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길잡이 (1)
서부 대산맥은 왕국 영토의 2할을 차지한 만큼 무척 거대한 산맥이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웃한 국가의 땅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또한 수많은 이종족을 물리치고 대륙의 패권을 잡은 인간종의 힘으로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미개척지이기도 했다.
아르곤과 모로우. 이웃한 두 왕국이 서로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들 사이에 자리한 대산맥의 존재 때문일 정도니까.
‘판타지판 나폴레옹이 있어도 서부 대산맥은 정복할 엄두도 못 낼 정도겠지.’
오랜 세월 굳혀진 다양한 마물 생태계와 험악한 산세, 지나치게 거대한 크기는 압도적으로 강한 소수의 집단이라면 모를까. 군대로 정복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현재.
칸과 아리에스는 서부 대산맥과 인접한 도시인 노르딕에서 일주일째 머무는 중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다르킨의 공방에 쳐들어가서 놈을 족쳐야 하는 거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공방에 틀어박힌 흑마법사를 조지는 일이니. 준비가 과해서 나쁠 건 없지.’
게임에서의 경험으로 추측하건대, 다르킨의 공방은 노르딕과 맞붙어있는 네카르 산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네카르 산 자체가 몹시 위험한 필드라는 것.
‘제국과 유저의 반격에 군세를 잃고서 패퇴한 다르킨이 근거지에 틀어박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소수의 강자로 결성된 토벌대가 놈을 처치한다….’
그게 제5막의 종장이었고, 미친 난이도로 유저들을 분쇄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하나하나가 적정 레벨 네임드 보스몹에 가까운 다르킨의 언데드와 산맥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을 전부 뚫어야 다르킨과의 보스전에 돌입할 수 있는데, 그 전에 입구컷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
‘그때는 네카르 산 전체가 놈의 영역이었으니까. 지금은 사정이 훨씬 낫겠지.’
그렇다 해도 여전히 빡빡한 상황이긴 했고, 칸이 생각한 네카르 산 공략에 필요한 조건은 모두 셋이다.
우선 네카르 산 지리에 해박한 길잡이가 필요했다. 마물과의 전투로 낭비되는 체력을 최소화하고, 다르킨과의 결전에 대비하여 전력을 온존해야 하니까.
물론 그 부분은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추후 다르킨 토벌전에 길잡이로 참여하는 NPC. 그자의 고향이 바로 노르딕이었다.
‘자기 고향을 끝장낸 놈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자원했다고 했었지. 엑스트라 주제에 대사가 더럽게 많아서 기억에 있던 게 다행이야.’
아르곤 왕국이 다르킨의 손에 패망하기 전부터 네카르 산을 밥 먹듯이 들락거렸다 했을 정도라니, 길잡이로는 더없이 최고의 인선이었다.
그다음엔 놈의 제자들이 끼어들 수 없는 환경을 조성, 혼자가 된 다르킨을 아리에스와 칸이 다굴치는 그림을 만들어야 했다.
마지막은…….
“배고파. 밥.”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말소리에 칸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혼자 못 시키나?”
“…….”
어딘가 짜게 식은 눈총을 보내는 아리에스를 물끄러미 받아치다, 칸이 아- 소리를 내며 돈주머니에서 은화를 한 움큼 꺼내 건넸다.
‘야만인한테 돈을 빌리는 거지 성기사라니. 세상 말세군.’
“여기. 고기 줘.”
“네에엡!”
언짢은 투로 밥을 주문하는 아리에스를 뒤로하고, 칸은 의자에 몸을 눕히듯 기댔다.
“으음. 오늘따라 술맛이 좋구먼.”
“그러게나 말이야….”
“……크흠.”
그에 반응하듯 주변에서 망부석처럼 자리를 차지한 험상궂은 남자들이 어설픈 연기를 시작했다. 누가 봐도 칸의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질리지도 않고 또 왔군.’
노르딕에 오고서 지난 일주일.
위험하기로 소문난 서부 대산맥의 네카르 산을 사냥터 삼아 활동하는 용병들답게, 노르딕의 용병들은 무척 기가 드세고 텃세도 심했다.
그런 판에 덩치 큰 야만인과 쪼그만 소녀가 나타났으니, 시비가 안 걸리려야 안 걸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 삼사십 명은 때려눕힌 거 같은데. 용병이란 것들은 질리지도 않나 보군.’
이 주점에 칸이 머무르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굳이 자리를 차지하고서 눈에 띄는 이유가 뭘까.
맞는 걸 좋아하는 그쪽 성향이어서 서성이는 건 아닐 테고.
‘슬슬 여기저기 반응이 오는 건가.’
어차피 기다리는 녀석이 올 때까지는 매일 이런 식일 터. 나중에 치워버리면 끝날 일이기에, 그쯤에서 신경을 꺼버렸다.
그때.
“노르딕아! 내가 돌아왔다─! 이 몸께서 드디어 돌아오셨다. 하하하!”
덜커덩──!
“어이……! 지랄 말고 여기 앉어!”
“저 멍청한 자식이 하필 지금 돌아올 건 뭐야……?!”
