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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14화 (14/132)

#014화. 길잡이 (2)

길잡이가 없는 상태에서 서부 대산맥을 돌아다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양한 마물의 영역이 아주 촘촘하게 들어찼기 때문.

무식하게 앞으로만 나아갔다간, 얼마 가지도 못하고 수많은 마물에게 둘러싸여 죽고 말 터였다.

실제로 제5막에서 서부 대산맥을 돌아다니다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영입해야 하는 NPC가 바로 ‘길잡이 론’이었다.

오로지 다르킨 페레야스를 향한 복수로 제 삶을 불태운 냉혹한 복수귀….

‘였을 텐데…….’

“네 이름이 론이라고.”

“그럼. 노르딕 최강의 사나이. 쇠망치 론이 바로 이 몸이지!”

“음.”

이 새끼가 정말 그 남자라고? 턱을 치켜들고 와하하- 웃는 론을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본 칸이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제5막에 나온 길잡이의 외모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두덩이가 우묵해서 진중하단 인상이 강했는데….

눈앞의 이 녀석은 경박한 아저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설마 표정의 문제인가?

경박한 표정과 행동, 말투를 덮어놓고 곰곰이 뜯어보면, 확실히 모니터로 봤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무엇보다 커다란 망치를 무기로 다루는 부분이나, 말이 더럽게 많다는 점이 겹치긴 했다.

‘진짜로……?’

“잠깐 웃지 말고, 무표정한 얼굴로 있어봐라.”

“응? 이렇게 말인가?”

“……진짜군.”

어색하게 입꼬리를 내린 론에게서, 제5막의 길잡이를 겹쳐본 칸이 자그맣게 탄식했다.

저 경박한 수다쟁이를 진중한 복수귀로 만들 만큼, 다르킨에 대한 원한이 대단했다는 얘기일 테니.

만약 다르킨이 칸을 먼저 사냥감으로 노리지 않았다면…? 칸은 다르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네카르 산을 우회해서 서부 대산맥 탐색에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

메인 퀘스트와 절대 엮이지 않겠다, 그게 칸의 행동 방침이니까.

그렇게 됐다면, 다르킨은 살아남고 이 세계에서도 론은 복수귀가 되어서 목숨을 불태웠으리라.

‘다르킨을 없애겠다 생각한 순간부터 예견한 일이지만.’

이 세계에서 칸은 지나치게 큰 변수였다.

그의 결정 하나로 수많은 미래가 변화한다.

다르킨의 죽음은 곧 아르곤 왕국의 멸망을 막는 일이고, 당연히 그가 아는 미래와는 이야기가 크게 뒤틀릴 것이었다.

그의 결정을 따라 수많은 목숨이 살아나고, 스러지는 것이다. 마치 게임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그게 칸 본인이 의도한 행동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상념을 애써 정리한 칸이 찡그린 눈을 슬며시 풀며 운을 띄웠다.

“그래. 쇠망치……. 이십 년 동안 이 동네를 거점으로 용병 노릇을 했다면, 너보다 네카르 산에 대해 해박한 자를 찾기도 어렵겠군.”

“그거야 당연한 말이지! 나만큼 경력이 긴 용병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적어도 한둘은 넘지. 칸은 속으로 지적하면서도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듣기 좋은 말을 주워섬기자, 론이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허! 사실 노르딕에서 나보다 강한 용병도 몇 없거든!”

“저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어이. 론! 뒈지기 싫으면 그 말 취소해!”

적당히 취기가 올라온 론의 얼굴이 달큰해졌다. 주변에서 성난 야유가 쏟아져도 슬쩍 웃어넘기는 게,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심부의 얘기 탓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해보려 그런 척 연기를 한 걸 수도 있겠고.

‘용병답지 않은 놈이군. 여러모로. 눈치는 없지만.’

“그만한 경력이면 몸값도 꽤 비싸겠어. 그렇지 않나?”

“그야 그렇지. 이 업계에서 경력만큼 신뢰할 수 있는 증명이 따로 없으니까 말일세.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한 일당으로 금화 반 닢은 받지.”

금화 반 닢이면 대충 하급 기사랑 비슷비슷한 수준이었다. 확실히 용병 하나의 몸값으로 내기엔 상당한 액수. 저 파멸적인 주둥이를 감당할 만큼의 실력은 있단 소리였다.

“꽤 시일이 걸리고, 위험도가 높은 의뢰는 얼마나 받지?”

“으음. 글쎄. 그것도 정확히 계산을 해봐야겠지만……. 위험도에 따라선 두 배까지도 받네. 사실 정말 위험한 의뢰는 금화를 뭉텅이로 줘도 잘 안 받는 편이고.”

