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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야만전사-77화 (77/132)

#077화. 반란 (9)

챙그랑!

검을 내팽개친 칼엘손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자기도 모르게 양 무릎을 바닥에 가져간 채로.

“엄정한 정의의 심판자시여…!”

틀림없다.

그녀가 이 자리에 현현한 것은 비록 찰나에 불과했으나, 검의 달인이 가진 예민한 감각은 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며 강림한 초월자의 존재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만신전의 신은 그 숫자가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정의의 신은 명백히 상위신에 속하는 존재였다.

그녀의 신명인 ‘정의’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만신전 교회의 무력인 성기사와 성전사들의 대부분이 그녀를 숭앙하는 까닭.

물론, 그 외에도 정의의 신을 숭배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아….’

그리고 그런 이들은 대부분 두 가지로 나뉜다.

타인의 죄를 심판하려는 이와, 스스로의 죄를 속죄하려는 이들로.

“정말…. 정말이었다고?”

양 손에 저울과 징벌검을 쥔 여신의 형상은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건만, 칼엘손은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굳어 있었다.

‘정의의 신께서 정말…….’

대륙의 종교들 중, 이교도 배척에 가장 적극적인 종교가 바로 만신전 교회였다.

과거 성전이란 이름으로 문명이 닿지 않은 땅에 성기사와 성전사를 투입해 교화를 진행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물론, 거기엔 사교도의 난립으로 대륙이 어지러웠던 시절의 영향이 컸지만-.

‘내가 틀렸다…. 아니면, 만신전 교회의 수뇌부가 사람들을 속인 것인가?’

모든 성전이 신의 뜻이라던 만신전 교회.

특히나 이교도 배척에 앞서는 존재들이 정의의 신의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는 성기사와 성전사들 아니었던가.

그런데 정작 정의의 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릿골의 이교도를 자신의 뜻을 받들 전사로 선택했다.

“말했을 텐데요.”

날선 목소리에 칼엘손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비웃음을 머금은 엘레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

칼엘손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참이나 무릎꿇은 자세로 침묵했고, 그의 복잡한 심경을 어렴풋이 느낀 이들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 방금 진짜 신께서 강림한 건가요?”

“조용히 하게…! 이런 눈치없는 주문쟁이 같으니라고…!”

물론, 아주 작은 소란이 있기는 했다마는.

“……그래서.”

그렇게 한참이나 고뇌하던 칼엘손이 몸을 일으킨 것은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고, 고개를 든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빛으로 일렁였다.

“내가 뭘 도우면 되는 거냐.”

굳은 결의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칸이 씨익 웃었다.

“이제부터 그걸 얘기해보자고.”

*

*

*

“충. 오셨습니까.”

“…그래. 수고가 많네.”

“아닙니다. 안쪽으로 드십시오. 대공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수염을 기른 귀족, 헤른 자작을 맞이한 병사가 뒤로 손짓했고, 귀빈을 위해 준비된 쪽문이 열렸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

헤른 자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병사를 지나쳤다.

‘불편하기 짝이 없군.’

과거에는 로-엘펠란이라 불렸고, 지금은 엘펠란 대공국의 공도가 된 도시의 성문은 철통같은 경계를 밤낮으로 유지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한 출입 절차를 준수해야 하며 이에 불응할 시, 심하면 그 자리에서 처형에 이를 정도로 엄중했다.

그런 공도의 출입 절차를 생략했다는 건, 대공이 그러한 언질을 넣은 탓이었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도시 자체의 생산력으로는 일 년도 버티지 못하는 빈곤한 소도시의 시장이었던 헤른 자작이었다. 하지만 그의 직함은 대공국이 선포되면서 조금 다르게 변해버렸다.

아니, 아주 거창하게 변했다….

“디아즈 데 헤른 리브론 궁중백께서 입성하십니다──!”

주변의 시선이 없더라면 고개를 푹 숙였을 우렁찬 함성이었다.

‘궁중백이라니……!’

놀랍게도, 소도시의 시장은 대공국의 궁중백이 되었다.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신분 상승.

그러나 헤른 자작…. 아니, 리브론─대공이 친히 성을 하사했다─ 궁중백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봤자 결국 반란국의 수괴라는 뜻 아닌가……!’

만약, 왕가가 토벌에 나선다면 그의 이름은 제거 대상의 가장 윗줄에 적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대공이 장담한 대로 왕가가 별다른 움직임을 안 보이고 있지만… 리브론 궁중백은 이것이 잠시간의 유예라 생각했다.

