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반란 (2)
투두두두두……!
평시라면 말들이 방목되어 있어야 할 목초지 언덕의 위를 마차 한 대가 거칠게 내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계속 달려─!”
“말 안 해도 그러고 있다네…!”
“으아아! 토할 것 같아요!”
“할 거면 주문이라도 더 쓰고 하십시오!”
마차의 짐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그만큼이나 마차의 외관도 엉망진창이었다. 한쪽 벽면에는 화살이 가득 박혔고, 한쪽 벽면은 아예 뜯어져서 안쪽이 훤히 내다보였다.
“장막 펼쳐!”
“으아아아…!”
그리고 마차 지붕엔 몸을 바싹 붙이고 누운 야만인이 있었다. 북부에 저주를 퍼뜨린 악마의 하수인으로 한창 악명을 높이고 있는 칸이었다.
우우웅─!!
허공에 생겨난 잿빛의 장막이 마차의 후방을 모두 가리는 순간. 뒤쪽에서 쏘아 보낸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리꽂혔다.
그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눈으로 셀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물론 그중에서 칸 일행의 마차에 닿는 화살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얀이 생성한 장막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염병. 이것도 몇 번 못하겠군.’
이미 수차례 장막을 펼친 얀이었다.
달리는 마차에서 주문을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극심할 텐데, 펼칠 때마다 수십 발의 화살을 막아냈으니…. 슬슬 한계가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며칠을 쫓긴 참이었다.
오히려 이만큼이나 활약한 얀의 근성을 칭찬해야 하리라.
“새끼야! 화살 똑바로 안 갈겨?!”
“주문으로 막은 거잖냐! 닥치고 갈겨! 저것도 오래 못 간다!”
“잡아! 저것만 잡으면 한동안은…. 아니, 평생 놀고먹을 돈이 떨어질 거다!”
그때 지평선 너머를 매우듯 수십 쌍의 인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발. 질리지도 않나…!”
지붕에 몸을 바싹 눕혔던 칸이 주춤 몸을 일으켰다.
야만인 특유의 감각으로 겨우 두 발로 선 칸이 퍼뜩 고개를 들자, 머리통보다 조금 작은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이번엔 제가!”
“아니, 가만히 있어라!”
축복을 일으키려는 엘레나를 만류한 칸이 손을 뻗었다. 오른쪽 가슴의 성흔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열감. 직후 일어난 순백의 광채가 돌무더기를 집어삼켰다.
와이번과의 전투에서 바닥이 난 이후. 다시 충전하는 방법을 몰라 사용할 수 없었던 ‘심원의 성흔’이었다.
‘이만하면……. 한두 번 정도는 더 막을 수 있겠어.’
조건은 모르지만, 인형술사와의 전투 직후부터 신성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속도가 빈말로도 빠르다곤 못할 수준이었다마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냐!”
“아직! 아직 조금 더 남았네! 이 언덕이 팔부능선이야!”
시발, 한참 남았다는 소리군. 성흔에 남은 신성의 양을 어림짐작하던 칸이 얼굴을 구겼다. 적들의 전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고작해야 용병단… 그렇게 무시할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체인 메일에 두툼한 마수 가죽을 안쪽에 덧댄 무장 상태는, 놈들이 싸움에 퍽 익숙하단 뜻이 된다.
그리고 사용하는 무장 또한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슬링과 투창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어지간히 돈이 썩어나는지 마도구로 무장한 놈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작정하고 싸우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발이 묶인다. 저놈들이 적극적으로 산개하면서 공세를 펼친다면, 제아무리 칸이라도 적잖은 시간이 들 터.
그게 문제다.
저것들의 역할은 선봉대다. 용병단이 실력을 발휘해 잡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고용한 칼받이란 뜻.
진짜 추격대는 따로 있기에 섣불리 맞받아칠 수 없었다.
‘하지만… 슬슬 한계군.’
그전에 마차가 버티지 못한다.
이미 며칠을 혹사당한 말도 조만간 쓰러질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팔부능선이라. 굳이 넘을 필요도 없겠지.”
언덕의 경사는 점점 칸 일행에게 가혹해져만 간다.
마차를 버리는 건 예정된 결과였고,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하겠지. 그리고 그 판단의 순간은, 오로지 길잡이인 론의 몫이었다.
‘마차를 버린다? 그렇다면 언덕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하책이다. 차라리 이 언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자리를…….’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취하면서도, 적에게는 불리함을 강요하는 지점. 그 절묘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
주변 위치에 익숙한 것이 아니고서야 즉석에서 짜맞추기란 어렵다.
