들의 방식으로는 코르디 칸.
그게 거한의 이름이었다.
사실 그를 지칭하는 이름이야 제법 여러 가지였으나,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참수자니, 인간 트롤이니, 별 흉흉한 것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여기까지 왔으면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칸은 찌뿌둥한 몸을 적당히 풀며 목이 부러진 시체를 대충 던져두었다.
그러면서도 야만인 행세에 심취한 식인 싸이코를 면밀히 살폈다.
서릿골 사람들의 잿빛 피부를 흉내내려 뭘 바른 듯 혼탁한 회색 피부. 그린스킨 투사들의 것으로 유명한 전투 문신.
어설프게 주워들은 야만인의 특징을 대충 따라한 티가 났다. 야만인을 실제로 본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저거로도 충분하긴 했겠지만.
‘아니…. 전부 속진 않았나.’
상단의 호위들이 자신을 내버린 와중에도 싱글벙글 웃던 여자 마법사는 애초에 가짜란 걸 알아본 눈치였으니까.
“어설프게 북부의 전사를 흉내 내는 놈이 있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그때 가짜 야만인이 포부도 당당하게 외쳤다. 칸은 뜬금없는 소리에 잠깐 의아해하다가, 이놈이 선빵을 쳤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정치질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선빵과 목소리가 큰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니. 보기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었군.
“뭣들 하냐! 저 가짜 놈을 처죽이지 않고─!”
놈의 당당함에 설득당한 건지, 도적들이 주춤주춤 거리를 좁혀왔다.
칸은 슬쩍 웃으며 생각했다. 멍청한 놈들.
활짝 개방된 곳이라는 걸 이용해 공격해오는 도적들의 수법은 퍽 위협적이긴 했다.
등 뒤에 마차, 양옆과 전면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 상식적으로 막아내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대륙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칸의 손에 쥐여진 손도끼가 가로로 빛살을 그렸다.
쩌저정!
괴력이 실린 손도끼가 창대를 모조리 꺾고, 창대를 쥔 손까지 뽑아버렸다. 비명이 터졌다.
이에 태고의 야성을 간직한 전사가 흉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저, 저…!”
야만전사의 웃음이 심장을 두들기는 듯했다. 뒤쪽에서 그걸 지켜보던 가짜 야만인의 얼굴이 굳어갔다. 뭔가 심상치 않다!
그러나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겁에 질린 양 떼를 무참히 도륙한 서릿골의 늑대가 삽시간에 당도했다. 회색의 눈동자가 살의로 번들거렸다.
‘뭐냐 저놈은.’
그가 야만인의 흉내를 내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식인이라는 독특한 취미를 마음껏 저질러도 ‘야만인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는 반응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린스킨의 문신을 어설프게 그려 넣고, 왕국 서부를 돌아다니며 강도질을 시작했다.
의외로 야만인 흉내가 상대를 위협하는 것에 효과적이라는 것도 중간에 깨달았다.
오늘 마찬가지였다. 평소 하던 것처럼 만만한 상단을 붙잡아 겁을 주고, 계집과 돈을 챙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짜 야만인을 마주칠 줄은…!
“대, 대장…!”
“살려줘어어-!”
사람의 몸뚱어리가 저렇게 연약했나. 어째서 저리 쉽게 토막 나고 부러진단 말인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어딘가 꿈만 같아 머리가 멍했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가만히 있으면 뒈진다.
“잠깐. 잠깐! 대화를 하자!”
그의 절절한 호소가 통한 걸까. 야만인의 학살이 우뚝 멈췄다. 한 도적놈의 코앞에서 도끼가 멈추자 녀석이 히익-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주저앉는 게 보였다.
“대화를 하자고?”
“그, 그렇다.”
‘어떻게 사람 얼굴이 저렇게 흉흉하단 말인가!’
기실 그는 야만인의 악명을 부풀린 데 기여한 장본인인지라, 소문의 절반은 다 과장일 거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전부 진짜인가 싶기도 했다.
‘저 얼굴이라면 무리도 아니겠지…!’
“내 진짜를 몰라봐서 미안하군! 북부의 용맹한 전사를 예전부터 흠모해서 닮고자 노력해왔거늘,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기쁘다! 북부의 방식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않겠는가!”
당연히 전부 개소리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말인데, 뱉고 나니 제법 그럴싸하기는 했다.
