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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23화 (23/172)

23화

오랜만에 본 사파이어 스네이크는 기억 속 모습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뱀은 죽을 때까지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던가?’

평범한 뱀보다 훨씬 수명이 길 게 분명한 보석수.

나는 문득 이 뱀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후우…….”

문득 들린 한숨 소리에 칼자크를 보았다.

서늘한 냉기 때문에 입김이 나올 정도인데, 이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괜찮냐고? 지금 나한테 물은 거냐?”

칼자크가 태연하게 웃었으나 어딘가 어색했다.

하여간 남자 새끼들 자존심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무튼 의외이기는 하다.

상대가 아무리 강적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사내가 긴장하는 모습은 낯설었기 때문이다.

‘아르잔은…….’

녀석의 위치를 보니 아직 개전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

나는 승률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칼자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숨기는 게 있죠?”

“뭐?”

“선배님과 저 보석수 사이에 말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뚜렷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나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하시죠. 시간 있을 때.”

“…….”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칼자크가 툭 내뱉었다.

“건방진 새끼.”

여기서 욕을?

“델락이랑 비슷하기는 하군.”

“…….”

“저놈은 내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갔어.”

“팔보다 말입니까?”

“그래.”

“뭡니까.”

“가족.”

칼자크는 입을 닫았다.

할 말을 고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동생이 있었다. 나와는 나이 차가 많아서, 오히려 너랑 비슷한 또래였지. 산행에 같이 따라가겠다고 어찌나 우기던지 끝내 거절하지 못했어.”

“…….”

“실력은 없지만, 감은 좋은 녀석이었지. 늪지대 아래 있던 보석수의 존재를 가장 먼저 깨달았고, 뱀 새끼가 아가리를 벌릴 때 나를 밀어냈지.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내가 지켜야 했던 놈이 나를 지켰던 거야.”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계속 입을 닫았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거대한 보석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저 뱀 새끼를 따라다니며 셀 수 없을 만큼 싸웠다. 하지만 끝장을 보지는 않았지. 나는 밀린다 싶을 땐 물러나서, 훗날을 도모했다. 당시엔 그게 정답이라 여겼지. 내가 죽으면 동생의 복수는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한데.”

칼자크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지금 내 꼴을 보니 신중한 게 아니라 단순히 겁쟁이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

“시발, 별 얘기를 다 하네. 진짜 죽을 때가 됐나.”

“살아야죠.”

나는 링소드를 손가락에서 빼낸 다음 칼자크에게 건넸다.

“뭔데.”

“아티팩트입니다. 링소드.”

전에 암살자와 싸울 때 한 번 폭발시키기는 했지만, 링소드의 본체는 이 반지다.

반지만 있으면 몇 번이고… 까지는 아니고, 두세 번은 더 검을 뽑아 쓸 수 있다.

“나 검 있는데.”

“압니다. 여유분으로 쓰시지요.”

“왜.”

“전 검술 없이도 세거든요.”

“핫.”

칼자크가 입가를 비틀더니, 들고 있던 검을 칼집에 끼웠다.

나도 픽 웃으며 말했다.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반지를 회전시키는 걸로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데…….”

나는 칼자크의 휑한 오른 소매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느 손가락에다 끼워 드릴까요.”

칼자크는 말없이 나를 향해 중지를 치켜세웠다.

사람 참 싸가지 하고는.

“길이는 이 정도면 될까요?”

“조금 더 길게.”

“…이 정도?”

“딱 좋군.”

칼자크는 링소드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임무 전엔 항상 댄이 직접 칼을 가져다줬었는데.”

“…….”

댄은, 아무래도 동생의 이름이었나 보다.

죽은 동생의 이름을 가명으로 삼은 형의 심정은 어떨까.

동생이 없는 나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형, 누나라고 있는 것들도 딱히 호감이 가지는 않았고.

“저 새끼를 죽이면 댄이 기뻐할까?”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기뻐합니까.”

칼자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도 바뀌는 게 없지는 않겠죠. 저는 진혼이 산 사람을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놈을 죽이면 선배님의 마음엔 확실히 변화가 생길 테죠. 일단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쯤에서 아르잔의 위치를 확인했다.

능숙하게 벽을 타고 올라가던 아르잔은, 이젠 보석수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선배님.”

“왜.”

“그거 아티팩트입니다.”

