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호드 (4)
“아……. 빨리 교대하고 싶다. 육시럴, 높으신 분들은 왜 근무를 이딴 식으로 짜는 거야?”
“갑자기 순찰 범위를 늘리지 않았나. 뭐, 어쩔 수 없는 조치지. 그 높으신 분이 융통성이 더럽게 없다는 점도 문제겠지만.”
“아. 우리 신참 조장님? 도시민 출신이 아니라 그런가. 머리가 꽉 막힌 구석이 있긴 하지.”
알-란자스의 성문을 지키던 사내 둘이, 직속 상관의 뒷담화를 주제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허구한 날 무섭게 눈 부라리면서, 우리가 똑바로 일하나 감시하는 것도 열 받아. 게다가 적당히 통과시켜주면 될 걸 더럽게 까탈스럽게 굴잖나?”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기강을 잡겠다는 거겠지. 그래도 전 조장이랑은 다르게 농떙이는 안 피잖냐. 조장 자리에 앉고도 맨날 성문에 출근하는 작자는 그 양반밖에 없을 거야. 꼭 자기가 검문을 봐야 하는 것처럼…….”
“누구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신나서 떠들던 사내가 헙- 입을 막는다. 그러나 이미 늦었음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조, 조장님. 그게 아니라….”
한창 입방아에 오르고 있던 당사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분명 오늘은 별개의 일로 성문에 없을 거라더니! 사내의 원망스런 시선이 곁의 동료를 향했으나, 동료는 이미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양 딴 곳을 보고 있었다.
“근무 똑바로 서라. 성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럴 때 괜히 근무태만이라는 소리가 시장님 귀에 들어가면, 너희 목이 달아날 거다. 어쩌면 내 자리도 무사하지 못할 거고.”
“네, 네엡……!”
사내는 생각보다 질책의 수위가 낮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의아한 눈으로 자기 상관을 위아래로 훑었다.
빈틈 하나 엿보이지 않는 딱딱한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이 재수가 없었는데, 무장이 달랐다.
평소 근무 때 입던, 위압감을 주기 위한 겉멋용 갑옷이 아니었다.
가죽 갑옷에 체인 메일을 덧대 방호력을 보완하고, 철제 건틀릿과 각반을 단단히 고정한 조장의 모습은 경비병보단 노련한 용병 같았다.
“조장님 그 옷은…? 어디 멀리 순찰이라도 가십니까?”
“…순찰이라면 순찰이겠지. 아니, 사냥이라 하는 게 맞나.”
“예?”
영 의뭉스런 말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조장이 엄지로 뒤쪽을 척 가리켰다.
“야, 야만인?”
경비조장이 가리킨 방향, 성문 안쪽에서 마침 걸어 나오는 야만인을 본 사내가 당혹감을 드러낸다.
처음 검문 당시, 조장과 야만인 일행 사이에 적잖은 말다툼이 있던 걸 떠올린 까닭이다.
괜히 마주쳐서 좋을 게 없으리라. 그렇게 판단한 사내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때였다.
“쓸데없이 먼저 가기는…. 어차피 성문에서 같이 출발할 거였으면, 자작의 저택에서부터 같이 와도 됐을 텐데.”
“쓸데없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수하들을 점검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텐데?”
“저, 저…! 그냥 따로 가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뒤통수나 안 치면 다행이지!”
붉은 머리카락을 어깨선에 맞춰 정리한 창잡이, 마이아가 금방이라도 욕을 쏟아낼 듯이 눈을 부라렸다.
물론, 무뚝뚝한 인상의 경비조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 싸가지 없는 자식…!”
“어차피 내 역할은 알-라스델과 언덕 마을의 순찰이다. 너희는 너희의 할 일을 해. 그럼 서로 껄끄러워질 일은 없을 테니. 너희는 내가 없다고 경계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경비조장은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걸음을 옮겼다. 그 무심한 태도가 마이아의 성질을 더 자극했다.
평소처럼 론이 그녀를 다독이고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창을 뽑아 들지 않았을까.
‘…정상인이 없군.’
칸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숫제 발작하기 시작한 마이아를 겨우 억누르고 있던 론이 절실한 눈빛을 보내왔다. 이 녀석들과 아룡이 자리 잡은 곳을 찾아가야 한다니….
“칸. 저는 준비 다 끝났어요!”
그때 명랑한 목소리가 일행의 이목을 단숨에 빼앗는다. 칸의 단호한 권고에 따라 호칭과 말투가 처음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엘레나였다.
짧지 않은 여정이기에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양갈래로 깔끔히 정리한 엘레나는 평소처럼 검정색의 수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칸은 눈썰미 좋게 그녀의 수녀복이 조금씩 부풀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성기사처럼 신성갑주를 가진 게 아닌 까닭에, 수녀복 안쪽에 갑옷을 받쳐입은 것이 분명했다.
특히 허벅지 부근이 둥그렇게 부푼 걸 보면…….