어떤 길잡이라도 불가능을 말할 것이었다.
하지만 론에게는 가능했다.
칸이 고등급의 스킬을 보유했을 거라 단언한, 론의 직감은 그토록 날카로웠다.
“형씨!”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칸은 론의 신호를 알아들었다. 언덕의 경사가 심해짐에 따라, 마차의 속도가 자연히 느려지고 추격대와의 거리 또한 좁혀졌다.
“작살─! 걸어!”
챠르륵! 콰득! 콰득!
놀라운 명중률이었다.
기수의 뒤에 얹어탄 투척수가 던진 작살이 마차의 후면에 정확하게 꽂힌다. 지금까지의 투척 공격은 모두 연기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괜히 북부에서 이름난 용병단이 아니다. 마물보다 도적이 많다는 이 북부에서, 몸값 비싼 용병단이란 결국 대인전의 달인일 수밖에 없었다.
“찢어!”
작살을 꽂은 채 내달리는 기수들이 사선으로 각을 벌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마차가 당장이라도 좌우로 박살 날 것처럼 요동쳤다.
자연스레 달리는 속도 또한 늦춰진다.
“악마의 힘이 담긴 도끼를 쓰는 놈이다! 절대 거리를 주지 마!”
“투척 준비─!”
“창은 아껴라! 슬링으로 조져!”
벌써 서로의 거리가 지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원거리에서의 투척 공격으로 끝장을 볼 셈이었다.
“나와!”
그때 마차의 짐칸으로 칸이 손을 뻗었다. 짐칸에서 줄곧 충격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일행들이 그 손을 붙잡았고-.
“흐읍……!”
단숨에 일행을 마차 지붕으로 끌어올린 칸이 그대로 일행을 옆구리에 꼈다.
‘저게 뭐 하는 짓거리지?’
갑자기 마차를 버리는 듯한 행동에 뒤쪽에서 추격하던 용병들이 얼굴에 의문을 띄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판단인 까닭.
마차에서 뛰어내리면?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면 부상은 당연하고, 태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용병단의 기마대가 먼저 덮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알아서 아가리로 굴러들어 와주는구나!’
추격대로 편성된 다섯 용병단의 지휘를 맡는 한 축, 무쇠이빨 용병단의 에릭슨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찢어! 죽이라고!”
작살을 건 기수들이 좌우로 찢어지는 가운데.
장창을 든 기수들이 랜스차징을 시도하듯 처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상대를 타격하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얀! 마지막으로 고생해라!”
“우웁……!”
그때 사람을 짐짝처럼 주렁주렁 달고 일어선 칸이 마차의 지붕 위에서 발을 내디뎠다.
콰직- 이미 반쯤 박살 난 지붕이 그대로 부서져 내린다. 그 상태에서도 놀라운 균형감각을 발휘해 버틴 칸이 뛰어올랐다.
투쾅─!!
“끄어억…!”
“씨발! 저게 뭔 미친!”
질주하던 말들이 서로 부딪쳐 뒤엉키는 소리, 낙마하면서 목이 부러지는 소리와 사지가 꺾인 채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동시에 섞인다.
상상조차 못 한 일격이다.
한 번의 발구름으로 마차를 표현 그대로 터뜨렸다. 어차피 버릴 마차를 일종의 산탄 지뢰처럼 써먹은 것이다.
그렇게 수백 조각의 나무 파편들에게 직격당했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실전에 능숙한 놈들답게 갑옷을 몇 겹으로 껴입긴 했지만, 투구를 쓰지 않아 얼굴이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게 아니라도 마갑을 장비하지 않은 말부터가 나무 파편에 노출됐다.
“얀! 마법!”
“우욱……!”
그사이에 뛰어올랐던 칸의 발이 땅에 닿기 직전. 칸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혀 있던 얀이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주문을 읊조리면서였다.
후우웅─!
일행의 무게가 더해진 채로 추락하던 칸의 몸을 보이지 않는 힘이 감싸 안았다. 얀이 필사적으로 시전한 주문의 공능이었다.
거기에 도약의 스킬 효과인 낙사 데미지 감소 효과가 더해졌다. 완벽에 가깝도록 충격을 줄인 칸이 몸에 주렁주렁 매달은 일행들을 놓고서 곧장 도끼를 쥐었다.
투두두두……!
어느새 넓게 산개한 기마들이 주변을 포위하는 중이었다.
