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호드 (3)
평면에 주변 지형을 나타내주는 지도 기능이나, 진행 중인 퀘스트의 목록과 구체적인 방향성을 알려주던 퀘스트창, 사소하게는 남은 HP와 MP를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내는 상태 게이지 등등….
미들랜드 퀘스트의 세계 속으로 빙의한 이후. 기존에 존재하던 게임 시스템 중 일부는 비활성화되어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개중에서도 가장 없어져서 아쉬운 기능을 꼽으라면, 칸은 단연코 인벤토리 기능을 꼽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게임에선 대충 칸 수에 맞춰서 인벤토리에 쑤셔 박기만 하면 캐릭터가 알아서 주렁주렁 들고 다녔는데 현실에선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싸울 때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들고 다니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런 상황에서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는 정말 가뭄에 내린 비와 같았다.
지금이야 론이 길잡이와 짐꾼 노릇을 병행하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그와 동행할 생각은 아니었던 까닭.
우우웅.
탐욕의 그릇에 의식을 집중하자 오른손 앞쪽 공간이 열리는 게 느껴진다.
이전처럼 가슴팍 앞에 고정된 게 아니라, 의지에 따라선 신체 어느 부위든 공간을 열 수 있게 되었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다.
다만 정신을 집중하고 공간이 열릴 때 존재하는 딜레이는 아직 어쩔 수 없었는데, 칸은 점차 익숙해지면 이것도 해결되리라 여겼다.
‘사실 인벤토리 용도로만 써먹어도 충분하지. 공간이 바로 열리게 하려는 건 순전히 내 욕심이고.’
서브컬쳐에 익숙한 게이머들이라면 모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할 게 틀림없었다.
아공간에서 쏟아지는 무기로 하는 공격은, 그야말로 낭만 아닌가.
“칸! 부탁한 거 전부 가져왔어요!”
멀리서 들려오는 명랑한 목소리에 아에카리스의 주머니를 닫은 칸이 고개를 돌렸다.
밝은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뜀박질에 맞춰 총총- 흔들린다. 칸의 부탁을 받고 나머지 일행들과 도시를 돌아다닌 엘레나였다.
“왜 혼자냐.”
“일행분들은 수녀원에서 쉬도록 제가 조치했어요. 그 재액이란 걸 생각하면, 언제 사건이 터질지 모르니까요. 몸 상태는 신경 써야죠.”
며칠 전에 비하면 꽤나 편한 말투였다. 이 또한 지난 며칠의 눈물겨운 설득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읏차.”
엘레나가 두 손에 커다란 짐보따리를 꼬옥 쥐고서 칸의 앞에 쪼르르 다가왔다. 제 몸의 절반만 한 짐덩어리가 무겁지도 않은지, 발걸음이 퍽 가벼웠다.
‘뭐. 나중을 생각하면 놀랄 것도 아닌가….’
사제 주제에 사람 머리통만 한 철구가 달린 플레일을 휘둘러 흑마법사의 골통을 깨부수던 별종이 바로 여신의 천칭이니까.
어릴 적부터 어지간한 전사 못지않게 단련을 해왔던 것이겠지.
“물건은.”
“제대로 준비했죠! 도시의 대장간에서 무기들을 싸게 매입해오라는 거였죠? 선별은 론 아저씨가 전부 도맡았어요.”
“…그 녀석이라면 뭐. 괜찮겠지.”
“근데요. 이것들은 다 어떻게 쓰시려고요? 전부 들고 다니기엔 좀 많은 것 같은데…….”
보따리 안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가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전부 다루기엔 지나치게 다양한 종류였고, 일행의 규모를 생각하면 들고 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한 양.
“원래 무기 종류가 다양해야 진짜 낭만이거든.”
“네? 낭만이요……?”
“그런 게 있다.”
어차피 알아먹지도 못하겠지.
설명 대신, 그녀가 가져온 무기를 통째로 아에카리스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어? 뭐예요?”
엘레나의 눈망울이 놀라움을 머금는다.
눈앞에서 십수 자루가 넘는 장비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공간 전이…?”
엘레나는 얀과 달리 아공간을 열 때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얀에게 듣기로는 공간이 열리는 순간, 마나의 공백지대가 일시적으로 생긴다고 하던데….
‘그게 뭔 개소리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론이나 마이아는 물론, 엘레나까지 느끼지 못하는 걸 보면. 단번에 알아챈 얀의 경우가 비정상적이라고 봐야하리라.
“그 비슷한 잔재주지. 그래서, 뭔가 특이한 일은 없나 알아보기로 한 건?”
“그것도 나름 알아보려 했는데요. 크게 신경 쓰이는 소문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나마 쓸만한 정보는 도시의 상단이 알-라스델의 폐허를 뒤지고 왔다는 것 정도? 피난민도 그쪽에서 추가적으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래요.”
“영주가 살아있는 시체가 됐다는 곳이군.”
덧붙이자면, 경계마을을 습격한 마적 두목이 뒤통수를 치고 나온 도시이기도 하다.
