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반란 (1)
엘펠란 공국.
과거 아르곤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거친 민족성과 뛰어난 기마술로 이름난 국가의 이름이다.
비록 척박한 땅과 부족한 자원으로 부유한 국가는 아니었으나, 그들이 가진 저력은 국경을 맞댄 아르곤으로 하여금 쉬이 전쟁을 결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배경에는 엘펠란 공국의 지배자들이 건국 이래로 모두 뛰어난 전쟁군주였다는 역사 또한 존재했다.
어느 시점에서는 엘펠란이 아르곤의 땅을 침범해 땅을 빼앗았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르곤 왕국에게 복속되었다.
찬탈왕. 대대로 광증을 타고나는 경우가 잦다는 아르곤의 혈통 아래에서도 특출난 잔혹함과 냉정함으로 왕위에 오른 이가 즉위하면서 벌인 정복전쟁의 결과였다.
엘펠란 공국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려, 공국의 공도에 무혈입성한 당시의 찬탈왕은 이런 말을 남겼었다.
‘너희는 영원토록 위대한 용의 후예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 운명은 내가 이곳에 당도함으로써 완성되었고, 만약 거스른다면 운명의 징벌이 너희 혈족을 세상에서 지우리라. 이를 명심하라.’
몹시 현학적인 찬탈왕의 말은 단순 경고라 보는 이들도 있었고, 지혜가 하늘에 닿았던 찬탈왕이 남긴 진실한 조언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말이 엘펠란의 지배자들에게 화인처럼 남아, 그들 핏줄에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새겼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싶은데……. 갑자기 독립이라니.”
너른 평야에 준비된 개인 천막의 안. 그곳에서 불안한 듯 연신 입술을 뜯는 퉁퉁한 중년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예 뜬금없이 터진 사건이라 볼 수는 없소.”
그 맞은편에 앉은 침착한 태도의 염소 수염 사내가 찻잔을 흔들었다. 퉁퉁한 중년인과는 대비되는 태도였다.
“데일론 후작이 엘펠란 출신의 인사를 중용하고, 왕가 몰래 북부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 하던 것들 모두. 알음알음 다 알려진 사실 아니오.”
“하, 하지만. 독립은 아예 다른 얘기지. 반란 아닌가? 반란…!”
“목소리 낮추시오. 에르몽 자작. 주변에 다 떠벌릴 생각이시오? 데일론 후작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헙.”
퉁퉁한 중년인, 에르몽 자작이 두툼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염소 수염을 기른 사내. 에르몽 자작과 인접한 도시를 지배하는 헤른 자작이 천막의 입구를 흘기며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이미 늦었소. 그도 그럴 게, 이미 후작의 소집에 응한 마당이니까. 왕가가 보기엔 우리나 후작이나. 똑같은 역적도당으로 보이겠지.”
“아,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되나? 우리야 후작이 억지로 끌고 온 셈이나 다름없는데……!”
“왕가의 입장에선, 안 그래도 거슬렸던 북부를 쓸어버릴 기회로 여길 테니까.”
에르몽 자작이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헤른 자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답을 내어달라는 무언의 압박에 헤른 자작이 한숨을 내쉰다.
‘여하간. 나이를 거꾸로 처드시긴 제대로 처드신 모양이야.’
저렇게 얼빠진 놈이라도 일단은 그와 같은 귀족, 시장이었다. 게다가 에르몽 자작의 도시는 북부에서도 드물게 비옥진 농토를 보유한 탓에 헤른 자작의 입장에선 그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에르몽 자작이 멍청한 덕분에 그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저 멍청한 놈이, 데일론 후작 앞에서도 제 지능을 자랑하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분에 맞지 않는 비옥한 땅을 가진 눈앞의 돼지는, 데일론 후작의 입장에서 군침이 나는 사냥감일 터.
자칫 눈 밖에라도 났다가는 이 자리에서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반란까지 선포한 마당에, 과연 남의 도시를 강탈하는 짓거리를 마다할까? 헤른 자작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귀하와 나는 최대한 조용히 눈치를 봐야만 하오. 적당히 흐름에 맞춰서 거수기 노릇이나 하다가, 살길이 열리는 쪽으로 붙자는 것. 잊지 않으셨겠지.”
“큼, 큼. 잊지 않았네. 데일론 후작이 내 땅을 노리고 있을 거라 말하지 않았나?”
이 멍청한 놈이. 헤른 자작은 방금의 경고를 까맣게 잊고 섣불리 입을 놀리는 에르몽 자작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치 없는 돼지는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지만….
‘우선, 소집에 응한 도시들이 총 열셋이니. 데일론 후작의 태도를 보고 대세에 몸을 맡겨도 늦지 않아. 데일론 후작이 멍청이도 아니고. 독립을 선언한 명확한 근거가 있겠지…….’
그때.
[지엄하신 엘펠란 공국의 주인이시자, 백 번의 전장에서 백 번의 승리를 취한 위대한 정복자. 엘펠란 대공께서 여러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다고 하니, 북부의 정당한 주인 되시는 여러분께선 자리에 참석해주시길.]
