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반란 (8)
“그래서…. 슬슬 설명해주셔야겠는데. 내 말을 개무시하더니, 그딴 되도 않는 협박으로 날 붙잡은 것에 대해 말이야.”
“협, 협박이라니. 과장이 심하구만.”
“그쪽은 빠지시지? 어차피 저놈이 시킨 거 다 알아.”
잔뜩 날이 선 답변에 론이 입을 다물었다.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론이라도 찌그러질 수밖에 없을 만큼, 남자의 분위기가 살벌한 까닭이다.
“나는 분명히 전했어. 정보 길드가 내 체면을 깔보는 게 아니라면, 그쪽에도 틀림없이 내 의견이 전해졌을 테고. 맞나?”
“총, 총지부장님.”
“마이아. 네 차례는 칸에게 제대로 된 답을 듣고 난 뒤로 하겠다. 그때까지는 얌전히 있어. 이번에야 말로 금패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거, 더럽게 살벌하네. 순식간에 두 명의 용병을 격침시킨 남자. 용병조합 총지부장의 살기어린 시선에 칸이 어깨를 으쓱였다.
“론에게 다 듣고 온 것 아니었나?”
“들었지. 들었는데…….”
쾅!
남자의 주먹이 탁상을 내리쳤다.
놀랍게도 꽤 두꺼운 탁상이 우지끈- 부러졌다. 순수 인간의 근력으로 저만한 힘을 내는 건, 피를 깎는 단련으로도 쉽지 않았다.
“그따위 농담을 나보고 믿으라고? 데일론 후작이 ‘살아있는 시체’를 퍼뜨린 주범이고, 전대륙적인 마법사 집단이 후작의 조력자로 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만신전이 너…. 서릿골의 야만인에게 의뢰를 맡겼다는 얘기를?”
“전부 사실이긴 하네요……. 히익…!”
“마법사 친구,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게. 마탑의 마구스도 내 앞에서는 감히 건방 떨지 못해.”
“너무 겁주지 마라. 그러다 애들 잡겠어.”
“후우…….”
총지부장이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어떻게든 화를 삭이려는 듯한데, 여전히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 듯 호흡이 꽤나 거칠었다.
‘검의 달인들은 전부 정신력이 엄청나다던데.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니까.’
그래도 대화가 통할 정도로는 침착해졌으리라 믿고, 칸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너도 후작의 낌새가 이상하단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을 텐데.”
“…그야 대충은. 설마 대뜸 독립을 선언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알-라스델과 북부의 현자에 관한 것도 마이아가 따로 소식을 넣었을 거고. 그렇지?”
“예…….”
마이아가 칸의 눈치를 보며 긍정했다.
그야 일행들 몰래 스파이 비스무리한 짓거리를 해왔단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는 없었던 거겠지. 정작 칸 본인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네 행적이야 수시로 보고를 받았었다. 그래, 그것들은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치자고. 설마 저 아이가 내 뒷통수를 치진 않았을 거라 믿고서 말이야. 하지만 만신전의 얘기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군. 아니, 만신전이 널 고용했단 얘기로 끝나면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해. 네놈 실력은 그만큼 확실하니까. 하지만.”
총지부장의 눈이 그의 검처럼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저 어린 사제가 한 얘기는 도저히 믿기 힘들다.”
“불쾌하네요. 제가 신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입에 담았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그렇게까지 말할 셈은 아니오. 아니, 비슷하지.”
짐짓 노한 기색의 엘레나가 눈을 치켜떴다.
“당신께선 신실한 만신전의 신자라 들었는데요. 그런데도 제 말을 의심하는…….”
“그렇기에 더욱 믿기 힘든 것이오. 엘레나 사제.”
총지부장은 짐짓 엄한 투로 엘레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놈이 후작의 기사들과 싸울 때. 론이 당신을 태우고서 접선지에서 기다리던 날 찾아왔고, 사제께선 꼬리를 달고 온 것을 이유로 떠나려던 날 이런 말로 붙잡았소. 정의의 신께서 직접 저놈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고, 북부에서의 모든 행보를 여신께서 지지하고 계시다고.”
“예. 그랬지요.”
“그 말을, 교회의 신자인 내가 쉽사리 믿을 것 같소? 엄정한 정의의 심판자인 여신께서 북방의 이교도를 대리자로 삼으셨다는 말을? 물론, 나는 야만인에 대한 편견 따위는 없소만. 만신전은 그렇지 않잖소?”
미들랜드의 그 어떤 지방도 제국만큼 신앙심이 깊지 못했다. 다른 말로는, 이교도에 대한 혐오가 가장 극심한 것이 바로 제국이었다.
그런 제국 출신의 검호인 칼엘손이니. 정의의 신이 야만인을 선택했단 말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리라.
“만약, 그 헛소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 나타날 일도 없었을 거요. 그 말인즉, 헛소리가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만한 대가도 치러야 할 거란 얘기고.”
무시무시한 협박이다.