“응? 뭐라는 거냐. 잘 들리게 똑바로 말해라. 쥐새끼처럼 작게 말하지 말고.”
“이리 오라고! 미친 새끼야!”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버버- 당황한 용병들이 칸의 자리를 슬쩍 흘깃하더니, 더 이상 개짓거리를 못 하게 완전히 묶어두겠다는 듯 장한의 팔을 양쪽에서 붙들었다.
“크허헙! 거, 환영이 좀 격하구먼!”
“닥치고 마시기나 해!”
“누가 이 자식 입에 안주 좀 처넣어 봐!”
덩치 큰 용병 여럿이 달려들어 장한의 입에 씹는 안주와 맥주를 들이부었다.
그 꼴이 거진 식고문을 방불케 했는데, 칸은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부조리 현장에 눈을 돌려버렸다.
‘21세기 군대가 낳은 가장 끔찍한 고문 기술을 벌써부터 쓰고 있을 줄이야. 이 사악한 판타지 놈들….’
울컥 차오르는 옛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아리에스의 백금발이 고기 씹는 박자에 맞춰 총총- 흔들리는 도중이었다. 야무지게도 먹는구만….
그러다 시선을 느낀 건지, 우물우물 고기 씹는 걸 멈추곤 고개를 든 아리에스와 칸의 두 눈이 마주쳤다.
“……왜?”
“아니. 먹던 거 먹으시오. 키가 크려면 잘 먹어야지. 억.”
이 건방진 녀석이… 보기 좋게 잘 먹는다 싶어서 덕담 좀 건넸더니, 감히 쪼인트를 까?
분노한 칸이 눈을 부릅떴으나, 아리에스는 아예 고개를 훽- 돌려 눈도 마주치질 않았다.
마치 예전에 사춘기를 겪던 조카딸 애한테 ‘엄마를 안 닮아서 키가 쪼그만 게 참 보기 좋다.’고 말했다가 한바탕 울렸을 때랑 비슷한 상황 같은데…….
아무래도 둘 다 어려서 그런가. 좋은 말을 해도 나쁘게 알아듣는 듯했다.
‘나 때는 어른이 말하면 전부 알겠습니다, 하고 경청하는 게 기본이었는데. 쯧.’
칸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을 즈음. 목소리 큰 장한을 식고문하던 현장에서, 별안간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난장판이 벌어졌다.
“크하하하! 오늘따라 환영식이 과격하구만 그래! 나도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고 친구들!”
성인 서넛. 그것도 건장한 용병들을 짐짝처럼 매달고서 움직이는 모습은, 칸이 보기에도 퍽 놀라운 것이었다.
그냥 시끄러운 놈 하나가 왔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말이다.
“오? 잠깐. 잠깐! 못 보던 친구들이 있는데?”
칸이 장한에게 흥미를 가진 것처럼, 저를 붙잡고 늘어진 용병들을 뿌리친 장한도 칸과 아리에스를 발견하고선 흥미를 보였다.
“로브를 쓴 소녀와 야만인이라? 이거 아주 특이한 조합이구만! 무려 이십 년 경력의 용병인 이 몸께서도 처음이야!”
기어코 저지르는구나! 그런 주변 반응이 칸에게 보일 정도인데, 장한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거 완전 눈없새네.’
“흠. 그쪽 야만인 친구는 호위인가? 그렇다면 아주 탁월한 인선이군! 무지렁이들이 떠들어대는 거랑 다르게 야만인들은 아주 믿을 만한 친구들이니까!”
“미친 소리 그만하고 이리로 와! 뒈지고 싶어서 작정했나?!”
“어허! 이 친구들이! 그런 편견으로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걸 모르나?”
“골통 분쇄기라고! 골통 분쇄기!”
“자네들 아주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구먼! 사람한테 어찌 그런 흉험한 별명을 지어주고 따돌리는 겐가?”
갑자기 야만인을 주제로 벌어진 끝장토론에 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것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우물우물.”
그런 와중에도 아리에스는 옆에서 개가 짖냐는 듯. 무표정으로 열심히 밥을 먹었고, 용병들의 토론은 점차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내가 말해주지 않았나. 칠 년 전에 그린스킨 무리에게 붙잡혔다가, 대화로 잘 풀어서 밥까지 얻어먹은 적이 있다고! 이종족이라 해서 마물 취급을 해선 안 된다고 말이야!”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이 자식아. 저 야만인……. 저분의 손에 골통 깨진 녀석이 한둘이 아니야……!”
‘팝콘 어디 없나.’
야만인 얘기를 하는데 예시로 그린스킨이 나온 게 어딘가 찝찝했지만, 나름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물론, 골통 분쇄기니 뭐니 떠드는 놈의 얼굴은 기억해뒀다.
“말로는 설득이 안 되는구먼. 이 완고한 친구들 같으니…. 그럼 내 직접 보여줌세. 야만인의 소문은 모두 가짜라는 걸!”
그러다 대화가 안 통하다 여겼는지, 가슴을 쾅쾅 두들긴 장한이 칸과 아리에스가 앉은 자리로 성큼 다가왔다.
