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정의의 신 (3)
알-란자스는 초입에서부터 느낀 것처럼 질서가 바로 잡혀 있었다.
성벽의 심사를 맡은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사람들을 통솔하고, 도시 소속의 상단이라 한들 심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거의 전시 상태에 가까운 경계. 현재 북부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보여주는 일면이다.
“……용병?”
“나 쇠망치 론이라고.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베테랑이라네. 근처 용병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이름 정도는 다 들어봤을 걸세.”
“당신이 얼마나 유명한 용병인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오.”
관문의 심사를 담당하는, 주변 사람들 입에서 ‘경계조장’이라 불리는 중년 남자는 무뚝뚝하게 론의 말을 일축했다.
“구성이 꽤 특이하시군. 용병 파티라 보기도 어려워. 여자 창잡이에 새파랗게 어린 사내 녀석. 그리고…….”
경계조장의 시선이 천천히 일행을 훑다가 칸의 차례에서 멈췄다.
“야만인. 여기보다 동쪽인 알-로렌느 지방에서 야만인 용병의 악명이 흉흉하다는 건 소문으로 익히 들었소. 마침 일행에 야만인 용병이 계시고.”
“뭐, 소문이란 게 으레 그렇지. 전부 과장되기 마련 아닌가?”
“그렇지. 소문은 죄 믿을 게 못 되지. 하지만 당신도 용병이라면 최근 북부 상황에 무지하진 않을 터요. 그런 소문을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오.”
“조장님! 검문 마쳤습니다! 안에 물자가 엄청 많아요. 거의 상단의 짐마차라 봐도 될 만큼 물자가 쌓여 있습니다!”
그때 일행의 마차를 수색하던 경비병의 외침에 경계조장이 눈썹을 씰룩였다.
“흠. 용병이 아니라 상인이셨소?”
“의뢰 보수로 챙긴 걸세.”
“얼마나 대단한 의뢰였길래, 내 수하가 놀랄 만큼 물자를 쌓아뒀는지… 아주 대단한 용병이신가 보오.”
불신을 전제로 한 비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론은 유들유들한 웃음을 유지했다. 그에게 길잡이 의뢰를 맡긴 칸이 알-란자스에 중요한 볼일이 있었던 까닭이다.
“나야 경력만 긴 시원찮은 놈이지만. 다른 일행이 꽤 대단한 편이지. 여기 야만인 형씨를 좀 보게. 오크 싸대기도 후려칠 만큼 용맹해 보이지 않나?”
“…….”
론의 말을 듣고서 칸의 몸을 이리저리 훑더니, 경계조장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크보다 흉악하게 생겼군.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면서.
“그리고 여기 젊은 친구는 마법사일세. 여기 아가씨는…….”
“용병 조합의 마이아 엘드렛.”
“엘드렛…?”
경계조장이 아리송한 투로 되묻자, 마이아는 품에서 금실로 그녀의 이름과 소속이 수놓아진 용병패를 툭- 던졌다. 칸이 ‘프리패스’라 부르는 물건을 말이다.
경계조장은 신중한 눈으로 마이아의 용병패를 살폈고, 과연 프리패스란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효과가 있었다.
“엘드렛의 성에 금패 용병이라, 확실하시군…….”
금색 용병패는 조합 소속, 그것도 수뇌부에 가까운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이었다. 유사시에 조합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다는 왕국 총지부장의 직인과도 같았다.
조합의 영향이 미치는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에선, 마음먹기에 따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도 있는 물건이란 소리다.
거기에 그녀의 성이 가진 의미도 절대 작지 않았다.
“그럼. 도시에 방문하는 이유도 공무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걸 당신에게 얘기할 의무는 없습니다.”
마이아의 엄포에 경계조장은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는 듯하다가, 흠- 하고 콧바람을 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군. 다만 명심하시오.”
마이아의 신분패를 도로 던져서 돌려준 경계조장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내뱉었다.
“괜히 엄한 곳 들쑤시지 말고, 얌전히 볼일이나 보다 떠나가시오. 북부의 혼란만큼이나, 알-란자스의 상황이 그닥 여유롭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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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씹새가 잘난 척 떠들어대기는……!”
성벽을 통과해 외성구역에 들어서기 무섭게, 마이아가 입에서 걸쭉한 욕을 쏟아냈다. 아직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아 들릴 수도 있건만, 대놓고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이다.
“뭐…. 조금 지나치게 깐깐하긴 하더군.”
“쯧. 저자가 그 수상한 집단의 인물이면 좋겠군요. 창으로 콱 찔러버리게….”
“히익!”
마이아의 과격한 발언에 괜히 놀란 얀이 다리를 오므렸고, 마이아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지 입매가 삐뚜름했다.
론은 평소엔 예의를 차리는 마이아가 실제론 얼마나 험악한지 깨달았기에, 웃으며 그녀를 어루달랬다.