야만인은 전부가 무식쟁이라 대화가 안 통한다는 소문과 달리, 저 야만인은 왕국어에 굉장히 능통했으니까. 말만 통하면 협상의 여지는 있어 보였다!
“북부의 방식이라…. 그게 뭔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물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이 동했는지, 칸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좋은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언뜻 들리는 듯했다.
“이것들아 무기를 내려라. 전사들끼리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터이니.”
제 우두머리의 명령에 도적들이 곧바로 무장을 해제했다.
대장의 명령이 지엄한 것이라 그런 게 아니라, 한 손으로 사람을 들어서 목을 부러뜨리는 괴물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가짜 야만인은 그러한 사정을 내심 이해하면서도 얼굴을 구겼다. 살아 돌아가면 보자, 새끼들아. 그러면서 천천히 야만인에게 다가갔다.
“나는 제이콥이오. 당신은.”
“코르디의 아들 칸.”
“그래. 코르디의 아들 칸. 내 일찍이 흠모했던 북부의 전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렀군. 사죄의 뜻으로 내가 계집 열과 금화를 주겠소.”
목숨값으로 난 이만큼을 줄 수 있다. 그러니까 봐줄 수 있냐? 라는 말을 적당히 돌려서 한 것이었다.
칸에게선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기에 가짜 야만인, 제이콥은 남몰래 입술을 짓씹었다.
‘설마 더 달라는 거냐?’
“좋소! 좋소이다! 북부의 전사라 그릇이 넓으시구만! 내 아끼는 호랑이 가죽도 그대에게…….”
“이 새끼는 왜 이렇게 혀가 길어.”
어? 갑자기 튀어나온 난폭한 말에 제이콥이 멍하게 칸을 쳐다봤다.
잘못 들은 건가? 그러다 정신 차린 순간, 손도끼의 날이 시퍼런 빛을 토하며 코앞에 있었다.
“잠……!”
콰득!
참으로 허망하게. 손도끼 거치대가 된 제이콥의 몸이 스르르 허물어졌다.
그리고 찾아오는 정적….
나름 이 일대를 주름잡던 도적 떼의 우두머리치곤 지나치게 허망한 죽음인지라, 수하들도 어어- 하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작 칸은 무덤덤하게 손도끼 거치대가 된 제이콥의 머리에서 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부릅뜬 제이콥의 눈이 ‘어째서?’라고 묻는 것 같아 칸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방식대로 하자며.”
주먹과 칼, 손도끼. 야만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화 수단이었다.
*
*
*
손님을 버리고 도주하던 상단의 사람들이 주춤 돌아와 눈치를 봤다.
이유인즉슨, 도적들의 장비와 은신처에 있을 재산을 탐냈기 때문이었다.
수치심이란 게 없냐고 따져야 할 상황이지만, 칸은 구태여 따지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양심을 찾는 것부터가 멍청한 짓이니까. 애초에 상인이고, 용병이고, 도적이고, 죄 같은 족속이었다.
“장비와 재산은 모두 수거하고, 처분까지 전부 맡기도록 하지. 대금은 처분한 값의 3할을 주마.”
“감사합니다! 나으리!”
얼굴이 거무죽죽하던 상단주가 허리를 굽혔다.
물건의 운송과 잡다한 처리를 도맡는 대가로 예정에도 없던 돈을 만지게 생겼으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는 사이에 호위 용병들이 도망치는 도적들을 쫓아 살해하고, 일부는 붙잡아 재산이 있는 곳을 캐물었다.
칸은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하며 마차에 몸을 실으려 했다.
저런 귀찮은 짓거리를 피하려고 저 겁쟁이들을 살려두고, 고용한 것 아니겠는가.
“단신으로 십수 명을 압도하는 실력의 야만전사. 그것도 동부 출신…. 아무래도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제 착각일까요?”
그런 그를 여자 마법사의 중얼거림이 붙들었다.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쓸데없이 궁금한 게 많은 여자였다. 그래, 쓸데없이….
“글쎄. 잘 모르겠군.”
“변경의 늙은 여우가 당신을 쫓는 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것 때문이라면 걱정 마요. 저는 그냥…….”
“착각은 착각으로 두는 게 좋을 때가 있는 법이오.”
짧게 톡 쏘아붙인 직후, 칸은 마차의 한구석을 다시 차지하고서 눈을 감았다.
