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야만전사-47화 (47/132)

#047화. 정의의 신 (2)

알-란자스로 가는 길에 작은 마을에서 정비할 기회가 있었지만, 일행은 굳이 그러지 않고 여정을 재촉했다.

네이아가 준비해준 보존 식량은 알-란자스에서 경계마을까지 왕복해도 충분한 양이었고, 집 내부에 축사가 같이 있는 작은 집에서 짐승과 부대끼고 자나 길에서 노숙을 하나 크게 다를 바가 없던 까닭.

“그리고 그런 작은 마을이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으려면, 그만한 수입이 있다는 소린데. 북부 전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런 게 어디 있겠나? 당연히 약탈밖에 없지.”

마을 자체가 약탈자 집단으로 변모했으리란 론의 추측도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다. 물론, 평범한 촌민 따위가 아무리 덤벼봐야 일행을 위협할 수는 없을 테지만….

‘굳이 들쑤실 필요도 없지.’

“그런데요. 알-란자스랑 알-라스델이 가까운 거리라고 했죠? 그쪽은 괜찮을까 조금 걱정이네요….”

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칸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일행이 경계마을을 떠나 이동한 지도 며칠이 더 지났다. 네이아가 보상으로 내어준 마차 덕분에 칸 일행의 여정은 조금 더 속도가 붙었고, 만약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사나흘 내에 알-란자스에 진입할 예정이었다.

얀의 걱정을 칸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긴 했으나,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는 했다.

“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알-라스델은 약탈자 때문에 난리가 났겠지만, 알-란자스는 괜찮을 겁니다. 약탈자 무리라도 정의의 신이 굽어보는 곳을 함부로 침범하진 않을 테니까.”

“마이아 아가씨의 말이 맞네. 북부의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백전후(百戰侯)도 알-란자스는 별개의 영역으로 칠 정도니. 괜찮겠지.”

“정의의 신께서요?”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신전의 신들은 교단의 본산에 주로 시선을 둔다고, 스승님께서 그러셨는데….”

“그야 그렇지. 하지만 알-란자스 수녀원은 조금 특수하네. 아니, 수녀원이 특별하다기보단 거기에 있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론은 수녀원의 원장이 어떤 배경을 지닌 인물인가를 설명했다. 용병들 사이에서 도는 뜬소문 혹은 과거 알-란자스에서 주워들은 말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성기사단 부단장이요…? 그런 분이 왜 본산이 아니라 변방인 아르곤에?”

“그거야 본인만 알겠지. 은퇴하고 고향에 눌러앉은 걸지도 모르고. 아, 그러고보니 형씨라면 들은 게 있을 수도 있겠어. 그렇지 않나?”

갑작스레 돌려진 관심에 칸이 대충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은 건 거기 수녀원장이 내 고민을 해결해줄 거란 것뿐이다.”

“뭐…. 형씨답군.”

니가 그럼 그렇지, 라는 반응에 칸이 마부석을 보고선 주먹을 움찔거렸다.

‘거기서 뭘 더 알아야 하는데.’

물론, 칸이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작 베르타를 소개해준 아리에스부터가 말주변이 부족하다 못해, 소멸 직전인 탓이 컸다. 적어도 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아리에스의 말투도 별 대단치 않다는 투였기에, 이 꼬맹이가 자기 직급을 이용해 베르타라는 수녀원장을 부려먹으려는 건가- 하는 합리적 의심으로 생각을 끝마친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하기야… 그 성기사 아가씨는 말주변이 짧아 보였으니까.”

“성기사 아가씨…? 그건 또 무슨.”

“음…. 당장 설명하긴 얘기가 길어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차차 알려주겠네. 그럼, 알-란자스에서 형씨 볼일이 끝나면 어쩔 작정인가? 북부의 이변을 조사하고 싶다곤 들었는데, 정확히 어쩔 계획인지는 들어보지 못했군.”

“아, 그건 저도 궁금했어요! 생각해두신 게 있나요? 전사님?”

“대충은.”

게임에서의 지식과 관련되어 있기에 자세한 설명은 힘들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단서들 덕분에 대충 방향은 잡을 수 있었다.

“네리아가 그러더군. 북부에 나도는 소문 중에, 현자라고 불리는 인간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고. 패망한 도시의 피난민이나, 부랑자들을 돕는 식으로.”

“현자요?”

칸의 말에 반응한 것은 얀이었다. 정확히는 ‘현자’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다. 현자라 불리는 이들은 으레 마탑의 마구스들을 뜻하는 별칭인 까닭.

“음. 저희 탑에서 나온 분들을 말하는 건 아니겠죠? 지금은 전부 동부에 계시거나, 제국에 복귀하셨을 테니…….”