“너무 그러지는 말게. 그 친구, 예전에는 본 적 없던 얼굴이었어. 아마 관문 심사를 맡은 것도 비교적 최근이겠지. 그래서 그리 꽉 막히게 나온 것 아니겠나? 북부 상황이 영 혼란스러운 것도 있고.”
“그럼 도시의 시장이 문제군요. 저런 자에게 직책을 내리다니.”
화난 자식을 달래는 부녀지간의 대화처럼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가볍게 한 귀로 흘리며, 칸은 알-란자스의 상황을 면밀히 눈에 담았다.
경계마을과 비교하면 활력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마냥 굶고 살지는 않는 듯 안색은 평범해 보였으나, 미처 숨기지 못한 그늘이 사람들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뭔가 억눌려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칸은 저들과 비슷한 얼굴을 지구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기계처럼 일만 하는 회사 양반들이 딱 저랬었지.’
아마 지구에서의 자신도 비슷했을 거고.
이제는 흐릿하게 떠오르는 자신의 얼굴에 칸이 쓰게 웃었다.
수녀원은 알-란자스의 외성구역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사람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할 수녀원의 위치가 어째서 변두리인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랐지만, 이내 정답도 쉽게 떠올랐다.
정치적인 사안인 거다.
정의의 신이 수녀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필요에 의해 정의의 신을 섬기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신을 모시는 사제까지 섬길 수는 없는 노릇.
아마 도시의 귀족이 수녀원장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취한 이런저런 조치 중 하나이리라.
“그러고 보니, 성기사 아가씨라고 했던가요. 혹시 성기사의 의뢰라도 받은 겁니까? 그래서 알-란자스의 수녀원을 찾은 거고?”
아직도 그걸 신경 쓰고 있었나. 칸은 마이아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의뢰가 아니라, 보수를 받으러 온 거다.”
“보수…? 아르곤에서 성기사의 의뢰를 받았다는 말입니까?”
“대충 그 비슷한 거지. 의뢰라고 확실하게 얘기한 적은 없지만.”
칸의 무덤덤한 답변에 비해 마이아는 놀란 얼굴이었다.
‘당연한 반응인가.’
만신전 교회는 만신전 소속이 아닌 신격을 모두 부정하니까. 자기들의 민족신을 숭배하는 야만인들은 사실상 이단과 같은 취급이었다.
특히 일선에서 이단과 악마들을 상대하는 성기사들은 그러한 경향이 더 강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성기사가 야만인에게 도움을 청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당신 정도의 전사라면 체면 불고하고 조력을 부탁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 어떤 일이었길래?”
“성기사들이 하는 일이 그게 그거지. 흑마법사 대가리 쪼개는 거 말고 뭐가 더 있나.”
“흐흐. 아주 엄청난 흑마법사였지. 난 아직도 거기서 살아남았단 사실이 얼떨떨하네. 자네도 그렇지 않나? 얀.”
“어……. 저는 정신없이 주문을 써댔던 것만 기억나서요. 그래도 마지막에 전사님은 정말 대단했죠. ‘위대한 용사’가 떠올랐을 정도로요.”
시답잖은 소리를.
얀의 헛소리에 칸이 얼굴을 찡그렸다. ‘위대한 용사’는 그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신화적 존재들로부터 파생된 초월종들이 미들랜드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시기.
인류 역사상 최절정기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성했던 고대 문명의 인간들은 초월종들에게 변변히 대응조차 못 하고 밀려나야만 했다.
그런 인류를 구원한 것이 바로 ‘위대한 용사’다.
‘…라는 게 미들랜드 퀘스트의 세계관 설정이었지.’
그야말로 판타지 세계관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용사다. 그런 그림에 그린 듯한 용사가 정말 존재했는가에 대해선 의구심이 남는다만-.
‘용사 장비도 있으니까 마냥 구라는 아니겠지. 만신전도 인정했고.’
뭐, 위대한 용사가 실존 인물이냐는 건 칸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용사란 직함을 가져다 대는 것이 불만일 뿐.
어떻게든 이 엿 같은 세계를 버리고 지구로 돌아갈 궁리나 하는 가짜 야만인이 용사는 무슨….
“그딴 헛소리는 거기까지만 해라. 슬슬 수도원이 보이니까.”
그 말대로였다. 저마다 떠들던 일행도 입을 닫고서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를 홀로 차지한, 밤에 찾아온다면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법한 낡은 수도원.
그곳 주변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제복 차림의 어린 소녀들과 노인의 얼굴이지만 주름살 하나 없는 정정한 자세의 노인.
여기까지 지나치며 봤던 알-란자스 사람들과 달리,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마치 저 수도원 주변만이 북부의 혼란과 격리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정의의 신이 굽어살피는 성소라…….”
감상을 툭- 하고 내뱉은 칸이 성큼성큼 일행의 가장 앞에 나섰다.
그 기척을 어떻게 느낀 걸까. 허리가 꼿꼿한 노인이 칸 일행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닮은 노인의 탁한 백색 눈동자와 칸의 잿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
“…….”