“아까 말했잖아.”

“비싼 거니까 곱게 쓰고 돌려주십쇼.”

“하.”

쿠아아아아아-!

그 순간 귓전이 터지는 듯한 포효 소리가 울렸다.

난동을 부리는 보석수, 저 멀리서 튕겨 날아가는 아르잔의 모습이 보였다.

‘성공했군.’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급소가 확실하다.

역린을 찔렀을 때, 아르잔은 확신했다.

물론 이 뱀의 신체적 구조를 완전히 꿰고 있어서 생긴 확신은 아니다.

아르잔이 집중한 건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반응과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고통에 섞인 포효, 이 정도의 난동, 눈과 입에서 쏟아지는 핏물.

작은 비늘 하나를 꿰뚫었을 때의 반응치고는 너무 요란하다.

아르잔은 거센 기세로 날아가다, 동굴의 천장 근처에서 착지했다.

벽면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 상태로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전체적인 모습을 눈에 담는다.

‘새삼… 너무할 정도로 크군.’

일단 아르잔으로선 죽었다 깨도 죽일 수 없는 상대였다.

손에 쥔 비수로는 천 번을 찔러도 저놈을 죽일 수 없다.

저만한 덩치라면 과다출혈로 죽이는 데만 몇 날 며칠이 걸릴 거다.

아마도 저 괴물은, 오직 칼자크의 공격으로만 죽일 수 있을 거다.

도검선생의 실력이라면 오러 블레이드- 검염의 크기를 수 미터까지 키울 수 있고.

그 정도 크기의 검이라면 이 거대 뱀의 목을 자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니 아르잔의 역할은 교란이었다.

머리, 몸통, 꼬리.

셋으로 나눈 전장에서, 머리를 담당하는 게 그녀의 역할이다.

쿠아아아아아-!

분노한 보석수의 시야엔 아르잔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단잠을 자다가 최악의 고통과 함께 일어나게 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은 도주에 집중했다.

모든 신경을 온전히 회피에만 쏟았는데도 죽음의 위협을 끊임없이 느껴야만 했다.

동굴 내부 어디로 도망쳐도 보석수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고, 대부분의 공격을 직전에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격은 피했지만, 박살이 난 벽면, 튀겨진 돌조각 따위가 몸뚱이에 작은 상흔을 새겼다.

물론 이렇게 쭉 도망 다녀야 하는 건 아니다.

스걱!

보석수가 다시 한번 비명을 토했다.

‘사범님의 공격이 들어갔구나.’

보석수의 거체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아래에선 아마 칼자크의 공세가 시작됐을 것이다.

칼자크는 몸통 담당이다.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참격을 먹여 보석수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는 역할.

셋 중에 가장 강한 공격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잔은 보석수의 관심이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걸 느꼈다.

영악한 놈이다.

짐승인 주제에 아무리 화가 나도 분노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는다.

이 뱀은 이 짧은 공방을 통해서 적의 우선순위를 정했고, 방금 아르잔을 그 우선순위의 최하위로 내렸다.

이제 가장 경계하는 건 아르잔이 아닌, 저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는 칼자크일 것이다.

오히려 좋다.

이렇게 적의 주의가 멀어질수록 아르잔은 자연스레 기척을 감출 수 있고…….

그러한 환경에서 암살자의 전투란 가장 효율적인 법이다.

‘다음 기회.’

그때 이 보석수의 눈을 찌르건, 혀를 자르건 할 것이다.

뱀은 아직 아르잔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다.

상관없다.

이 전투는 장기전이 될 것이고, 그 모든 순간에 아르잔의 존재를 한 번도 놓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찰나라도 좋다.

이 공방의 어느 순간, 가령 칼자크의 다음 참격이 들어갔을 때, 그로 인해 놈의 주의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졌을 때, 혹은 아르잔의 이목에 절호의 기회가 포착됐을 때.

그때 이 보석수는 다시금 아르잔의 존재를 깨닫게 될 것이다.

* * *

그런 날이 있다.

머리가 유난히 맑은 날.

육체가, 정신이, 세포 하나하나가, 오늘이 절호조라고 주장하는 듯한 날이.

칼자크는 그런 날 보석수를 토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컨디션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전투 직전까지는 그랬다.

‘머리가 맑군.’

그리고 몸이 가볍다.