“북부의 현자가 마탑의 마구스였다면, 그렇게 소문이 났겠지. 아마 소속이 없는 마법사일 거다. 어쩌면 소속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시… 에밀 자작이 말한 그 사람들일까요?”

“진리의 추종자인가 하는 그 수상쩍은 집단 얘기죠?”

마이아의 질문에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확률로 그놈들일 거다.”

“그런 집단이 있단 얘기는 총지부장한테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자들이 음지에서 북부의 혼란을 조종하고 있다니까, 뭔가 현실성이 없군요.”

“뭐, 그럴 만도 하지.”

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진리의 추종자는 향후 마탑을 무너뜨리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지만, 지금의 전력이 미래에 비해서 약한가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다르킨 페레야스 때 그랬던 것처럼, 성장을 마치지 않은 보스를 미리 처리하는 꼼수가 통하지 않는단 소리다. 현재 진리의 추종자들의 전력은 추후 등장하는 시점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테니까.

현 황제의 ‘정화의 맹약’으로 인해, 대륙의 초월자들이 대마경 토벌에 발이 묶인 지금. 최대한 힘을 비축하는 동시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일 뿐….

예정된 미래대로라면 현 황제가 승하하는 순간, 진리의 추종자를 비롯한 수많은 재앙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터.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놈들에게 이곳의 일은, 대륙 각지에서 벌이는 실험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스토리 스킵의 폐해로 인해 정확한 것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금 시기에 진리의 추종자가 마탑의 붕괴를 위해 열심히 쏘다니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 말은 즉, 아르곤 왕국에 있을 진리의 추종자는 적어도 당장 감당할 수 없는 진짜배기 초인들…. 예를 들어 마탑의 마스터나 성기사단의 단장, 제국 기사단의 배너 로드 수준의 괴물은 아닐 터였다.

진리의 추종자의 수장 격인, 초월에 도달한 그 괴물은 당연히 나타나지 못할 거고.

그만하면 승산은 충분했다.

혹시나 칸의 예상이 틀렸고, 북부에 있을 진리의 추종자가 마탑의 마스터와 같은 수준의 마법사라고 한다면….

‘그것도, 뭐. 붙어봐야 알겠지.’

“어쨌든 우선은 알-란자스다. 그 현자인가 하는 사이비는 그다음에 만나보자고.”

물론, 현자와의 만남이 단순한 만남으로 끝날지. 여느 주문쟁이들과 같이 정의의 도끼가 활약할 순간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말이다.

*

*

*

그렇게 또 며칠을 달려 일행은 알-란자스에 접어들었다.

관도에서부턴 일정 이상으로 속도를 낼 수가 없던 까닭에 마차는 느릿하게 나아가기 시작했고, 며칠 내내 마차에 틀어박혀 있느라 몸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던 칸은 아예 자기 발로 걷는 중이었다.

‘전령의 팔목 보호대’에 붙은 효과와 체력 스탯의 영향으로 단순히 걷는 정도로는 힘이 빠질 걱정은 없었기에 가능한 선택이기도 했고, 자신이 호위처럼 따라 걷기만 해도 쓸데없는 시비가 줄어들 거란 계산도 있었다.

“생각보다 더 상태가 괜찮군.”

마부석의 옆쪽을 나란히 걷던 칸이 툭- 내뱉은 감상이었다.

알-란자스에 완전히 들어선 것도 아닌데, 관도를 따라 도보로 이동하는 피난민 무리나 행상인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짐마차에 물건을 싣고 이동하는 무리가 눈에 띄었다. 현재 북부의 상황을 생각하면 강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일 텐데, 그렇다고 도적을 걱정하는 눈치가 아닌 데다가 별다른 호위도 보이질 않았다.

“저건 알-란자스에서 운영하는 상단일세. 정의의 신을 의미하는 천칭 저울에 방패 문양은 알-란자스의 귀족 가문의 문양이고.”

바로 앞에서 이동하는 특이한 마차 행렬에 칸이 관심을 가진 걸 눈치 좋게 알아차린 론이 설명을 덧붙였다.

“알-란자스 수녀원은 만신전의 신 중에서도 정의의 신을 모신다네. 그 역사가 꽤 깊은 편이고, 대대로 알-란자스를 다스리던 귀족 가문도 그 영향을 받은 편이지. 가문 문양에 신의 상징을 박아넣은 게 그 일환이고.”

“수녀원장의 영향력이 엄청나겠군.”

“흠….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건 또 아닐세. 베르타 수녀원장은 수녀원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는 거로 유명하거든.”

말만 들어보면 무척 신실한 사제라는 인상이다. 다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노르딕에서도 평판이 좋은 부원장 노만이 타락한 경우가 있지 않던가.

‘게다가 정의의 신이라면…….’

정의의 신은 만신전에서도 꽤 상위에 속하는 신격이었다.

