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북부의 야만인 (3)
[미들랜드 퀘스트]
방대한 맵과 마찬가지로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긴 스토리,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다양한 캐릭터 빌드와 하드코어한 난이도.
한국인 게이머의 공략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떡칠한 결과, 한동안 붐이 일어났을 정도로 대단했던 게임의 이름이다.
‘나도 옛날엔 줄기차게 했었지….’
대학 시절을 모조리 불태웠다 표현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사실상 인생 게임이나 다름없는 그 게임을, 30대 아저씨가 돼서 다시 찾게 된 건 갑작스러운 확장팩 발매 소식 탓이었다.
확장팩에서만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종족들과 새로운 퀘스트, 새로운 엔딩…. 공략 욕구를 마구마구 자극하는 단어들의 향연에 그는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남들보다 먼저 공략하고 인증글 하나 올릴 수 있으면, 그걸로 돈값은 충분하지.’
과거의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게임 속에 떨어진 지금에 와서는 뺨을 후려쳐주고 싶은 생각이다. 서른줄 인생을 통틀어 가장 후회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과거의 잘못은 스토리 스킵만이 아니었다.
종족 선택.
확장팩으로 추가된 세 종족. 엘프, 드워프, 야만인은 장단점이 매우 뚜렷했다.
장생족이면서 정령이라는 특수한 소환물을 다루고, 전체적인 스탯이 골고루 높은 엘프.
자체적인 장비 제작과 ‘마도 공학’이라는 특수 스킬로 제작 가능한 특이한 아이템들이 특징인 드워프.
앞선 두 종족과 다르게 종족 전용 스킬은 없지만, 깡 스탯 하나만큼은 최강인 종족 야만전사.
‘엘프는 너무 혐성 종족이라 적이 너무 많지 않나…? 드워프는 멋이 없고……. 그럼 야만전사밖에 선택지가 없구만.’
음, 야만전사라.
그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인간종 중에서 유일하게 마나가 없는 반푼이 종족이지만, 타고난 몸뚱어리가 엄청 센 게 특징이었지? 아마.’
고인물이었던 그가 확신하지 못하는 건 야만인이 엘프나 드워프보다 희귀한 종족인 까닭이었다.
애초에 그들의 땅인 서릿골은 미들랜드 최북단에 자리했고, 워낙 무식한 놈들이라 금방 객사하는 경우가 많기도 했다.
‘보자…. 스킬 소모값이 체력? 마나가 없어서 그런가 보네.’
종족 보너스는 레벨업 시에 근력이 추가로 1 상승한다, 라는 굉장히 사기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덤으로 전투 계열 스킬은 숙련도가 더 빨리 오르고, 획득할 때 기본적으로 등급을 하나 올려주기까지….
‘개사기네.’
사실상 근력 2배에 스킬 숙련도 보정 치트를 달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이러면 야만전사가 독보적으로 사기 같은데, 밸런스가 이게 맞나?
정령이랑 마도 공학이 그만큼 사기란 얘기겠지…?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한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야만전사를 선택했다.
‘근데… 야만인들 취급이 개쓰레기 수준 아니었나?’
인간 고기방패, 가장 등쳐먹기 좋은 NPC 1위, 적당히 써먹다가 팽해도 뒤탈이 없는 NPC 1위, 인간 오크, 정박아….
유저들 사이에서도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 야만전사지만, 안타깝게도 NPC들 사이에서 취급이 더욱 박한 편이었다.
‘뭐. 그래도 메리트가 확실하니까. 캐릭터 초기 설정은…….’
[레벨 1]
[근력 : 12]
[민첩 : 9]
[건강 : 11]
[지능 : 2]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스탯이었다.
‘인간’의 경우 모든 스탯이 5로 고정된 채 시작하니까 말이다. 지능이야 마나통이랑 마법과 관련한 스탯이라 어차피 버리는 스탯이고.
‘다음은 외형….’
남자 야만인의 디폴트 외형은 다른 캐릭터보다 1.5배는 커 보이는 장신에 사람 머리통만 한 팔뚝과 장딴지를 가진 근육질 남자였다.
회색 눈에 잿빛 피부가 꽤 특이했는데, 야성적인… 아니, 흉악한 얼굴과 어우러지니 퍽 어울렸다.
‘성인 모드 깔려있었으면, 엄청났겠는데.’
아마 구렁이를 달고 다니지 않았을까? 실없는 농담을 하며 외형은 기본 그대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본으로 주어지는 스킬은 총 둘.
[휘두르기 (F) - 00%]
─체력을 소모해 더욱 강하게 휘두른다. 무기 내구도가 감소한다.