왕가가 침묵하더라도, 흑익공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리브론 궁중백이 각하를 뵈러 왔소. 미리 기별을 넣어뒀을 텐데…….”

“충. 곧장 알현실로 가시면 됩니다. 안내가 따로 필요하십니까?”

“아니, 됐네. 저번에 한 번 지났던 길이니.”

대공국의 성은 몹시 거대하다. 성내의 하인들 중에서도 아차 하면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적지 않을 만큼.

그런 점에서 리브론 궁중백의 말은 일견 허세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병사는 별달리 따지고 들지 않았다. 영명하신 대공국의 주인이, 그런 멍청이를 궁중백에 앉힐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과 전장을 함께한 전쟁기계들…. 확실히 일반적인 병사들과는 뭔가가 다르다.’

그렇게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내성에 진입한 리브론 궁중백은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터벅- 터벅-

대공의 성은 설계 의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또 난잡했다.

갈림길을 지나 복도를 조금 걷다 보면 또 다른 갈림길이 나오기를 반복하고, 벽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선이 끝없이 이어져서 께름칙한 느낌을 주었다.

‘귀족이기 이전에, 마법사라 이건가.’

마법사들의 기행이야 특별히 놀랄 만한 것도 아니기에, 리브론 궁중백은 그저 마법사 특유의 특이한 취향이 반영된 것이라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이 괴상한 성 내부를 거닐 수 없기 때문에.

“……리브론 궁중백. 이시군요.”

“맞네. 자네는…… 저번에 못 본 얼굴이군. 페드로 경은 아직 복귀하지 않은 건가?”

“예. 장기 임무 인지라. 당분간은 없을 겁니다.”

“그렇군….”

뭐지? 말이 좀 어눌한데…. 리브론 궁중백이 의아하단 반응을 속으로 삼켰다.

문을 지키고 선 기사가 처음 보는 얼굴인 것은 둘째치고, 흐리멍덩한 눈에 뜨문뜨문한 말씨 탓에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는지 걱정이 앞섰다.

“일단 알겠네. 들어가도 되겠나?”

흐린 눈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밀었고, 궁중백은 꺼림칙한 반응을 필사적으로 감춘 채 알현실 내부로 들어섰다.

“왔는가. 리브론 궁중백.”

“예, 각하.”

고개를 숙인 채 알현실의 중앙으로 향한 리브론 궁중백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고개를 들라는 대공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흠. 허례는 되었다고 했을 텐데, 궁중백. 본국에서 자네의 위상을 아직 실감하지 못한 건가?”

“제 위상이 어떤들, 각하의 비할 바가 아니지요. 하잘것없는 도시의 시장을 궁중백으로 만드신 분 아니십니까.”

“자네의 능력이 출중하니, 내 어찌 기용하지 않을 수 있겠나. 금칠은 여기까지 하세.”

“예.”

조용히 고개를 든 궁중백이 준비한 안건을 입에 올렸다.

“우선…. 과거 군벌을 자처하며 이런저런 해악을 일삼았던 무장집단에 대해서는 모두 전령을 보냈습니다. 현재 절반 정도는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고, 삼 할은 우선 조심스럽단 답변을 보내왔으며, 나머지 이 할은 전령이 복귀하지 않은 걸로 보아…….”

“거절한 모양이군. 해서, 후속 조치는?”

“긍정적인 의사를 밝혀온 집단에게 대가를 약속하고, 합류하기 이전에 그들을 잡아 오라 명했습니다. 전리품을 십 할 주겠노라 약속하니 서둘러서 다녀오겠다더군요.”

“깔끔하군. 쓸만한가 재어볼 수도 있고, 나머지 삼 할을 움직이게 하기에도 충분하겠어. 자네 생각인가?”

“예.”

“흐음- 그래?”

리브론 궁중백은 흡족하단 듯이 웃는 대공을 보며 서늘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에야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내비치는 대공이지만, 자신의 쓸모가 다하는 순간 목이 잘려 죽으리란 걸 너무나 잘 알았다.

마치, 대공의 마법에 목이 잘려 죽은 랑테 백작처럼.

“그리고 다음으로는… 귀족 세력을 규합하고, 약속한 식량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소요를…….”

보고가 길어질수록 대공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짙어져 갔다. 그 진득한 감정에 리브론 궁중백은 땀에 젖은 손을 소매로 감추며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이런 제기랄….’