한 손에는 천칭 저울, 반대쪽엔 단죄의 검을 쥐고서 약자를 보호하고 모든 악을 심판한다는 아름다운 여신.

하지만 정의의 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플레이어를 적대하는 것으로 커뮤니티에서 악명이 높았다. 쓸데없이 일러스트 퀄리티가 좋아서 ‘비호감 여신’이니 뭐니 괴상한 별명을 붙이고 좋아하는 마니아들도 있긴 했다만.

‘아리에스가 그 괴팍한 신의 총애를 받는다 했었지. 강신 스킬까지 썼던 걸 보면 거의 사도에 내정한 수준…….’

정의의 신이 플레이어를 적대한 이유는 엔딩 이후에도 밝혀진 바가 없었다. 어쩌면 칸이 무심코 단서를 스킵해버렸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그리고 현재.

지금의 그는 게임 시스템을 가진 플레이어면서, 미들랜드의 원주민의 육체를 가진 빙의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칸을 적대할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정의의 신이 사도로 내정한 아리에스가 칸에게 모종의 부채감을 떠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괴팍한 여신 때문에 성기사 NPC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왔던 걸 생각하면…….’

베르타라는 전 성기사가 계획과 달리 비협조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무슨 문제라도 있나? 형씨 표정이 꼭 사람 하나 족치기 직전의 그거인데?”

“…글쎄. 갑자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칸 형씨. 불안하게 그런 소리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게. 요즈음 온갖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게 형씨 쪽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드니까.”

“나는 요즘 네가 맞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다.”

“그게 무슨…… 으억!”

여느 때와 같이 론의 얼간이스러운 만담을 흘려들으며, 앞서 이동하는 상단들에 뒤를 따르다 보니 어느새 알-란자스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역사가 느껴지는, 다른 말로는 몹시 낡고 오래된 성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정의의 신을 모시는 수녀원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특색이 없는 도시라는 게 첫인상부터 확 와닿았다. 알-란자스의 귀족이 괜히 정의의 신의 상징을 가문의 문양에 새긴 게 아니라는 거다.

‘신이라도 안 팔아먹으면, 가망이 없는 도시라는 거겠지.’

그런 면에서 볼 때 알-란자스를 다스리는 귀족의 수완은 퍽 인상적인 것이었다.

만신전 교회의 영향력이 강한 제국이라면 모를까. 아르곤 왕국의 귀족이 대놓고 교회에 귀의하는 듯한 결정을 내린 건 대단히 과감한 결정이니.

결과적으로 보면 정의의 신이 알-란자스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지만, 자칫 잘못하면 왕국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극도로 축소될 수도 있을 터였다.

“뭐. 나랑 엮일 일은 없겠지.”

어쨌건 칸은 관심도 없는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라, 피의 그릇을 정화해 줄 베르타라는 전 성기사에게만 볼 일이 있으니까.

*

*

*

차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고즈넉한 수도원의 내부를 비춘다.

미약한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도실에는 정의의 신을 형상화한 조각상과 그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늙은 여사제가 하나의 정물처럼 자리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늙은 여사제는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간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 아니라면 정말 시체라 착각할 정도였다.

“…….”

그 자태는 몹시 신성하게 내비쳐서, 그녀가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저절로 느끼게 만들었다. 누군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마치 신의 뜻을 전해 듣는 광경을 엿보는 듯한 죄악감을 느끼리라.

“베르타 원장님! 어디 계세요! 원장니임…!”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늙은 여사제의 눈이 스르르 열렸다. 시력을 상실한 듯 보이는 백색 눈동자가 명확한 의지를 담고서 신상이 그려낸 정의의 신을 향했다.

“어찌…….”

다소 억눌린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러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답답함과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리란 무기력한 확신, 그리고 관성적으로 따라오는 신에 대한 믿음….

“여기 계셨구나! 어휴……! 페란 자작이 원장님을 어서 만나보고 싶다고 성화셔요.”

“그 외에 다른 소식은 또 없었니.”

노회한 외모와 달리 늙은 여사제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방금까지 목소리에 묻어나던 감정들은 어느새 수습한 뒤였다.

“네! 다른 소식은 없었는데요? 왜요? 설마 여신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내리셨나요?”

그 탓에 적갈색 머리카락을 어깨 즈음에서 똑- 잘라낸 소녀는 명랑한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마 여느 때와 같이 농담이라도 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녀의 농담은 이번엔 농담이 되질 못했다.

“그래. 정의의 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다.”

“네에? 정말이요? 직접 말씀을 내리는 건 드물잖아요.”

명랑한 소녀가 커다란 눈동자를 크게 뜨고서 놀랐다. 평소 같으면 그 채신머리 없는 행동을 혼내야 할 늙은 수도원장은 속내가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담담히 사실만을 고했다.

“……이 도시에 재액이 닥쳤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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