“왜요? 나 어디 이상한가?”
“…안 이상하다. 우리도 슬슬 가지.”
이동은 도보로 이루어졌다. 멀쩡한 마차나, 페란 자작의 마구간에 남아도는 군마를 이용하지 않고 굳이 도보를 택한 건 칸의 의견이었다.
“호드가 있을 땐, 탈 것은 금물이다. 어디서 어떤 해괴한 놈이 습격할지 모르니까. 어차피 금방 망가져. 게다가 고작 며칠 거리에 자리했으니 슬슬 이 부근도 안전하진 않을 테고. 상대가 날아다니는 쪽일 수도 있거든.”
물론, 전부 게임에서 몸소 겪고 깨달은 팁이었다.
“아니, 시벌. 아무리 그래도 난 아직도 믿기 힘들구먼…. 용이라니. 나는 살면서 아르곤에서 용이 나타났단 소문은 듣도 보도 못했네.”
“한 번도 없나?”
“뭐, 가끔 헛소문은 있었지. 진짜 그랬던 적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번도 없네. 애초에 용일세! 용! 흔하게 보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용이 아니라 아룡이다. 옛적에 사라진 진룡이 흘리고 간 찌꺼기 같은 것들.”
엄밀히 말하자면, 미들랜드 대륙 사람들이 입에 담는 ‘아룡’이란 거대한 도마뱀을 칭하는 대명사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정말 아룡이라 불릴 만한 놈들은 많지 않지. 특히 용혈을 품은 놈들은 더….’
“저는 아르곤에 아룡이 나타난 적이 없다는 말이 더 신기하네요. 오히려 제국에선 오우거보다 흔하거든요. 종류도 워낙 다양한 데다가 연구 가치도 꽤 높아서 마탑이 종종 시체를 매입하기도 해요. 저도 스승님 따라서 본 적이 꽤 있고요.”
“제국의 초인들 중엔, 와이번을 탈 것처럼 부리는 기사가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자와 그자 아래로 모인 기사들 전부 용기사라 불린다던가. 아버지가 부럽다는 듯이 말하는 걸 엿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시부럴. 와이번이면 엄청 유명한 아룡이잖나. 그걸 사람이 말처럼 타고 다닌다고……?”
론이 황망함이 묻어나는 투로 중얼거렸다.
성벽조차 무너뜨리는 오우거와 비견되는 와이번을 어떻게 하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끔찍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우리가 가는 곳에 있는 놈이, 와이번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말해주게.”
절절한 애원에 칸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뭐가 있을지는 직접 가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 어쨌거나 칸이 할 일은 간단하다. 족친 후에, 단서를 얻는다.
설령 론의 상상대로 와이번을 상대하게 되더라도, 그건 변치 않았다.
‘어차피 어느 정도 대비도 해놨고…….’
물론, 위험성을 생각하면 와이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
다만 이 엿 같은 미들랜드에선 최선보다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옳다.
어차피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사건이 터진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왔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쯧. 생각보다 이른 것 같은데.”
“뭐가 이르다는…….”
“앞에! 마물 무리예요!”
뜻밖에도 일행 중에서 칸의 다음으로 이변을 알아차린 건 엘레나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리고, 연약하게만 보이는 수녀의 동행을 허락했나 내심 의아해하던 일행들이 제각기 놀란 반응을 내비쳤다.
“칫!”
그리고 일행과 멀찍이 떨어져 나아가던 경비조장은 진작에 전투 준비를 마친 뒤였다.
마치 길잡이처럼 칸 일행의 앞쪽에서 묵묵히 걷던 도중, 별안간 들이닥친 습격에도 그는 크게 당황하지 않은 눈치기도 했다.
“저거 도와줘야 하지 않겠나?!”
“알아서 할 겁니다. 그보다는 포위를 뚫을지, 완전히 소탕을 목적으로 할지 정해야 합니다!”
마이아의 말에 칸은 습관처럼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것들 다 족쳐도 경험치는 쥐꼬리만큼 줄 텐데.
당장 습격한 마물들은 고블린이나, 코볼트처럼 지능이 낮은 대신 개체 수가 많은, 저급한 마물이 주류였다. 문제는 그 숫자가 눈에 보이는 것만 물경 칠, 팔십이 넘는단 것이다.
‘쓸데없이 힘만 빼겠지. 앞으로 이런 습격이 몇 번이나 있을지도 모르고…….’
이것이 호드의 까다로운 점이었다.
용의 지배력에 이지를 빼앗긴 마물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광전사처럼 달려드는 데다가, 숫자도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체력과 마나를 상당히 소모한 채로 보스전에 돌입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죽으면 재도전하면 그만인 게임과 달리, 현실은 목숨 원 코인. 리얼 로그라이크 X망겜이었으니까.
‘부상도 그래. 게임이야 HP 좀 깎이고 말겠지만, 현실에선 상처가 곪거나 해서 자칫 불구가 될 수도 있다.’