[태고의 혈통 (B) - 00%]
─레벨업 보너스, 근력 +1
─전투 계열 스킬의 태생 등급이 한 단계 고정으로 상승한다.
전자는 평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공격 스킬 수준이었고, 후자는 야만전사의 캐릭터 특성이었다.
스킬 다음으로는 야만전사의 배경 스토리가 나왔는데, 그는 보지도 않고 스크롤을 쭈욱 내려버렸다. 그런 거 알아서 뭐에 써먹는다고.
드디어 최종 결정 버튼이 활성화됐을 때.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그 직후.
“지금부터, 전사의 시험을 시작한다───!”
“우워어어어!”
“우! 우! 우!”
그는 야만전사, 코르디 칸이 되어 있었다.
[제 0막, 전사의 시험]
─북부 서릿골의 전통. 전사의 시험을 통과하라.
─실패할 시, 게임 오버.
*
*
*
“제길. 엿 같은 기억이 또…….”
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 아래에서 목욕을 즐기던 칸이 갑자기 떠오른 좋지 않은 기억에 얼굴을 구겼다.
깜빡 졸아버린 사이에 악몽을 꾸다니. 너무 간만의 휴식인지라 마음이 좀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전사의 시험이라.’
그건 지금 생각해도 참 끔찍했다.
30대 회사원이었던 그가 대뜸 히말라야 산맥을 연상케 하는 곳에 떨어져선, 근육질 형님들과 경쟁을 하게 됐으니.
그 내용도 참 신선하게 엿 같은 것들이었다.
맨몸으로 서릿골에 내던져진 채 이 주일을 생존하라거나, 보통 오크보다 훨씬 강한 서릿골 오크와 레슬링을 떠서 이기라든가, 호랑이도 잡아먹는 서릿골 늑대를 힘으로 굴복시키라든가…….
거기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스스로도 의문일 정도였다.
굳이 꼽자면야. 비정상적으로 튼튼한 야만인의 몸뚱어리와 레벨업을 통해 쉼 없이 강해진 덕분이겠지.
[레벨 24]
[근력 : 58] +1
[민첩 : 32] +2
[체력 : 34] +2
[지능 : 2]
‘미들랜드 퀘스트’는 기본적으로 레벨업 한 번에 스탯 포인트 3개가 주어진다.
그리고 캐릭터의 빌드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포인트가 분배되는데, 야만인의 경우 근력, 민첩, 체력이 하나씩 상승했다.
야만전사의 경우엔 종족 보너스로 근력이 추가로 1 오르기에 이런 수치가 나온 것이고.
‘슬슬 60을 넘기고 싶긴 한데….’
현재 레벨이 24. 게임 기준으로 초반부를 넘어 중반부에 발을 들이미는 시기.
정석대로라면 메인 퀘스트를 달려서 레벨을 올리거나, 이런저런 서브 퀘스트로 내실을 다진 뒤에 메인 퀘스트를 쉽게 깨는 방법이 존재했다.
뭐가 되었든 성장을 위해선 퀘스트를 깨는 게 맞았다. 하지만-.
‘퀘스트는 기분 더러워서 하기가 싫단 말이지.’
이 게임의 퀘스트는 기본적으로 ‘세계의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플레이어 캐릭터는 목숨을 걸고 드래곤이나 악마, 거인 같은 미친 괴물들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심지어는 같은 인간들끼리도 뒤지게 치고받는 탓에, 그걸 중재하거나 직접 나서서 전쟁을 끝내는 내용의 퀘스트도 빈번했다.
‘아니, 시발. 그걸 내가 왜 해야 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아무리 바위를 주먹으로 박살 내는 초인의 몸뚱어리를 가졌다 한들, 그는 여전히 평범한 30대 배불뚝이 회사원일 뿐이다.
살면서 착한 짓이라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한 것밖에 없는 소시민이 세계를 구하긴 무슨…….
대뜸 엿 같은 이세계에 끌고 가서 ‘세계를 구해주세요. 용사님.’하고 퀘스트를 준다고 해서, 넙죽 받아들이는 건 머리가 꽃밭인 소설 속 주인공에게나 가능한 거다.
‘나 같은 배불뚝이 아저씨는 엑스트라가 딱 어울리지.’
그렇기에 칸의 목표는 단순했다.
생존과 지구로의 귀환.
그가 신화시대의 흔적들을 좇는 것도 같은 연장선이었다.
“그것도 가망은 없어 보이지만…….”
‘슬슬 일어날까.’
삐그덕-.
야만인의 무게를 버티느라 고생한 나무 욕조가 비명을 질렀다.
칸은 고생했다는 듯 욕조를 툭툭- 두들기고는 벗어뒀던 장비를 다시 착용했다.