두 쌍의 시선이 맞부딪치는 가운데. 노인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어린 수녀들이 잇달아 하던 일을 멈추고 노인이 바라보는 곳으로 몸을 돌린다.
“힉!”
“어, 언니. 오크 피부가 회색이에요……!”
“멍청아! 저건 오크가 아니라 야만인이라는 거야. 일로 와!”
다른 일행들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일반적인 대륙인과는 덩치에서부터 큰 차이가 나는 칸을 보며 어린 소녀들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평소 같으면 그 꺅꺅- 대는 소리에 눈이라도 찡그렸을 칸이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사소한 소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다르다.’
노인 같지 않게 멀끔한 얼굴, 꼿꼿한 자세와 대비되는 탁한 눈동자. 그것들도 물론 저 늙은 사제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특징이지만, 칸이 느낀 건 다른 부분이었다.
저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무형의 기세가 칸을 옭아매고 있었다. 분명 칸의 간단한 손짓조차 버티지 못할 노인이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노인이 자신의 손에 죽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질 않았다.
“형씨? 왜 갑자기 그러고…….”
“너희는 하던 일을 계속하렴. 나는 저 손님들을 맞이해야겠구나. 할 수 있니?”
침묵을 깬 론의 말을 가로채듯, 노인이 겁에 질린 소녀들을 추스렸다.
칸은 방금 자신이 느낀 게 무엇인지, 내심 곱씹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리둥절한 일행들도 그를 뒤따랐다.
“칸이오. 아리에스가 기별을 넣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아이가 말한 사람일 거라 생각은 했어요. 회색 피부의 야만인…. 사실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들겠지요.”
“들어가도 되나?”
노인…. 전 성기사단의 부단장인 베르타가 고개를 주억이곤 말없이 등을 돌렸다. 칸은 일행들에게 알아서 시간을 때우라 이르고선 그녀를 따라 수녀원 안쪽으로 들어섰다.
터벅- 터벅-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많이 놀랐답니다. 그 아이가 숙원을 성공적으로 이룬 것은 분명 반길 일이지만,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서… 당신에게 도움을 달라 부탁했으니까요. 원체 자기 생각을 내비치는 법이 없는 아이라 더 그랬죠.”
“까탈스럽기도 하고.”
칸의 짧은 말에 베르타는 후후- 온화한 웃음을 터뜨렸다.
“까탈스럽다라….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걸 정말 싫어하는 아이였는데 말이지요.”
“폐를 끼치진 않았소. 다만 어린 조카를 돌보는 기분이라 조금 번잡스럽긴 했지. 예전부터 애랑은 잘 안 맞았거든.”
“제 생각에 당신은 훌륭한 보호자예요.”
“사람 머리를 반쪽 내는 흉악한 야만인도 보호자라 할 수 있나?”
“천하의 둘도 없을 악인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부모인 법이죠.”
‘거, 혓바닥 한번 유연한 노인일세.’
어째 말려드는 기분에 불편함을 느낀 콧잔등을 찡그렸다.
“자, 들어오세요. 사정이 안 좋아서 뭘 내드릴 수는 없겠지만.”
“괜찮소. 고블린 피도 물처럼 마실 수 있으니까.”
“굳이 마음 써서 그런 농담까지 해주지 않아도, 간단한 차는 내드릴 수 있답니다.”
농담 아닌데.
전사의 시험이랍시고 서릿골에 홀몸으로 내던져진 시절에 그는, 마실 게 없어서 고블린 피를 물 대용으로 썼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물이 없다고 독을 마시는 것과 동일한 미친 짓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더랬다.
야만인의 몸뚱어리가 아니었다면 피똥을 지리다 뒈졌을 거라는 것도.
뒷머리를 긁적인 칸이 아무렇게나 자리에 풀썩- 앉았다. 낡은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고, 베르타는 금새 마실 것을 준비해 칸의 앞에 내려놨다.
“대충 필요한 건 들었어요. 정화가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이거요. 다르킨 페레야스의 시체에 떨어진 물건이지.”
칸은 그동안 애지중지 챙겼던 피의 그릇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베르타는 사람 눈알 크기의 붉은 구슬처럼 생긴 피의 그릇을 잠시 살피더니,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크게 어렵지 않아요. 다만 이쪽에서도 사소한 부탁이 있는데….”
“부탁?”
이 노인네가 장난하나. 보수를 받으러 왔더니 역으로 뭘 내놓으라는 태도에 칸의 입가가 삐뚜름해졌다.
그 표정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낀 건지, 베르타가 손사래를 치며 설명을 덧붙였다.
“딱히 어려운 부탁은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랑 대화하길 원하는 분과 잠깐 대화만 해준다면, 충분하답니다.”
“대화?”
칸은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대화 한 번 나누는 게 뭐 어렵다고.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결정을 후회했다.
‘이건……!’
베르타와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낀 존재감이 단숨에 폭발하듯 불어난다. 본능적으로 도끼를 움켜쥐려다, 이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나랑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게……. 당신이었소?”
[건방지구나. 전사신의 어린 대전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