기분 탓인지 칼날을 둘러싼 검염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칼자크는 그 이유를 깨닫고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맹랑한 놈이.’

전투 직전에 말을 건넸던 애송이.

무언가 거창한 대화가 오갔던 건 아니다.

그놈이 의미 있는 조언을 건넸던 건 더욱 아니고.

하지만 때로는 속에 있는 걸 단순히 털어놓는 것만으로 머리가 맑아질 때가 있다.

칼자크는 문득 떠올리고 말았다.

스스로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말한 지 너무 오래됐다는 사실을.

생각이란 오래 품고 있을수록 무거워진다.

가끔은 내뱉는 것으로 그 무게를 줄여 줘야만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건방진 애송이가.’

덕분에 드문 경험을 하게 됐다.

최악의 컨디션으로 시작했는데, 싸울수록 머리가 맑아진다.

육체에 가속도가 붙는 것처럼, 검을 휘두를수록 오히려 날카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보석수.

위협적인 건 맞지만, 어딘가 전보다 약하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탓!

높이 뛰어오른 칼자크가 처들은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콰가가각, 보석수의 거체에 직선이 그어졌다. 이놈의 비늘이 이렇게 베기 쉬웠나?

칼자크가 입가를 비틀었다.

싸우는 도중에 점점 확신이 생기고 있었다.

오늘, 이 보석수는 내 손에 죽는다.

* * *

나는 채찍처럼 날아오는 보석수의 꼬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손목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튕겨냈다.

꼬리는 이 보석수의 주 공격수단이다.

바위만 한 크기에 금속만큼이나 단단한 비늘, 그리고 가공할 만큼 빠른 속도로 휘둘러지는 꼬리는 그 자체로 대량살상무기나 다를 바가 없다.

보석수 공략전에 있어서 가장 견제해야 할 부분이라는 뜻이다.

머리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르잔.

결정타를 입히는 게 칼자크.

그리고 꼬리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건 나다.

지금까지는 작전대로 잘되고 있다.

순조롭다.

달리 말하면…….

‘너무 잘 풀리고 있는데.’

보석수의 움직임이 서서히 굼떠진다.

칼자크가 입힌 상처가 슬슬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거다.

칼날에 암살자 놈들에게 뺏었던 독을 듬뿍 발라 놨으니까.

과연 오셀이 대보석수용이라고 호언장담한 만큼의 효과다.

캬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쿵 떨어졌다.

처음엔 무슨 선홍빛 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달랐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혀인가?’

즉 머리 쪽을 담당한 아르잔이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이다.

뱀에게 혓바닥이란 눈이나 코 이상으로 중요한 감각기관인데.

그걸 잘라내는 데 성공했으니, 저놈은 이제 이 전투에서 우리의 위치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이번 전투에서 가장 위험할 거라 여겼던 지점을 모두 지난 것이다.

남은 건 꾸준히 육체에 상처를 내면서, 한 번에 목을 자를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

‘…….’

그래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라고?’

약하지는 않다.

사실 지금도 매 순간 목숨을 걸고 있기는 하니까.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상대를, 칼자크나 아르잔은 그렇게 경계했던 걸까?

‘너무 쉬운데.’

머리가 차가워졌다.

상황이 낙관적일수록 더욱 긴장하라는 사형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쇄도하는 꼬리를 다시 한번 주먹으로 튕겨냈다.

콰앙!

보석수의 꼬리가 벽면에 처박혔다.

얼마나 거세게 충돌했는지, 벽면이 산산이 박살이 날 정도였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움직임이 격해지고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거다.

기회가 되면 나도 저놈의 꼬리를 완전히 박살 내면.

“──.”

그 순간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꼬리가 후려친 장소에 새로운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벽면 뒤에 공간이 있었던 것.

이상한 일은 아니었는데, 애초에 칼자크가 머물던 장소도 비슷한 맥락이긴 했다.

하지만 그 공간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벽면 뒤에 있었던 건, 셀 수도 없을 만큼의 하얀색 알.

심지어 이건.

‘이미 부화했-.’

나는 급히 전장을 보았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거대한 육체로 가리고 있던, 동굴의 또 다른 입구.

쿠르르르……!

그 너머로 흙먼지가 거칠게 일어나고 있었다.

“…시발.”

이럴 것 같더라.

나는 몰려오는 보석수 ‘새끼’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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