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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24화 (24/172)

24화

“뱀 새끼가 있다-!”

루안의 외침을 아르잔과 칼자크는 단숨에 깨닫지 못했다.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건 약 몇 초 후였는데, 새삼스레 이 동굴에 뱀 새끼-스파이어 스네이크-가 있다고 말한 게 아니라…….

‘새끼 뱀이 있다?’

칼자크는 순식간에 주의를 확장했다.

입구에서 몰려오는 다수의 기척을 감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뭐 이런 미친…….’

하지만 인지와 패닉은 별개다.

적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칼자크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대체… 언제 낳았던 거지?

그리고 어째서 난 그 사실을 몰랐던 거야?

직후 칼자크 또한 앞서 루안이 보았던 풍경을 목격했다.

벽면 너머의 공간을 확인한 것이다.

그곳에 있는 새하얀 알들을 확인하는 순간 발바닥부터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의도적으로 내게 숨긴 거라고?’

칼자크는 신선한 공포를 느꼈다.

보석수가 영리하단 건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루안과 아르잔에게 말해 줬던 건 애초에 칼자크였으니까.

하지만 오만했다.

보석수를 평생의 적수로 인정한 한편, 어느 부분에서는 이리 생각했다.

그래 봤자 짐승. 인간과 두뇌전을 벌일 만큼의 머리는 없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이 순간 깨달았다.

짐승이라 여겼던 괴물은 명백한 악의를 지닌 채 칼자크를 속였다.

칼자크가 보석수를 떠올리며 증오를 토해 낸 것처럼,

보석수 또한 칼자크를 역겨울 만큼 끈질긴 놈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알을 밴 사실을 감췄다.

이 괴물 놈에게 적을 속인다거나, 함정을 판다거나 하는 개념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사실을 숨김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터.

그래서 보석수는 거대한 몸뚱이로 반대쪽 입구가 안 보이게끔 틀어막은 뒤, 그 너머에서 자식들을 키웠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동굴을 보금자리로 삼은 것부터가 이 음험한 계략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칼자크가 보석수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일 때, 보석수의 자식들은 착실히 성장했을 것이다.

언젠가 제 어미 대신, 칼자크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칼자크, 이 병신아. 왜 눈치 못 챈 거야?’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유난히 약해져 있던 사파이어 스네이크.

아무리 겨울이라고 해도 이번 동면은 너무 길었고.

틈만 나면 주거지를 옮기던 놈이, 이 동굴엔 거의 몇 년을 머물고 있었다.

만약 루안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혹은 오늘 토벌하자는 놈의 주장을 무시한 채 반년이라는 시간을 더 보냈다면.

칼자크는 병신처럼 계속 기회를 엿보다가, 몇 개월 후 성장을 마친 뱀 새끼들한테 찢겨 죽었을 거란 뜻이 아닌가.

키에에에엑!

보석수의 자식들이 달려든다.

제 어미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크기지만, 오히려 덩치가 작은 만큼 날래다.

칼자크는 뒤로 물러나며 새끼 뱀 무리를 베었다.

찰나의 교전으로 깨달은 사실은, 이것들의 비늘 강도도 만만치 않다는 것.

‘대체 몇 놈이나 있는 거야?’

대충 보이는 것만 수십 마리다.

한두 놈씩 확실히 처리하려면 제법 많은 마나를 칼날에 주입해야 하는데, 지금 칼자크는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칼자크가 상정한 적은 사파이어 스네이크 단 한 놈뿐이었기 때문이다.

곧 복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뒷일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마나를 잔뜩 넣은 검을 신나게 휘둘렀다.

젠장맞을,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보석수가 만만하다고 느꼈던 건 루안과 아르잔이 합류해서도, 칼자크의 컨디션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놈이 알을 낳고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은데.’

마나가 바닥나면, 아무리 칼자크라고 해도 더 이상 이놈들한테 유효타를 입힐 수 없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죽어 줄 생각도 없다.

“시발.”

빠득 이를 간 칼자크가 칼날에 마나를 쏟아부으며 외쳤다.

“엄마 따라가고 싶은 놈부터 와라! 이 개새끼들아!”

* * *

뱀도 욕을 알아듣나.

정말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칼자크의 고함이 거슬린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칼자크의 패륜적인 외침은 뱀 무리의 이목을 끌었고, 나는 그사이 상황 판단에 필요한 시간을 획득할 수 있었다.