대공이시라, 대단한 신분 상승이시군. 주문에 실려 날아드는 전언에 속으로 비아냥거린 헤른 자작이 몸을 일으켰다. 에르몽 자작이 엉거주춤 그 뒤를 따랐다.
막사를 나서자 헤른 자작과 비슷한 처지의 귀족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는 얼굴도 있었지만, 모르는 얼굴이 태반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쓸데없이 땅이 넓으니까…. 지리적으로도 영 멀고.’
헤른 자작의 도시가 북부에서도 동쪽에 붙은 알-로렌느에 자리한 까닭이었다.
그와 별개로, 북부의 귀족이란 결국 도적 떼의 두목이란 말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구태여 친하게 지낼 이유도 없었다.
“오오. 저분은 랑테 백작 아니신가. 북부에선 데일론 후작의 다음으로 유력한 귀족…. 저분도 소집에 응하셨을 줄이야. 생각보다 이번 독립이 괜찮은 걸지도……?”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냐, 대체….
에르몽 자작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멍청이는 이 자리를 무슨 북부 귀족들의 다과회쯤으로 생각하는 건지.
데일론 후작…. 이젠 엘펠란 대공으로 불려야 할 그가 북부의 귀족들을 소집한 이곳. 카루냐 평야는 과거 북부에서 벌어진 거대 마적단의 난립을 엘펠란 대공이 손수 짓밟은 전장이기도 했다.
엘펠란 대공의 무력과 위신을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란 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치 선정에는 당연히 대공의 의도 또한 감춰져 있겠지.
‘그 의도는 거스르면 언제든 짓밟겠다…. 그쯤 되려나.’
카루냐 평야에 야영지를 전개하고, 그 자리에 북부의 귀족들을 초대한다는데 감히 거스를 자가 어디 있겠는가. 왕가는 멀고, 대공의 칼날은 가까울진대.
“들어가십시오.”
헤른 자작과 에르몽 자작은 카루냐 평야에 마련된 천막 중,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천막에 들어섰다. 엘펠란 대공의 천막이었다.
“거. 어차피 다들 아는 사람들인데, 굳이 검문까지….”
천막에 들어서기 전 엘펠란 대공의 병사가 신분을 확인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에르몽 자작이 작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불만이 오래가진 않았다.
“…….”
“…….”
천막 내부에 도사리는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고, 고맙네.”
천막 내부. 중심에 놓인 기다란 원탁에 북부의 귀족들이 자리했다.
헤른 자작은 병사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으면서도 눈을 가늘게 떴다. 정해진 자리에도 의도가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세력이 강한 순이군.’
예의 랑테 백작은 상석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에르몽 자작은 상석에서 서너 자리 떨어진 곳이었고, 헤른 자작 본인은 그보다 더 먼 자리였다. 사실상 거의 맨 끝이나 다름없는 자리.
휘하로 복속시킬 우선순위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삼엄하다.’
헤른 자작이 침을 꿀꺽 삼킨다.
굶주리는 이들이 많은 북부인이라 믿기 힘든 건장한 체격과 투구 사이로 내비치는 단단한 눈빛.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까지.
천막의 벽에 자리한 대공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정병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상석의 좌우를 지키는 두 존재가 주는 압박감 또한 어마무시했다.
왼쪽에 자리한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는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이었다.
등에는 어지간한 사람보다 길쭉해 보이는 대검이 걸려 있었는데, 저걸 가뿐히 휘두르기만 해도 병사들은 백이고 이백이고 전부 쓸려나갈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우측.
‘마법사……?’
짙은 감색 로브를 두른 자가 있었다. 기이한 것은, 아래에서 바라보는 헤른 자작의 시야에서도 로브의 가려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막이 일렁이는 것처럼 얼굴 주변만 시야가 일그러진 상태였다.
‘뭐지……?’
마법사들의 기행이야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라지만, 헤른 자작은 저 마법사에게서 께름칙함을 느꼈다.
“다 모인 것 같군.”
그러나 께름칙함의 원인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상석에 앉은 중년인, 이제는 엘펠란 공국의 대공이 된 남자가 목소리를 낸 탓이었다.
“이렇게 소집에 응해줘서 고맙군.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텐데 말이야.”
엘펠란 대공은 사자와 같은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가볍게 술잔을 말아쥐는 손짓과 부드러운 몸짓, 우묵한 두 눈동자와 사자의 갈기처럼 자라난 수염이 그러한 인상을 주었다.
“빈자리는… 셋인가? 어디지?”
“알-란자스. 알-로세느. 로-데세나의 시장들입니다.”
“이유는? 따로 알려왔나?”
“알-란자스는 알-라스델에서의 일로 여유가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마물 소동으로 난리가 났다고.”
흠-. 좌측에 자리한 기사의 조언에 대공이 의미 모를 반응을 흘렸다.
“나머지 둘은?”
“딱히 이유를 밝혀오진 않았습니다.”
“그래?”
헤른 자작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엘펠란 대공의 반응에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었다.
백 번의 전장을 거치고, 모두 승리해 살아남은 자.