“그렇단 말이지….”

하루에 금화 한 장이라. 칸이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목선과 왼쪽 아랫볼까지 이어진 흉터를 습관처럼 긁었다.

그 모습을 워낙 큰 액수에 놀란 것이라 여겼는지, 론이 흐흐 웃더니 잔을 채웠다.

“뭐. 놀랄 것도 없네. 나야 경력이 길어서 이만큼 받는 거지. 마법사 같은 경우는 신참이라도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이지 않나? 그에 비하면 용병 몸값은 딱 적당한 수준이라 봐야 해.”

“그렇군. 정했다.”

“응? 뭘 정했다는…….”

배낭을 잠시 뒤적거리던 칸이 주먹을 척- 앞으로 내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론이 어리둥절하던 그때, 사람 머리통만 한 주먹이 스르르 풀렸고 그 안에서 금빛의 덩어리들이 쏟아졌다.

차르르르….

듣기만 해도 속이 뭉근해지는 소리에 누군가 꿀꺽 침을 삼켰고, 금빛 덩어리들을 바라보는 눈들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칸이 테이블 위에 떨어뜨린 것들은 그만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선수금으로 금화 다섯 장. 일당은 하루에 금화 두 장을 주지. 무사히 일이 끝나면 선수금만큼 돈을 얹어주마.”

“…….”

“…….”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하는 론을 보며, 칸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치솟았다.

위험한 의뢰는 돈을 아무리 줘도 안 받는단 말은, 그만한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21세기의 협상 맛이 어떠냐. 중세 놈아.’

*

*

*

어느덧 밤이 무르익고, 사람으로 가득했던 주점은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보통 주점은 밤이 되면 테이블을 벽으로 밀어서 공간을 만들고, 숙박 업소로 업종을 바꾸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칸이 웃돈을 주고 통째로 빌려버린 탓에 사실상 개인 숙소에 가까웠다.

덜그럭. 덜그럭.

그 안에서 칸은 오래 방치된 탓에 냄새가 변한 샐러드를 하릴없이 뒤적거렸다.

거대한 야만인이 심통 난 애처럼 손장난을 치는 광경은 몹시 이질적이었으나, 불퉁한 입매가 현실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시끄러워.”

참다못한 아리에스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질책하는 눈빛과 함께.

하지만 돌아오는 건 반항이라도 하듯 더욱 격렬해진 덜그럭 소리였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

자기보다 어린 소녀에게 한심하단 눈총을 받았지만, 칸은 멈추지 않았다. 왜냐면 기분이 매우 언짢았기 때문에.

‘이게 안 통해?’

이유는 간단했다. 론이 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음엔 돈을 더 달라고 뻐팅기는 거라 여기고 웃돈을 얹어주겠다 했지만,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한다 답한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아니, 솔직히 기사도 거뜬히 고용할 수 있는 돈을 마다하는 게 말이 되나?

적어도 칸의 기준에서 용병이 돈을 마다한다는 건, 주문쟁이가 거짓말을 끊는단 것과 동일한 수준의 개소리였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인물이 그 개소리를 실천하고 있었다. 아주 엿 같게도.

“돈주머니를 아예 다 줘버렸어야 했나?”

“내 돈은 안 돼.”

“거, 푼돈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

“안 돼.”

칸의 돈주머니에 들어간 아리에스의 사비─은화 몇 닢이 전부인─까지 써버린다는 말에 그녀가 쌍심지를 켜고 대들었다.

‘맡아뒀다가 나중에 준다니까 그러네.’

어른이 아이의 돈을 맡아두고, 나중에 돌려주는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리에스의 손을 피해 돈주머니를 다시 챙겨둔 칸이 손장난을 멈췄다.

“어쨌거나. 일이 좀 곤란하게 됐소. 방금 그 친구만 한 길잡이가 또 있을 것 같진 않거든. 여기서 시간을 더 쓰기도 곤란하고.”

가볍게 농담 따먹기나 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속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길잡이가 없으면 계획의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가기 때문. 정 돈으로 안 되면 차라리….

‘그걸 쓸 수밖에 없는 건가.’

지금까지 통하지 않은 전적이 손에 꼽는, 최고의 설득 수단을 쥐락펴락하는 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론이 머무는 곳에 쳐들어갈 것처럼.

“쓸데없는 생각 마. 적어도 오늘은.”

“음? 아, 그러고 보니 슬슬 약속 시간이군. 그 이름이…….”

“노만. 수도원 부원장.”

“아. 기억났소. 그런 이름이었지.”