우선은 보석수.

‘가만히 있어도 죽을 상태긴 한데.’

달리 말하면 아직 살아 있다는 뜻.

혹시 모르지.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회복할지도.

이놈한테서 흐른 핏물이 웅덩이를 만들 정도였지만, 보석수란 놈의 생명력은 결코 얕볼 수가 없다.

나는 칼자크와 아르잔을 보았다.

일단 놀라운 건 아르잔의 움직임이다.

저 녀석은 지난번 암살자 놈들을 따돌렸을 때 보인 움직임을 선보이며 싸우고 있었는데.

부작용이 심한 기술인지, 멀리서 봐도 육체가 삐걱대는 게 보였다.

‘오랜 못 버티겠고.’

칼자크의 상태는 그보다 더 안 좋아 보인다.

보석수를 베기 위해 진력까지 끌어다 썼으니 어쩔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뱀 새끼들의 이목 대부분도 쏠려 있는 상태라, 까닥 실수하면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론만 말하면 지금 상태가 가장 괜찮은 건, 바로 나다.

이 말은 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도 나뿐이라는 뜻이다.

이 이상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어서, 나는 머릿속에 그려진 작전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탓!

연이은 타격에 너덜너덜해진 꼬리를 밟고, 도약한 뒤, 나는 뱀의 등을 질주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악-!

보석수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질긴 새끼.’

칼자크가 못해도 열 번은 베었을 텐데 아직 이 정도 기력이 남아 있다니.

동굴은 처음 말한 것처럼 거대했지만, 작은 언덕만 한 보석수의 발광을 수용할 만큼 넓지도 않았다.

난동을 부리는 보석수의 거체가 동굴의 지면과 벽면, 때때로 천장까지 두드렸다.

우르르르르르……!

동굴 전체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떨린다.

이 새끼 설마 이대로 전원 압사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떠올리고, 부정했다.

자식들도 있고, 보석수가 입은 상처가 얕은 편도 아니다.

무려 함정까지 파고 있던 음험한 놈이니, 이런 부분에선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묘한 상황.

아무튼 불판 위에 놓인 것처럼 지랄을 떠니 매끈한 뱀 등을 달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반대로 쫓아오던 새끼 뱀들도 무더기로 떨어져 나갔다.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뱀의 등을 느리게나마 내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발광하던 보석수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스으으으…….

공기가 어느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이러한 현상을 칼자크에게 들은 적 있다.

“────브레스다!”

저 밑 어딘가에서 칼자크의 외침이 들려온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보석수의 전신에서 냉기가 분출됐다.

* * *

숨결은 기도를 통해 내뱉는 게 일반적이지만.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뱀이나 개구리 같은 양서류는 피부로도 호흡한다고.

그럼 이놈은 피부로도 브레스를, 냉기를 분출할 수 있는 건가?

“──.”

아르잔은 휘몰아치는 설풍에 의식을 잃을 뻔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짝 으슬으슬한 정도였는데, 이제는 문자 그대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의식을 잃었다면 그렇게 됐을 거다.

“───하아아…….”

아르잔이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마나를, 이용해야 한다.

심장을 펌프질하고, 굼떠진 혈액의 순환을 촉진시켜야 한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냉기가 육체 깊숙한 곳까지 잠식한 상태라서.

너무, 춥다.

‘…움직일 수가 없어. 앞서 사범님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시린데.’

산란 직후라 몸이 허약해진 상태일 텐데, 어째서 냉기만은 더욱 강해진 걸까?

아르잔은 동굴을 둘러봤고,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브레스를 내뿜은 건 보석수만이 아니었다.

자식들 또한 어미의 의도를 이해하고 동시에 냉기를 분출시킨 것이다.

아르잔은 비수를 꽉 쥐었다. 사실 꽉 쥐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육체에 추위 이외엔 감각이 무디다.

이 말은, 지금 이게 아르잔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뜻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보석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아르잔조차 이 꼴이 됐다.

근처에서 칼을 휘두르던 칼자크나,

아예 보석수의 등을 질주하던 루안은 진작 동사했을 것이다.

아르잔의 의식도 차츰 흐려졌다.

입술을 세게 깨물어도 핏물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아르잔은 어쩐지 비현실적인 광경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냉기만이 풀풀 날리는 장소, 얼음을 조각해서 만든 듯한 보석수의 등 부근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한 광경을 말이다.