엘펠란 대공이란 이름을 빼놓고도, 그는 충분히 이 자리의 모두를 압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럼, 이대로 시작해도 되겠군.”
엘펠란 대공이 고개를 주억이며 시선을 정면으로 가져간다.
드디어 엘펠란 대공이 이 자리에 귀족들을 소집한 이유가 드러나는 것이다.
헤른 자작은 긴장감으로 움츠러든 어깨를 의식적으로 쭈욱- 피려했다.
그때였다.
“뭘 시작하겠다는 거요. 데일론 후작.”
헤른 자작이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그만이 아니라 이 자리의 귀족 대부분이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랑테 백작…!’
상석에 가장 가까이 앉은 두 명의 귀족 중 하나.
다른 귀족들과 달리 엘펠란 대공의 위압감에 전혀 짓눌리지 않은 유일한 이였던 랑테 백작이 엘펠란 대공의 발언을 끊고 나섰다.
“후작. 먼저 밝히겠지만, 나는 그대의 행동에 반대하는 입장이오. 누구라도 그렇겠지. 당연한 것 아닌가? 왕가가 건재한 가운데, 뜬금없이 독립을 선언하다니. 다 같이 자살이라도 하자는 건가?”
장내의 분위기는 찻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다.
헤른 자작은 일부러 시선을 비스듬히 정면으로 고정했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기가 두려웠던 까닭이다.
당장이라도 대공의 병사들이 랑테 백작의 목을 창으로 꿰뚫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랑테 백작은 몹시 태연하게 제 주장을 계속 이어나갔다.
“게다가 북부가 지극히 혼란스러워진 와중이오 후작. 그대가 호시탐탐 땅을 넓히려 했던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파렴치하게 굴 줄은 꿈에도 몰랐소.”
뭐, 이제 와서 과거의 망령에라도 홀린 건가? 랑테 백작의 비아냥은 몹시 노골적이었다.
대공의 호칭을 후작이라 부르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흠.”
엘펠란 대공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꽤 과격한 발언이군. 지금 주변에 즐비한 내 병사들은 안 보이는 건가?”
“당연히 잘 보이고 있소. 만약 그대가 이 자리에서 날 죽이려고 한다면, 꼼짝없이 당하겠지. 야영지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을 내 기사와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들 결과는 다르지 않을 테고.”
이 자리의 귀족들이 아무런 호위도 없이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였다.
어차피 저항한다고 한들 의미가 없었다. 독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과거의 제 사병들을 모두 소집한 대공의 병력은 이 자리의 모두를 상회했다.
“하지만. 후작, 그대가 정말 이 나의 목을 치는 게 과연 가능하겠소? 이후에 닥칠 왕가의 보복을 감당 가능하겠냐는 거요.”
“왕가라…….”
“그대라면 알 텐데? 진짜 왕가가 가진 저력을. 지금껏 그대가 웅크리고 있던 이유를. 아니, 애초에 흑익공만 나서도 끝장나겠지. 당신 휘하엔 감히 그의 검을 받아낼 존재가 없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랑테 백작이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이 말을 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라는 듯이. 엘펠란 대공은 랑테 백작이 등을 돌려서 걸어나갈 때까지도 입가의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헤른 자작은 거기서 이상함을 느꼈다. 저 반응은 대체 뭐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대공은 랑테 백작의 폭탄 발언을 내버려 둔 거지?’
“왕가. 왕가라…….”
서걱──.
순간 천막 내부에 불어닥친 바람이 른 자작의 볼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사방으로 피가 팍- 튀었다.
헤른 자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게 헤일론 후작의 마법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왕가라니. 제 핏줄에 흐르는 광증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그 얼간이들을 믿고 설친 것이라면. 대단히 큰 실수라고 말해주겠네. 랑테 백작.”
아니, 이미 늦은 조언인가? 엘펠란 대공이 웃었다.
“이미 죽은 시체에 대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한가.”
데구르르르……. 철퍽!
마지막까지 제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의기양양한 표정 그대로 목이 잘린 랑테 백작의 얼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헤른 자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귀까지 막지는 못했다.
“자네들이라도 알아두게. 왕가를 믿고 내 뜻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말이야. 그리고……. 잘 알았으면 얌전히 따르시게.”
“무얼. 무얼 시키려는 겁니까. 우리가 있어서 대공께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좋은 질문이었네. 에르몽 자작. 내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첫 번째 요청은 간단해. 지금 북부에서 발생하는 해괴한 일들의 원흉을 잡는 것.”
“살아있는 시체를 말하시는 겁니까? 원흉이라니…. 그건 단순한 불치병인 게……?”
“아니, 그건 누군가가 고의로 퍼뜨린 저주일세. 그리고 그 누군가는, 지금도 북부를 제집처럼 돌아다니면서 저주를 퍼뜨리고 있지.”
에르몽 자작의 두툼한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대체 그게 누굽니까?”
“북부에서 활동하는 서릿골의 야만인을 찾게. 그리고…….”
찾은 뒤에, 그 시체를 내게 가져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