용병조합 아르곤 왕국 총지부장 칼엘손.
제국 출신의 어느 검술 유파에서 검술을 수련하다, 스승을 제 손으로 죽인 뒤 자백하여 검투 노예로 삼 년을 복역.
출소 후에는 대마경의 외곽을 전전하다 깨달음을 얻고서 검의 달인이 되었고, 시간이 흘러 용병조합에 투신해 지금에 이르렀다.
일평생의 반 이상을 무언가를 죽이는 것으로 살아온 검귀가 바로 그였다.
그런 칼엘손이 하는 말이니만큼, 말뿐인 협박으로도 들리질 않았다.
‘…살벌하기는.’
칸이 혀를 찼다.
저놈이라면 능히 제 말을 실현하고도 남겠지. 휘하의 세력을 빼놓고도, 검 한 자루면 어떤 상대라도 격살할 수 있는 검의 달인이니까.
하지만 칸은 안다.
저 남자를 설득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걸.
‘하나의 조건만 충족해준다면 말이지.’
*
*
*
칼엘손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화를 가라앉혔다.
‘그래, 이제와서 저놈과 푸닥거리나 할 수는 없지.’
칼엘손의 행동 지침은 간단하다.
용병조합의 이득이 될 것.
그것이 세간의 지탄을 받는 행동이건, 뭐건, 조합의 이익으로 치환될 수만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
그런 면에서 눈앞의 야만인과 척을 지는 건 대단히 큰 손실이었다.
‘녀석은 로렌의 마녀와 꽤 깊은 관계를 맺었다. 제 가문의 말종들과 연을 끊고서, 사람 자체를 꺼려하던 마녀를 어떻게 꿰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괜히 놈을 건드렸다가, 마녀가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칼엘손을 경계하게 만드는 것은 불과 1, 2년 사이에 놀랍도록 강해진 칸의 성장세였다.
동부에서 오우거를 사냥한 거야 마녀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서부에서 사령술사 다르킨 페레야스를 잡은 것 또한, 성기사와 마구스가 함께 했다는 보고를 들은 바가 있고-.
‘하지만 알-라스델에서 아룡 두 마리를 격살한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그건 녀석 혼자서 해낸 거라고 마이아가 보고를 올렸으니까. 게다가 최소 마탑의 마구스와 동일한 경지에 이른 현자를 사냥했고, 이번에는 다섯 개의 용병대와 후작의 기사들을 연달아 격살…….’
그야말로 초인적인 행보 아닌가.
여기서 놈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국의 조합 본부에서도 놈을 주목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녀석과 섣불리 적대해서 얻을 이득보다, 녀석을 잘 다독여서 다루기 쉽게 만들었을 때 얻을 이득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거지.’
칼엘손이 화난 맹수처럼 으르렁댄 것은 전부, 그러한 계산을 끝낸 뒤에 내보인 행동이었다.
“처음 대화로 되돌아가지. 날 납득시킬 설명이나, 증거가 준비되어 있나?”
이는 칼엘손의 힘을 빌려 대공의 제1 기사를 격살한 일에만 국한되는 요구가 아니었다.
대공이 저 야만인을 ‘악마의 하수인’이라 낙인찍고, 추격령을 북부 전체에 내린 지금.
용병조합의 총지부장인 그가 ‘악마의 하수인’을 도울만한 이득과 명분을 제시하라는 것이기도 했다.
‘없겠지.’
대공의 반란은 머지않아 진압될 것이다.
왕가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현 국왕의 종친이자 왕국의 유일한 공작인 흑익공이 움직이면 북부의 반란은 금세 짓밟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전쟁 준비와 실제 전쟁을 치르는 기간을 생각하면, 적어도 이 년은 기다려야 하겠지.’
칼엘손은 그때까진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최대한의 이득을 취할 생각이었다. 아니면 손해를 최소화하거나….
하지만 칸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하면, 이득은커녕 확실하게 손해를 보게 될 것이었다. 적어도 북부에서의 사업은 당분간 접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칸이 칼엘손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거나 훨씬 많은 이득을 보장해줘야만 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있다.”
“그래, 당연히 없겠지……. 뭐?”
칼엘손이 멍청한 얼굴로 되묻자, 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용병조합이 날 도와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칼엘손이 거친 살기를 드러내자 장내에 신음이 흐른다.
일평생 무를 수련한 끝에 지고한 깨달음을 얻고, 검 한 자루로 온갖 신비를 베어내는 존재들이 바로 검의 달인이다.
그들의 심신은 모두 검이나 다름없다고들 세인들이 떠드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설마, 아직도 정의의 신이 직접 널 선택했단 개소리를 지껄일 셈이냐?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조합이 널 도울 이유는 없다! 아니면, 네놈과 배꼽이라도 맞춘 마녀라도 들먹이며 협박할 셈인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저릿저릿한 살기가 실체를 가진 것처럼 좌중을 짓누른다. 심약한 성정의 얀은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고, 마이아와 론은 무릎이 꺾였다.