“네. 지금 수녀원에 들어온 애들 중 몇은 알-라스델 출신이거든요. 걔네는 설명하는 걸 꺼려하는 눈치인데… 베르타가 하는 말로는 도시 전체가 내란으로 패망했대요.”
“다른 소문은 또 없나? 웬 수상한 마법사가 끼어들었다느니, 하는 거.”
“아뇨?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베르타한테 물어볼까요?”
“아니…. 됐다.”
과거에는 굳이 거론하지 않았으나, 칸은 마적 두목이 사용한 ‘마검’에 대해서 잊지 않고 있었다.
그건 도시의 내란으로 궐기한 마적 두목 따위가 입수할 수 있는 종류의 무기가 아니었다. 아엘로스의 불새가 각인된 것도 그렇지만….
‘분명, 피를 흡수한 대가로 능력치를 올려주는 종류의 저주를 썼었지. 마치 드라우프니르처럼.’
하지만 놈이 든 마검은 드라우프니르가 아니었다. 비슷한 기능을 집어넣은 모조품이라 봐야겠지.
당연하지만, 그 출처는 진리의 추종자일 터.
칸의 의문은, 알-라스델의 패망에 놈들이 어디까지 관여했는가였다.
도시의 시장이 살아있는 시체가 되고, 시장을 배신한 기병대장이 마검의 복제품을 들고서 마적 행세를 하고, 두 행동 사이에 무슨 목적이 있는지도 여전히 의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피난민들 사이에 조금 특이한 소문이 돌고 있나 봐요.”
“특이한 소문?”
“네. 여러 종류의 마물들이 다 함께 몰려다닌다나?”
“……더 설명해봐라.”
칸이 얼굴을 미세하게 굳히고, 엘레나는 칸이 관심을 가진 것에 기뻤는지 싱글거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알-라스델은 아니고. 더 멀리 있는 마을 출신의 피난민이 한 말이에요. 원래는 서로 적대하는 게 정상인 마물들이 함께 행동하는 걸 봤대요. 워낙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헛소리라 생각했는데…. 신경 쓰이는 게 있나요?”
당연히 있지. 칸은 속으로 욕지꺼리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론은 뭐라고 안 하던가?”
“네. 론 아저씨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어요.”
“그렇지. 불가능한 일이지…. 보통은.”
정의의 신이 말한 재액이 이 뜻이었나….
만약 그의 추측이 맞다면, 도시 전체가 움직여야 할 상황이 닥친 게 확실했다.
엘레나에게 그 피난민을 데려와 달라 부탁한 칸이 수녀원의 뒤뜰을 벗어나, 베르타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은 힘드오. 물자를 수색해서 충당하는 것도 한계…….”
“그렇다고 한들. 저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아니랍니다.”
“답답한…! 누가 그대더러 교회를 나오라 했는가. 수녀원 자체를 좀 더 안전한 곳에 옮긴다 생각하면 될 일이거늘!”
마침 선객이 있는 듯, 혼자 휴식을 취해야 할 베르타의 방에서 낯선 목소리와 함께 베르타의 지친 목소리가 같이 들렸다.
“들어가겠다.”
벌컥-
베르타가 휴식을 마다하고 만날 상대가 누구일지는 뻔했다. 도시의 수뇌부 중 누군가겠지. 칸은 무례가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침없이 안에 들어섰다.
안에는 피곤한 안색의 베르타와 고급스러운 의복에 갈색 케이프를 두른 장년인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야만인?”
장년인은 갑작스러운 난입자를 질책하려다, 그 정체가 거구의 야만인이란 걸 깨닫고 원래 하려던 말을 완전 까먹은 듯 베르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베르타 경.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 양반은 누구요?”
“도시의 귀족…. 페란 자작입니다.”
“베르타 경?!”
장년인, 페란 자작이 경악하며 몸을 벌떡 일으킨다. 자신의 물음이 아닌, 야만인 따위의 물음에 먼저 답하다니?
야만인이 정의의 신을 모시는 수녀원에 대뜸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인데, 전직 성기사단 부단장이었던 베르타가 이교도인 야만인을 정중히 반겼다는 일이 더 믿기 힘들었다.
정작 상상하기도 힘든 환대를 받고도 야만인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성큼 방안으로 걸어와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마치 귀족인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눈 뜨고 뺨이라도 얻어맞은 양 페란 자작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의원이 휴식을 취하라 권고한 걸 무시하긴 했다만….’
그 대가가 이런 장난 같지도 않은 꿈이라면, 자신이 정말 죽을 때가 됐다는 뜻이겠지. 물론, 이 상황은 꿈이나, 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상황을.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소? 내가 이 무례함을 이해할 수 있게.”
어지간한 귀족이라면 일단 분노하며 무례를 질책함이 옳겠으나, 페란 자작은 그러지 않았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베르타의 권위가 그만큼 높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야만인의 흉악한 외양이 두려워서인지는 자작 본인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이분은 북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만신전에서 고용한 전사이십니다.”