“반갑네. 친구들. 노르딕엔 어쩐 일인가?”
“네카르 산에 가려고.”
“네카르 산에? 야만인들이 말하는 용맹의 증명을 위해 가려는 건가? 그렇다면 그보다 나은 곳이 많을 걸세.”
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 생각보다 아는 게 많은데?’
‘용맹의 증명’은 서릿골의 신에게 자신의 용맹을 증명하는 행동을 뜻하는 서릿골의 미개한 전통이었다.
즉, 야만인이 아니고서야 알기 힘든 말이란 뜻….
“나 말고 다른 서릿골의 전사를 만나본 적이 있나?”
“예전에 같은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싸운 적이 있지. 용맹의 증명도 그때 들었다네. 왜 전쟁터에 왔냐 물었더니, 신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라 답하더군!”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어. 네카르 산이라면 충분히 위험한 곳이라 생각하는데. 아닌가?”
“글쎄. 자네 생각보다는 아닐 걸세. 가끔씩 마물이 범람하는 때 말고는 다른 동네랑 다를 것도 없어. 차라리 옆 도시인 바그너가 낫지. 거기는 하루 온종일 전쟁통이거든! 자네들은 무식할 정도로 아주- 위험한 전장을 좋아하지 않나?”
‘미개한 중세 놈이 누구보고 무식하다는 거야?’
칸은 눈살을 찡그렸다가, 대화를 좀 더 해보기로 결정했다.
“네카르 산의 심부. 그곳이라면 용맹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나?”
“……자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서릿골의 전사는 거짓말은 안 한다.”
이것도 서릿골의 전통 중 하나였다. 언제나 신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것. 그리고 부끄러운 행동 안에는 당연히 거짓말도 포함이었다.
물론, 칸 본인은 서릿골의 전통이니 신이니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야만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이만큼 확실한 의지표명이 없을 터였다.
“…진심이군.”
“나는 언제나 진심이다.”
장한은 흔들림 없는 칸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포기하게나. 그곳은…. 그곳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저 강대한 제국조차 토벌하는 데 애를 먹고 있는 마경과 비교되는 미개척지란 말일세.”
“알고 있다.”
“아니. 자네는 모르고 있어. 심부의 마물이 어떤 존재인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지. 예전에 심부의 마물 하나가 네카르 산을 벗어나 도시의 성벽을 두들긴 적이 있다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나?”
“나야 모르지.”
“노르딕, 바그너, 체른…. 인접한 세 도시의 용병들이 모두 놈을 잡고자 성벽에 모여들었네. 지금까지 잡힌 적이 드문 괴물이니, 살점 일부만 얻어도 비싸게 팔릴 거란 생각으로. 그 결과 모인 숫자가 삼백일세.”
장원을 가진 기사가 전쟁을 위해 병사를 차출해도 오십을 넘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하물며 전원이 용병으로 이루어진 삼백 명의 군대다. 어지간한 하급 귀족도 갈아버릴 수 있는 무력이 한자리에 모인 셈.
“신참, 중견, 베테랑 가릴 것 없이 일확천금에 혹해 모여든 탓이었지. 그렇게 성벽에 모여든 용병들은 다시 등장한 마물에게 달려들었고…….”
그 자리에서 백 명이 넘는 숫자가 죽었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주점 내의 공기가 한 층 무게를 더하는 듯했다.
아마도 그건.
이 자리의 용병들이 그때의 공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갈 셈인가?”
“당연히.”
“허어…….”
필사적으로 칸을 설득하던 장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저히 저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어쩔 수 없군. 자네의 용맹이 신에게 닿기를 빌겠네. 아니, 다 같이 건배라도 해야겠구먼.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코르디의 아들 칸.”
“그렇군. 좋아! 스스로의 용맹을 증명하고자 사지로 향하는 전사의 명운을 빌어주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장한이 밝게 웃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맥주가 가득 찬 술잔을 손에 쥔 상태였다.
“다들 잔 하나씩 들고 일어나게!”
“저 미친놈이 진짜…….”
“목숨을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지? 저 자식은.”
“어허!”
장한의 엄한 눈길에 용병들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눈치만 흘긋 보던 장내의 전원이 일어난 걸 확인한 장한은 흡족하게 웃더니, 잔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비록 만남은 짧았으나, 위험을 알면서도 무모한 도전에 나선 용감함을 높이 사네!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부디 멀쩡한 얼굴로 다시 봤으면 좋겠군! 자, 무식하지만 용감한 전사 칸을 위하여! 건배─!”
“건배…….”
흐하하하!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장한이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졸지에 무식한 전사가 된 야만인.
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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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소동으로 한바탕 시끌시끌해진 분위기가 가라앉은 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장한을 칸이 붙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쪽 이름을 듣지 않았군.”
절대 ‘일 다 끝나고 족쳐주마.’ 같은 치졸한 생각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냥 이만한 정신머리로 살아남을 놈이라면, 뭐가 돼도 될 놈이다 싶은 가벼운 마음이었다.
“나 말인가? 난 쇠망치 론일세! 친구!”
그리고… 이어진 자기 소개에, 칸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