어쩌면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 법한 안건을….

“각하. 혹, 용병조합의 총지부장에게 서신을 보낸 건에 대해서 따로 들은 바가 있으십니까?”

“없네. 답신은커녕, 총지부장 본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말밖에 없더군.”

“그렇군요…….”

“왜? 자네가 따로 들은 게 있는 모양이지?”

“그것이.”

리브론 궁중백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최근 용병들 사이에서 해괴한 소문이 돌고 있는 듯합니다.”

“소문? 그 미개한 것들이 미신 따위에 환장하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 아닌가.”

“단순 미신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런 유형의 소문이 아닙니다. 더욱 최악인 것은, 그 소문이 북부 전체로 대단히 빠르게 퍼져나가는 중이라는 겁니다.”

“설마, 용병조합인가?”

리브론 궁중백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지요. 용병들 사이에 은밀히 정보를 퍼뜨려 여론을 움직이는 건, 용병조합에겐 대단히 쉬운 일이니까요. 문제는 배후에 조합이 있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단 겁니다.”

“…불가능하다?”

“예.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잡는 게 지극히 어려운 까닭에. 들이는 인력에 비해 결과는 시원찮을 가능성이 십 할이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라는 뜻이로군.”

“결국 용병들에게서 시작된 소문에 불과하니, 나서서 반발하면 오히려 그림이 이상합니다. 아마 저쪽도 이쪽이 나서서 진흙탕에 뒹구는 걸 원할 터. 차라리 무시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리브론 궁중백의 조언에 대공은 잠시간 침묵했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대체 그 소문이 뭔지나 들어보세. 자네가 굳이 내게 보고를 올릴 정도라면, 대단히 웃긴 농담이겠지?”

엿 됐군. 궁중백은 기어코 이 순간이 왔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러나? 얼마나 웃긴 농담이길래 그리 뜸을 들여?”

“……대공께서 북부의 저주를 퍼뜨린 진정한 흑막이며, 북부를 집어삼키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고.”

“흠, 겨우 그 정도 소문 가지고 그리 호들갑을 떨었나? 무지렁이들이 믿을 법한 음모론이군. 자네, 머리는 똑똑한데 사람 웃기는 재주는 떨어지나 보이.”

“그, 그리고!”

돌연 언성을 높이는 궁중백의 모습에 대공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시발. 시발!’

“대공이 공도의 모든 시민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어, 악마에게 바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증거로 대공의 성에는 성 전체를 뒤덮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리브론 궁중백은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소문의 마지막 부분을 입 밖에 꺼냈다. 벽면에 그어진 수상쩍은 선들을 애써 머릿속의 한구석으로 밀어내며.

“그 모든 증거는……. 대공성의 내부, 흑색 철문으로 막힌 대공의 개인 공방에 있다.”

“……!”

대공의 눈이 터질 것처럼 커지고, 리브론 궁중백은 대공의 얼굴에 드러난 경악이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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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공성에 그런 공간이 존재하긴 하는 건가?”

“있으니까 소문을 퍼뜨린 거지.”

“그럼. 그 공방에 대공이 흑막이란 증거가 있는 것도 전부 사실인가?”

“그래. 거기에서 진리의 추종자 놈들과 괴상한 걸 만들고 있더군.”

“아니……. 대체 대공성에는 언제 가본 건가?”

“가본 적 없다.”

“칸 형씨. 자기가 말하고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남? 가본 적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어?”

“잘.”

그 물음에 론이 가슴을 쿵쿵 두들겼다.

“거, 의뭉 떨기는…! 그럼, 그 소문을 퍼뜨린 이유나 좀 제대로 알려주게! 형씨가 하는 일이니. 또 엄청나게 흉흉한 계획이겠지?”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의심을 품으면, 없던 귀신도 생기는 법이거든.

“지켜보자고. 공포로 규합한 세력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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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 헤른 자작…. 아니, 궁중백! 대공성 내부에 흑색 철문으로 감춰진 비밀 공방이 있고, 그곳에서 백 명의 마법사가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을 벌이고 있다는 게 정말인가……!”

“에르몽 자작…….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

“그뿐만이 아닐세! 대공께서는 사실 인형술사라는 마법사에게 영혼을 빼앗겼고, 지금은 그 마법사가 대공인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무지렁이나 믿는 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에르몽 자작을 본 리브론 궁중백이 이마를 짚었다.

‘설마, 이런 얼간이가 더 있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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