* * *

뒤질 뻔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는 방금 흐릿하게 아른거리는 영산을 보았다.

냉기를 분출한 것이란 사실을 1초만 늦게 깨달았어도 난 얼음 석상이 됐을 거다.

물론 지금 난 멀쩡하다.

얼어붙지 않았고,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콰가가가가가각!

나는 여전히 질주하고 있다.

보석수가 냉기를 분출한 그 순간까지도, 나는 내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기도 했다.

나는 일영보를 사용하며 전신, 특히 발바닥 쪽에 집중적으로 화기를 분출시켰다.

암살자 놈들과 싸울 때처럼 화력을 조절할 필요는 없었는데 지금 내 목적은 눈속임 따위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로 인해 내 걸음걸이는 타오르는 발자국의 형태를 남겼는데…….

나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습관대로 초식의 이름을 지어 줬다.

일영보日影步 염염질주炎炎疾走.

키에에에에엑-!

이 씹새, 많이 뜨거울 거다.

그러라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내공을 듬뿍 주입하고 있으니까.

약해진 보석수에게 이 불길은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발걸음에 무게까지 싣고 있으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가 무작위로 등을 후려치는 고통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어쨌든 방금의 브레스는 이 녀석에게도 최후의 카드였는지, 이제는 발버둥을 치는 움직임에도 힘이 없다.

덕분에 나는 한결 수월하게 질주하는 중이었으나.

시시시시싯!

보석수의 등을 절반 정도 달렸을 때, 떨어져 나갔던 보석수의 자식들이 다시금 나를 쫓아왔다.

어미를 위하는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다.

그 왜, 뱀은 냉혈한 같은 이미지가 있잖아.

‘그래도 저들끼리는 끈끈한가 보구만.’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할까.

일단 질주를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상태로 저 새끼 뱀들한테 포위당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그렇다고 끝까지 달리는 게 묘수도 아니고.

이 뱀의 길이가 어마어마하게 길긴 하지만, 당연히 끝은 있다.

뱀의 머리까지 이르게 되면 뛰어내릴 수밖에 없고, 지상에 떨어지면 포위당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생각하는 도중에도 염염질주를 운용하느라 내공이 뭉텅뭉텅 빠져나가고 있다.

때마침 뱀의 머리에 이르렀고, 나는 잠깐 숨을 고르며 뒤를 보았다.

새끼 뱀 무리도 이제 지척이다.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나는 주먹에 내공을 쏟아냈다.

백일식白日式 제육초식第六招式.

낙화落火.

홍염을 두른 주먹이 보석수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보석수의 비늘이 찌그러지며, 그 너머에 있는 두개골까지 박살 나는 게 느껴졌다.

잔여 내공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빠져나갔으나, 괜찮다.

이걸로 일단 보석수- 사파이어 스네이크는 확실히 절명시켰으니까.

쿠우우우웅!

보석수의 거체가 지면에 누웠다.

쫓아오던 보석수의 자식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제법 높은 곳에서의 추락이었지만, 이걸로 저놈들이 다쳤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들끼리 엉키며 한두 마리라도 압사당한다면 행운일까.

어쨌든 놈들의 추격에서 잠시 자유로워진 이 순간, 나 또한 지면으로 착지를 마쳤다.

“──.”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죽은 사파이어 스네이크가 보였다.

눈과 입에서 핏물 같은 게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모습, 아르잔이 자른 혀의 단면도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아가리로 직접 발을 내디뎠다.

키에에에엑!

잠시 후 정신 차린 뱀 새끼들이 나를 향해 몰려왔다.

어미의 죽음을 깨달았는지 대단히 흥분한 기색이다.

“후우우-…….”

나는 몰려오는 적을 보며 서서히 숨을 내쉬었다.

뱀의 아가리.

이곳이 내가 택한 전장이다.

축축하고, 기분 나쁜 곳이지만.

정면의 적만 신경을 쓰면 되는 곳.

적어도 포위당할 일은 없는 장소.

‘도망칠 곳도 없긴 하지만.’

나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생각도 없다.

이제 결말은 둘 중 하나다.

이 뱀 새끼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반대로 내가 죽거나.

카아아아아아악-!

물론 이런 냄새 나는 곳은 내 무덤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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