내심 무시하고 깔봤던 꼽추가 흉폭한 야만인이라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한 어미와 아이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굳이 반응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것보단 어서 씻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뜨거운 욕조에 몸이나 담그고 싶네. 가능하다면 시원한 맥주랑 치킨도…….’
덜커덩- 덜커덩-
마차에 탄 칸이 불편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당부를 들었는지, 흔들림이 눈에 띄게 줄어든 마차가 본래 경로를 벗어나 도적들의 은신처로 향했다.
야만인 행세나 하던 놈은 주제에 맞지 않게 부자였다. 어지간한 장원의 재산을 옮겨다 놓은 수준이어서, 칸은 몹시 흡족했다.
“몰래 챙기려 드는 게 보이면, 팔을 뜯어주마.”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기만 해라. 칸은 손도끼를 쥐고서 상단 사람들이 물건을 싣는 걸 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돈이랑 술, 옛 신과 관련된 물건을 좋아한다 들었는데. 정말인가 보네요. 표정이 엄청 밝아.”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소.”
“앞에 둘은 몰라도, 뒤에 건 별로 관심 없을걸요?”
“귀족들은 좋아하더군. 고풍스러운 취미 같다고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허영심에 죽고 사는 인간들이니까.”
칸은 짧은 대화로 상대의 신분을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귀족의 습성을 대충 이해하고 있으며, 동시에 귀족은 아닌 자. 그리고 마법사…. 떠오르는 후보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탑 출신의 마법사가 아닐는지.
다만 걱정인 건 그녀의 신분보다 의도였다.
“거기! 내 물건에 흠집이라도 나면 똑같이 흠집을 낼 줄 알아라!”
“네, 넵!”
상단 일꾼이 은화가 든 궤짝을 들고서 비척거리는 걸 본 칸이 대뜸 윽박을 내질렀다. 정말 은화에 기스가 날까 봐 그런 건 아니었고, 생각할 시간이나 벌 속셈이었다.
‘그래. 이 여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속으로 들러붙는 걸까.’
거하게 사고를 친 직후, 도망치듯 왕국 동부를 벗어난 신세이기에 여러모로 찔리는 구석이 많았다.
꼽추 흉내까지 하면서 마차를 탔건만, 웬 짝퉁을 만나 정체를 드러내고, 하필이면 자신을 알아볼 만큼 아는 게 많은 주문쟁이와 얽힐 줄은….
물론, 아름다운 여인이 관심을 보이는 건 사내로서 마다할 일이 아니긴 했다. 예전 같으면 머릿속에서 가족 구성원까지 준비해두었으리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와 노인, 젊은 여자와 주문쟁이 그리고 악마 숭배자를 조심하라는 격언도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 젊은 여자 주문쟁이는….
“투 스트라이크군.”
“네? 투 스트라이크?”
“북방의 말이오. 그래서 나한테 용무라도 있는 거요? 어째 끈덕지게 들러붙는군.”
“그냥요. 신기하잖아요? 글을 아는 야만인이라니. 괴팍하지 않은 마법사랑 비슷하게 안 어울려.”
주문쟁이가 전부 괴팍한 반사회적 정신병자들이긴 하지.
비슷하게, 야만인이 글을 안다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되긴 했다. 북부 서릿골 놈들은 빈말로도 똑똑하다 할 수 없으니까.
무식하고 난폭한 거로는 그린스킨이랑 호형호제를 해야 하는 수준 아닌가.
그녀의 호기심은 어쩌면 당연한 거긴 했다. 야만인이 어떤 인종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전부 비슷한 생각을 할 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왜 어쩔 수 없는 일이냐 하면… 그가 야만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뚱어리는 야만인의 것이 맞았다.
대륙의 북방 서릿골 너머에서 태어나, 이게 사람인지 오크 형제인지 헷갈리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가다, 새로운 싸움을 찾아 서릿골을 건넌 야만인. 코르디 칸.
그러한 설정을 가진 인물의 몸뚱어리에 빙의한, 30대 배불뚝이 회사원. 그게 바로 지금의 칸이었다.
‘쯧. 아직도 후회되네.’
갑자기 떠오르는 옛날 생각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 엿 같은 판타지 세계에 떨어진 날로부터 꽤 지난 지금도 칸은 종종 생각했다. 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이 세계에 빙의한 그 날.
게임을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