칸은 늙은 쥐새끼 베델에게 들었던 정보와 불과 몇 시간 전에 수도원의 어린 소동이 전해온 말을 떠올렸다.

부원장 노만. 노르딕의 수도원을 사실상 진두지휘하는 도시의 유력자 중 하나.

신실하기로는 제국 본단의 사제들도 한 수 접는단 소문이 있다고 했던가.

얼마 전까지 옆 도시로 출장을 나갔다가, 어제 복귀했단 소식을 듣고서 아리에스가 따로 약속을 잡았었다.

“굳이 꼭두새벽에 부원장을 만날 필요가 있나 싶긴 한데.”

“그 사람. 성기사 지망생이었어.”

“그래서?”

“만나는 게 좋아.”

칸은 영 아리송했다.

그 늙은 실권자가 성기사 지망생이었다는 게. 굳이 아리에스가 새벽부터 찾아가 인사를 해둬야 할 일인지. 확 와닿는 인과관계가 떠오르질 않았기 때문.

“칸은 그 사람 설득할 방법이나 생각해.”

“뭐……. 방법은 대충 생각한 게 있소.”

“얌전히 있어. 돌아올 때까지는.”

아리에스는 못 미덥단 말을 눈빛으로 대신하더니, 로브를 꽉 여미곤 주점 밖으로 나섰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새벽바람이 들어오는 걸 느끼며 칸은 생각했다.

‘잠도 안 자고 새벽부터 싸돌아다니는 꼴을 보아하니. 키 크긴 글렀군.’

그렇게 혼자 남게 된 칸은 모포를 대충 바닥에 던지듯 깔아두다가, 문득 론이 남기고 간 말이 떠올랐다.

“목숨을 어찌 돈으로 사고팔겠나. 하물며 남의 것도 아니고 내 목숨을. 그 의뢰는 듣지 않은 거로 하지.”

사람 목숨을 돈으로 거래할 수는 없다. 생명은 그 무엇보다 존귀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있다. 오히려 흔해 빠진 상식에 가까웠다.

애초에, 이 엿 같은 세계에선 사람 목숨이란 고작 은화 몇 닢으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에 불과하니까.

심지어 그 가격표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어서, 귀족이나 기사쯤 되면 금화 너덧 장부터 수십 장까지 펄쩍 뛴다.

아주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정육점에서 고기의 원산지와 품질로 가격을 책정하는 것과 이 세계에서 사람 목숨에 가격을 매기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이런 미개한 판타지 놈들. 사람 목숨을 뭐라 생각하는 거지? 라고.

‘예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죽음을 오가고,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는 몇 년의 삶은 그를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검을 들고 손을 벌벌 떨던 애송이가, 뒤따를 경험치와 보수를 먼저 떠올리게 될 정도로는 말이다.

그 어떤 말에도 시큰둥하게 넘어가던 평소처럼 굴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판타지 원주민 놈에게 기본적인 상식을 지적받은 듯해서.

‘기분 더럽군.’

그딴 물렁물렁한 생각으로 이 험난한 중세 판타지를 어찌 헤쳐왔는지가 의문이었다.

사실 녀석도 지구에서 온 빙의자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째 기분이 더 찝찝해졌기에, 칸은 그냥 눈이나 붙이기로 했다.

아리에스가 돌아올 때까지 좀 쉬다가 론을 다시 설득하러 가야겠노라 다짐하며.

쿵! 쿵! 쿵!

만약 누군가 주점 문을 거칠게 두들기지만 않았다면, 그러려고 했다.

쾅-! 쾅-! 쾅-!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짓씹듯 중얼거리는 와중에 더 세게 문을 두들겨대자, 칸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어떤 씹새야?’

단숨에 열이 확 뻗쳐서 손도끼를 쥐려던 칸이 멈칫했다.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던 아리에스의 말과 사람 목숨 운운하던 론의 말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기랄, 얌전히 설득해서 돌려보내야겠군.’

결국 손도끼로 향하던 손을 도로 회수한 채. 주먹을 움켜쥔 칸이 여전히 쿵쾅대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안쪽의 인기척을 느낀 듯 과격한 노크가 뚝- 하고 멈췄다.

“누구길래 이 밤에 지랄을.”

누군지 낯짝이나 보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힌 칸이 주점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문을 두들긴 것으로 추정되는 못생긴 놈 셋이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얼씨구, 쪼개?’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던 칸이 눈을 부라리며 위협을 가하려던 순간. 못난이 삼형제의 손목에서 무언가가 번뜩하고 빛을 발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희끄무레 뭉개지고, 칸은 거의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빛을 차단했다. 그와 동시에.

쒜에에엑───!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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