“나리. 음식을 바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음. 든든한 것들로 가져와라.”
그때 급사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와선 눈치 좋게 보드라운 천을 건넸다.
거기에 묻지도 않았는데 식사 여부까지 묻는 걸 보면, 단단히 뜯어내라고 여관 주인에게 당부라도 들은 듯했다. 아까 목욕물 팁을 후하게 줘서 그런가?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여기!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요! 나리!”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한 급사의 안내를 받으며, 칸은 음식보다 먼저 술을 내오라 말했다.
이상하게 술이 고픈 밤이었다.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오늘따라 밤하늘의 별이 희미한 게, 지구의 것과 닮아 보인 탓일지도.
“여기 맥주 드리겠습니다요!”
미지근한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기기 무섭게 칸이 얼굴을 찡그린다.
‘더럽게 밍밍하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마다 마시는 건, 어지간한 귀족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니.
마법을 쓰면 가능하긴 했다. 그런데 주문쟁이란 족속들은 대개 콧대가 높기 때문에, 제 마법을 쓸데없는 일에 남용하기를 꺼렸다.
차가운 맥주를 먹고 싶으니 마법을 쓰라고 한들, 어지간히 힘의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욕이나 된통 얻어먹을 거란 뜻.
‘쩝. 동부에 있을 땐 대충 시키면 나왔는데. 그립구만.’
머지않아 급사가 내온 요리를 입에 구겨 넣은 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시발, 맛없네.’
이러니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나. 칸은 새삼스럽게 귀환 의지를 불태우며 나온 음식들을 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며칠은 굶은 것 같네요. 평소에도 그렇게 먹어요? 덩치가 커서 그런가?”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눈앞을 가리자, 칸이 고개만 까딱여 상대의 정체를 확인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왕국 동부에서 서부의 체르노 자작령까지 동행한, 호기심 많은 여자 주문쟁이.
상대를 확인한 칸은 원래 하던 일에 집중했다.
우걱우걱.
“어라. 무시당할 줄은 몰랐는데요. 나름 사이좋게 지내지 않았나요? 우리.”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는 법이오.”
“그것도 서릿골의 격언인가요?”
“비슷하지.”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될 수는 없죠. 그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냥 꺼졌으면 좋겠는데…. 칸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눈앞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일에 집중했다. 겉으로는 말이다.
‘거리는 대충 팔만 뻗어도 닿겠어. 저번에 보니까 주문 발동 속도는 빠른 편이고, 위력은 평범…. 방어막은 어떨지 모르겠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그녀와의 전투를 머릿속에서 그렸다.
이 엿 같은 세계에 야만인으로 눈을 뜬 이후로, 주문쟁이와 엮여서 좋은 꼴 본 적이 무척 드물었기에.
‘크게 어렵진 않겠군.’
칸이 식사를 마친 것은, 모든 계산을 마친 이후였다.
“그래서. 내게 무슨 용무요.”
“으음. 딱딱하네…. 적어도 술 한 잔은 권할 줄 알았는데요.”
쓸데없이 빙빙 에두르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칸이 인상을 쓰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시늉을 했다. 어서 본론이나 꺼내라는 단호한 의지표명이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사람이 급하네…….”
토라진 듯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게 퍽 앙증맞았으나, 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쁘면 뭘 하나, 주문쟁이인데.
“여기! 맥주 두 잔에 적당히 씹을 것도 가져와라!”
“어머. 사주시는 거예요?”
“원래 이런 건 아쉬운 쪽이 사는 거요. 그리고 나는 조금도 아쉽지 않은 쪽이지.”
“엑.”
쩨쩨하게 그럴 거예요? 그녀가 눈총을 쏘아댔다.
‘뭐 어쩌라고.’
그러건 말건 칸은 쥐뿔도 신경 안 썼다. 아까도 말했듯, 주문쟁이니까.
그녀는 결국, 안주 하나와 맥주 두 잔의 값을 대신 지불한 뒤에야 칸을 테이블 앞에 앉힐 수 있었다.
“제가 상상한 야만인이랑은 완전 딴판이네요. 능구렁이가 따로 없어.”
“사람이 어찌 다 똑같겠소. 그래서, 끈질기게 들러붙는 이유가 대체 뭐요?”
“음.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나만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칸은 고개를 주억여 답을 대신했다. 상대는 간악한 주문쟁이였고, 대화를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여인의 말에 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 추측이 맞다면, 당신이 그 사람이죠? 로렌의 마녀가 애타게 찾는다던 그 야만인…….”
“그만.”
주변의 이목을 의식한 칸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기어코 입 밖으로 어떤 이름을 꺼냈다.
이 서부에 와서 결코 들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별명을.
“오우거 슬레이어. 그거 당신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