다굴에는 장사가 없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지.
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서 한 손에는 도끼를, 나머지 한 손에는 드라우프니르를 쥐었다.
[감히…! 이 위대한 용살검으로 저따위 잡것들을 베겠다는 것이냐!]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불만만 씨부리는 마검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칸이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쿠웅.
진각의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앞쪽에 돌출된 경비조장을 향해 달려들던 마물들이 멈칫하고 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돌파냐, 소탕이냐…. 그거야 정해져있지.’
게임에선 잡몹 취급이나 받는 마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칸이 씨익- 웃는 것과 동시에 도약 스킬을 발동했다.
“당연히, 둘 다 해야지.”
체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할 기회잖아? 이거.
*
*
*
마물 호드의 포위망을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경비조장은 뜻밖에도 여유롭게 버티고 있었다.
“키에엑!”
푸욱─.
후방을 덮치던 고블린의 목을 경비조장의 검끝이 부드럽게 파고든다.
그러면서 미끄러지듯 몸을 뒤로 빼내자, 자연스레 움직일 공간이 생겨난다.
마물에게 사방이 둘러싸였다고는 믿기 힘든, 일개 경비조장의 솜씨라기엔 지나치게 매끄러운 움직임.
“크르럭!”
그러나 그를 포위한 마물은 고블린이 전부가 아니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순간 그가 바닥을 굴렀다.
쒜엑! 방금까지 경비조장이 서 있던 자리를 무언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관통했다.
칼날 늑대. 사냥에 나설 때만 털을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세우는 짐승형 마물. 스치기만 해도 갑옷을 긁고 상처를 내는, 까다로운 마물이었다.
“칫…!”
떠돌이 고블린 따위보다 훨씬 위협적인 칼날 늑대를 먼저 제거하기 위해 경비조장이 검을 내치려다, 다른 쪽에서 접근해오는 마물의 기척을 느낀 듯 스몰 실드로 머리를 보호했다.
쿵!
둔중한 충격이다
아예 넘어갈 정도의 무게감은 아니었으나, 잠깐 움직임을 멎게 할 정도는 됐다. 포위를 당한 시점에선 충분히 치명적인 빈틈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위기를 직감한 경비조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동시에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을 야만인과 그 일행의 존재가 떠오른다.
그리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망설임이 묻어나던 순간.
“머리 숙여. 싸가지!”
여인의 경고와 함께 본능이 경종을 울렸고, 경비조장은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부우우웅. 쩌억-!
머리 위로 지나쳤음에도 섬뜩한 파공음이 귓가를 때린다.
여인의 것치고는 굵직한 팔이 창대를 휘감은 채, 빙그르 회전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경비조장은 별다른 경고가 없었음에도 옆으로 몸을 날렸다.
쩌엉─!
바닥을 기듯이 내달려 거리를 좁힌 코볼트가 이빨을 쩍- 벌렸고 창대에 머리통이 그대로 으깨졌다.
“으랏차!”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른 칼날 늑대의 앞으로 쇠망치가 쇄도했다.
마치 늑대가 알아서 달려드는 모양새였으나, 경비조장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정확히 타점을 예측한 거다…!
콰득!
칼날 늑대가 머리부터 고깃덩어리로 변해 즉사하고, 별거 아니라는 듯 론이 콧김을 훅- 내뿜었다.
“쇠망치 론 나가신다─!”
“자, 잠시만요. 너무 앞으로 가면…!”
쾅! 쾅! 쾅!
오메, 시벌! 신나서 내달리던 론이 껑충 뒤로 뛰었다.
얀이 쏜 ‘파괴의 창’이 엄청난 속도로 내려꽂혀 마물 십수 마리를 격살한 것이었다.
‘어떻게 저 정도의 마법을…? 설마, 마탑의?!’
여자 창잡이와 망치를 든 용병. 그 둘의 실력도 분명 인상적이었으나, 얀의 마법만큼은 아니었음이라. 경비조장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잠깐 긁힌 상처만 치료해드릴게요.”
“너는….”
엘레나가 일으킨 ‘치유의 빛’이 바닥을 구르며 생긴 잔 상처를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지웠고,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생각보다 몸이 엄청 튼튼하시네? 그래도 앞으로 얼마나 더 싸울지 모르니까, 지금은 얌전히 저랑 구경이나 하자구요. 알았죠? 어차피 당분간은 나설 차례도 없어 보이니까.”
“그게 무슨…….”
엘레나가 검지를 세워 가리킨 방향을 홀린 듯이 따라간 경비조장이 본 것은.
콰드득─! 콰드드득─!
한 손에는 도끼, 한 손에는 검을 든 야만인이 수십 마리가 넘는 마물을 홀로 갈아버리는 광경이었다.
고작 다섯 명의 일행으로 마물의 군세를 일점돌파하는 광경에, 경비조장은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어루만졌다.
칼자루를 쥔 손이, 마치 위기에 몰린 사람의 그것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