어중간한 기사 따위는 일격에 쪼개버릴 수 있는 칸이다. 적어도 일대일 대결에 한해서 칸의 괴물 같은 힘은 반칙에 가까웠다. 그러나 다수와의 전투에선 그렇지 않았다.
‘까다롭군.’
특히, 개개인의 평균 무력이 높은 정예 집단을 상대로는 오히려 약한 면모를 보였다.
전사 직군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다.
주문 하나로 수십, 많게는 수백의 숫자를 일소하는 게 가능한 주문쟁이와는 다르게, 전사 직군은 아무리 강해도 무기와 팔이 닿는 범위에 한해서 그 힘을 발휘하니까.
물론, 아티팩트처럼 사기적인 옵션이 달린 장비의 유무와 고등급의 스킬로 태생적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는 게 가능하나-.
‘애석하게도.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군.’
“다들 자세 잡아라. 얀은 최대한 회복하고.”
그렇다면 별수 있나.
야만인에겐 도끼와 두 주먹이면 충분하다는 걸 알려주는 수밖에.
[나도 있다. 미친 인간.]
물론, 사람 잡아먹는 마검도 있으면 더 좋겠고.
*
*
*
“미쳤군.”
“끔찍할 정도로 강해. 저게 그 소문의 참수자인가?”
“그럴 거다. 설마 흑익공의 대전사는 아닐 테니까.”
용병단을 이끄는 수장들의 대화였다.
가장 먼저 화두를 뗀 무쇠이빨의 에릭슨은 속으로 작게 침음했다.
‘저게 정말 마나도 없는 반푼이 종족이 맞나?’
말에 탄 기수의 돌격을 정면에서 받아치는 걸 넘어 압도하는 괴력.
그것만으로도 기가 찰 지경인데, 오크 못지않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은 그야말로 재앙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쩌억─!
다시 한번 참수자의 도끼가 사방으로 선혈을 터뜨리자, 뒤에서 관망하던 에릭슨의 몸이 움찔 앞으로 쏠렸다. 방금 당한 것이 자신의 부하였던 까닭이다.
‘미친 괴물 같으니.’
에릭슨이 얼굴을 구기는 사이, 쏜쌀같이 후방으로 뛰쳐나간 야만인이 두 명의 기수를 일격에 찢어버렸다.
다행히 다른 용병단의 기수들이었다.
다음 순간, 측면에서 돌진하는 기수의 머리를 야만인이 짓밟아 터뜨렸다.
겨우 한 명이 전장의 팔방을 모두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만인의 일행이 만만하냐? 그것도 아니었다.
“다 덤벼라─!!”
겉보기에는 차가운 인상의 미인처럼 보이는 여자 창잡이의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기마의 돌격에서 기민한 몸놀림으로 몸을 빼내고, 측면에서 정확히 목이나 심장을 꿰어 죽인다.
칼질을 드잡이질을 통해 배우는 여타 용병들과 달리, 제대로 된 창술을 배운 것이 분명한 움직임.
‘설마, 팔람의 창잡이인가…?’
그만한 특징이라면 특정하기도 쉽다.
조합의 규율을 어기는 용병들의 앞에 표홀히 나타나 징벌을 내린다는, 조합의 귀신들 중 하나가 딱 저렇다고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또 하나.
“쇠망치 받아라!”
‘떠버리 론…. 저 새끼는 왜 저기 껴있어?’
커다란 전투 망치를 주무장으로 삼은 용병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멍청하게 못생긴 얼굴과 시끄러운 목소리를 더하면 그 인선이 많지 않다.
개중에서 가장 유명한 놈이 저 떠버리였다.
제 본거지인 서부에 박혀있어야 할 놈이 어째서 북부에 있고, 대공이 악마의 하수인으로 공언한 야만인과 동행하는지 에릭슨의 빈약한 상상력으론 감히 추측조차 불가능했다.
다만 그는 자기 의뢰에 충실할 뿐. 용병답게-.
“그래. 용병답게 말이야.”
에릭슨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자, 그의 곁에 모여든 용병단의 대장들이 마찬가지로 웃었다.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사냥감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을 모두가 알았다.
제 수하들을 희생해 체력을 빼놓은 보람이 있을 정도로.
지극히 용병다운 전략이었고, 그건 지극히 성공적인 계책이었다.
에릭슨은 오크의 얼굴을 본 따 만든 투구를 머리에 썼다.
오크의 기다란 송곳니를 흉내 낸 투구 장식, 무쇠이빨이 햇빛을 받으며 번쩍였다.
“가보자고, 친구들. 사냥감을 잡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