“…난폭하기는.”
칼엘손의 눈썹이 들썩였다.
뜻밖에도 이 자리에서 가장 연약해 보이는 어린 사제가 가장 살기에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기에. 하물며 칸조차 미간을 좁히며 반응을 보였건만-.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불쌍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장담하지요. 당신은 후일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예요.”
“엘레나 사제. 나는 후회란 감정을 옛적에 버렸소. 나의 검으로 스승의 심장을 조각냈을 때부터 그러했지.”
“글쎄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죠. 그렇지 않나요? 칸.”
“……흠. 이거 가슴팍을 뜯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칼엘손의 살기 어린 시선이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칸에게로 향했다.
“무슨 뜻이지?”
“다 그런 게 있다. 쯧……. 우선 살기부터 가라앉히지. 애들 다 잡겠다.”
“설명이 먼저다.”
“못 본 사이에 답답한 성격으로 변했군. 예전엔 시원시원했는데 말이야.”
철컥.
칼엘손이 검자루를 어루만졌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이나 어서 꺼내란 무언의 협박이다.
그걸 본 칸이 비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란은 성공할 거다.”
“뭐?”
“왕가는 대공의 독립에 대해서 한동안 침묵할 거야. 그렇게 되면 북부는 꽤 긴 시간 대공의 치세 아래에 놓이겠지. 흑익공의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쉽게 토벌당하진 않을 거란 말이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일단 듣지.”
여유로운 태도로 긴 설명을 늘어놓은 칸이 입꼬리를 내리며 정색했다.
“대공을 돕는 건 진리의 추종자라는 주문쟁이 집단이다. 그것들의 목적은 영혼을 다루는 비술을 이곳 북부에서 실험하는 것이고, 벌써 어느 정도 진척이 있었어. 어쭙잖은 용병을 일당백의 전사로 만드는 해괴한 마도구까지 만들 정도로는 말이야. 그 무기가 양산이 가능한가에 대해선 미지수지만, 적어도 전쟁에 써먹을 숫자는 되겠지. 갑자기 독립 선언을 한 걸 보면.”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안 믿으면? 내가 대공에게 쫓기는 시점에서 정보 길드를 통해 접선해온 것부터, 돌아가는 상황을 더 이상 파악할 수 없어서였을 텐데?”
칼엘손이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다.’
조합의 정보력은 물론 왕국 전체를 아우르지만, 대공이 되기 전부터 북부의 실제적 지배자였던 귀족과 관련한 비밀을 얻기란 지난했다.
그런 와중에 마이아와 조합의 정보원을 통해 칸의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아마 북부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매우 직접적으로 엮여있을 장본인의 얘기를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믿기 힘든 이야기투성이야. 범대륙적인 마법사 집단의 존재나, 왕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침묵할 거란 얘기나, 반란이 성공할 거란 말은…….’
이따금 나타나 대륙을 혼란에 빠뜨리는 예언자들의 헛소리 내지는 망상처럼 들리지 않나. 적어도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때.
챙그렁.
“가져가서 확인해봐라. 네 수하들 중에도 마법사는 있을 테지?”
“이게 그 마도구냐?”
“그래.”
칼엘손은 검신이 톱처럼 되어있는 기형검을 받아들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어떤 검이라도 손에 쥐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칼엘손의 수준으로도,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던 까닭.
‘아니, 뭔가 있는 건 확실한가. 대공의 제1 기사가 보여준 검붉은 무언가도 있으니…….’
게다가 경계마을에서 날뛴 마적단의 대장이 아티팩트에 준하는 마법검을 다루었다는 보고도 있었지. 그 대장이 피가 다 빠진 채로 죽었단 정보를 떠올린 칼엘손의 기세가 짐짓 누그러졌다.
‘놈의 말이 절반만 사실이어도 대공을 적대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아룡의 건도 그렇고, 그 수상한 현자의 건도 그렇고…. 정체불명의 마법사 집단이 암약하고 있다는 걸 본부에 전하고, 여론을 움직여서 반란 진압의 주축이 될 수만 있다면 왕국 내에서 조합의 위상은 더 커질 거야. 게다가 저놈에게 빚을 지우면 오우거 때처럼 급한 일이 생기면 써먹을 수 있겠지…….’
일종의 저점매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칼엘손이 칼자루에 올려놓은 손을 뗐다.
“그래, 일단 알아보도록 하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돕는단 얘기는 아니야. 그저 유예를 주는 것뿐이지. 조합의 마법사가 이 검을 살피는 동안, 좀 더 확실한 무언가를 가지고 와라. 알-란자스의 베르타 경의 직접적인 증언도 괜찮겠지. 그녀의 말이라면 충분한 공신력을 가졌으니까…….”
칼엘손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화아아악──!
칸의 허리춤에 달린 도끼가 돌연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빛을 내뿜더니, 공중에 붕- 뜨기 시작했다.
그 기현상에 본능적으로 발검한 칼엘손의 손에서 검이 스르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이, 이 존재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