“…더 이해하기 힘든 소리로군. 만신전이 야만인을 칼잡이로 고용했단 말이오?”
“예. 정확히는 정의의…….”
“칼잡이 고용하는 데 인종이 중요한가? 잘 죽이는가만 따지면 된 거지.”
베르타의 말을 끊듯이 나선 야만인의 행태에 페란 자작이 눈을 씰룩였다.
“물론, 칼잡이는 실력이 중요하지. 하지만 실력에 상응하는 신용 또한 중요한 법이다. 야만인. 그런 면에서 너희 족속들은 영 신용할 수 없는 칼잡이들 아닌가. 오로지 더 격렬한 전장과 명예로운 죽음을 좇는, 싸움에 미친 족속들이니.”
“…뭐.”
할 말 없게 만드네, 새끼. 칸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가운데. 페란 자작의 고개가 베르타를 향했다.
“우선, 경이 용인하고 있는 건 확실하니 내가 굳이 따지고 들진 않겠소. 만신전 교회도 사정이 있겠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단히 신실한 교도신가 보군.”
“신을 믿는다고 돈이나 식량이 줄어들진 않는다. 오히려 늘면 늘었지. 신을 믿을 이유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비슷한 맥락으로.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건 그 자체로 큰 손해다. 네놈의 볼 일은 내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을 거다. 야만인.”
단호한 축객령이다. 말버릇처럼 손익을 계산하는 걸 보면, 예정에 없던 야만인과의 대화 자체를 낭비라 생각하는 듯했다.
도시의 경영자보단, 상단의 주인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걸 보면, 연기라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재밌는 놈이군.’
칸은 눈앞의 페란 자작이 이 엿 같은 중세에서 드물게 신뢰할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라 생각했다. 이익만 제대로 안겨주면 된다는 얘기니까.
“무슨 볼일이건, 이쪽 얘기를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 거다.”
“……?”
칸의 의뭉스러운 말에 페란 자작이 관심을 보였다.
“칸. 들어갈게요!”
마침 꾀죄죄한 몰골의 중년 여인을 대동한 엘레나가 방에 들어섰다. 페란 자작은 수녀원의 어린 소녀와 피난민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나타난 것에 의아함을 느꼈으나, 잠자코 얘기를 들어보기로 한 듯 침묵했다.
“저한테 얘기해주셨던 거. 그대로 이분들에게 전해주면 돼요. 어려워 말구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중년 여인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면면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위축된 모습이었으나, 엘레나의 다독임에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저는 알-라스델 인근의 언덕 마을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알고 있소. 볕이 몹시 잘 들어서 추운 날에는 도시의 귀족들이 마실을 나가곤 했지. 북부가 이 꼴이 되기 전에는….”
“예, 예에. 맞습니다. 그리고 시야가 확- 트인 풍경을 좋아하는 나리들이 많으셨죠. 그런데 알-라스델이 그렇게 되고 나선 마을도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제각기 연고가 있는 도시로 피난을 갔고, 저는 연고가 따로 없는 몸인지라 가까운 알-란자스에…….”
“간략히. 요점만 말해주시겠소?”
“아, 예…! 제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이상한 걸 봤습니다. 여러 종류의 마물들이 어슬렁거리는 걸 말입니다. 처음엔 마물끼리 영역 다툼이라도 하는 거라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다투기는커녕 같이 움직이더군요…. 제가 배움이 짧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빈번하게 서로 다투는 걸 본 마물끼리도 함께 다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나리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그녀의 긴 설명을 차분히 경청하던 페란 자작이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믿기 힘들군.”
“나, 나리. 정말입니다. 정말이요……!”
“그래. 당신이 진심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소. 문제는 그 내용이지. 서로를 천적으로 여기는 놈들이 동족인 것처럼 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그쪽이 헛것을 봤다 여기는 것이 당연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 테지.”
단호한 말투에 주눅이 든 중년 여인이 고개를 떨구었고, 페란 자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라스델의 물자 중에 회수하지 못한 게 있다고 하니, 겸사겸사 조사단을 보내긴 하겠소. 그러면 충분한가? 그리고 야만인. 이런 믿기 힘든 증언이나 들려주려고 내 시간을 빼앗은 건가?”
“믿기 힘든 증언이라…….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호드는 제국 밖에선 좀처럼 볼 기회가 없을 테니까.”
“호드…?”
갑자기 등장한 생소한 단어에 페란 자작이 눈을 치켜떴다.
“본래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놈들끼리 한 무리처럼 다니는 걸 두고 호드라 한다. 그리고 호드가 발생하는 원흉은 정해져 있지.”
격이 낮은 마물들을 대상으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존재이자, 최근 칸과는 유난히 인연이 깊은 생물과도 연관이 있는 개체.
“아룡이다. 아무래도 용 찌꺼기가 나타난 모양이야.”
마치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앞에 둔 사냥꾼처럼, 칸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