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내가 원하는 전장에 다다랐으나, 상황은 여전히 좋다고 볼 수 없다.
아가리 속에서의 전투가 시작되고 약 1분 정도가 흘렀을 때, 나는 칼자크에게 건넨 링소드가 간절해졌다.
‘쓰읍…….’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갖고 있을걸.
여전히 내 주력은 검이 아니라 권拳이지만, 지금처럼 내공을 아껴야 하는 상황에선 역시 날붙이가 좋다.
주먹과는 기본 공격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외공은 아직 형편없는 수준이라, 이 뱀 새끼들을 상대하려면 모든 순간에 내공을 동원해야 했다.
맨몸으로 맞섰다간 삽시간에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박살 나겠지.
오셀한테 독이 발린 비수를 맞고, 독에 깃든 극양의 기운을 내공으로 전환하지 못했다면 진작 죽었을 거다.
…돌이켜 보면. 그걸 단순히 행운으로 치부하는 게 맞을까?
나는 그 비수를 맞은 게 어떤 거대한 운명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잡생각이라서 나는 다시금 싸움에 주의를 집중했다.
…….
…….
몸이 뜨겁다.
달려드는 뱀 새끼들을 때리고, 걷어차고, 여유가 되면 잡아 찢는 와중에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몇 놈이나 죽였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따라서 위험하다.
슬슬 인지능력에도 영향이 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화기를 실은 채 주먹을 휘두르는데도 점점 추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어느새 내 숨결에는 입김이 묻어 나왔다.
‘안 좋은데.’
진짜 안 좋다.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도 딱히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상성의 문제, 내가 익힌 무공이 극양 계열인 덕분이다.
반대로 칼자크는 상성이 나빴다. 이런 적을 상대로는 본신의 힘 절반도 발휘하기 힘들겠지.
“하아…….”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단순히 생각해서 불꽃은 얼음을 녹이지만, 녹아내린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불길을 꺼트린다.
기본적인 상성을 떠나서 길게 싸울수록 내가 불리해진다는 뜻인데.
만약 내 경지가 화모수火侮水- 녹인 얼음의 물기마저 증발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장기전이건 뭐건 상관없겠지만.
지금의 나는 외공도, 내공도 턱없이 하찮은 수준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가 있다면, 역시 보석수의 자식들.
이것들의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냉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을 잠식했고, 나한테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하아아-.”
다시 숨을 토해낸다.
적은 이제 얼마나 남았지?
일단 시야에 보이는 수는 처음과 비슷한 것 같은데.
짜악!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꼬리에 뺨을 얻어맞았다. 더 세게 맞았으면 아예 이빨이 뽑혀 나갔을 수도 있겠다.
“이 새끼가…….”
나는 어머니한테도 맞은 적 없던 뺨을 맞은 답례로, 꼬리의 주인을 손수 찢어 죽였다.
그리고 입가의 핏물을 뱉으며 생각한다.
어쩌면, 오늘 죽을 수도 있겠는데?
…….
…….
어느 순간 내 정신은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몽롱해졌다.
안 아픈 곳이 없고, 오른팔은 특히 더 쑤셨는데 자세히 보니 팔뚝 쪽의 상처가 심각하다.
피도 많이 흘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은 빈혈로 인한 현기증과는 좀 다르다.
정신과 육체가 따로 분리된 듯한 감각.
아까처럼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손발은 착실히 적을 섬멸한다.
그러면서 나는 유난히 말이 많았던 셋째 사형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화날수록 강해진다고? 꼭 헐크 같구만.
- 화보다는 그냥 감정이 격해질수록 염화제일공도 공명하는 느낌이지만요. 그보다 헐크가 뭡니까?
- 있어. 녹색 피부에, 덩치는 엄청 크고, 힘도 장난 아니게 세고…….
- 오거?
- …생긴 건 비슷한데 전혀 달라.
수다쟁이로 유명한 셋째 사형은 열에 아홉은 쓸모없는 말을 내뱉었는데, 간혹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줄 때도 있었다.
그 조언이 마침 그랬다.
- 막내야, 너 여기 오기 전엔 용병도 했었다며.
- 아, 네.
- 알고 있냐? 용병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은 목숨을 걸게 돼.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용병이 맡는 일거리라면 가장 쉬운 임무조차 죽을 위험이 없지는 않다.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해도, 거의 모든 순간 목숨을 걸고 있는 건 맞다.
- 몇몇 놈들은 ‘목숨을 건다’라는 결심을 무슨 숭고한 것처럼 포장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단 거지. 그래도 그런 시련이 커다란 성장의 기회인 건 맞아.
- 잘 들어라, 막내야.
- 목숨을 배팅하듯 던지는 것과 한계를 넘어서는 건 전혀 다른 일이야. 왜냐면…….
“…독기와 끈기는 다르니까.”
나는 생전에 이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전장에서 죽었다.
깨달은 것은 그 이후, 죽음을 겪고 난 다음.
영산靈山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였다.
…….
…….
몸뚱이는 계속 뜨겁다.
목구멍은 화염을 삼킨 것처럼 화끈했고, 두개골 안에선 용암이 흐르는 것 같다.
그런데도 전신에선 날카로운 한기가 느껴지는 모순된 상황.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도 이제는 사라진 것 같다.
나는 계속 싸웠다.
어느 순간 이기겠다는 생각도 흐릿해졌고, 내 육체는 보다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서 움직였다.
내공이 바닥나는 그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서.
툭.
주먹을,
뻗었는데.
“…어.”
여태껏 뱀 새끼들을 확실하게 박살 내던 주먹이 허무하게 비늘에 닿았다.
뱀 녀석 또한 당황했는지 일순간 몸을 움츠렸으나.
시싯.
곧 아무런 통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물끄러미 맨주먹을 보았다.
단전을 쥐어 짜내도, 단 한 방울의 내력도 나오지 않는다.
고개를 기우뚱하던 독사가 태도를 바꾸며 나를 향해 덮쳐왔다.
캬아아아악-!
역겹게 생긴 뱀의 목구멍, 여전한 한기, 새하얗게 번뜩이는 송곳니가 보인다.
절체절명의 순간.
…….
…….
다르게 말하면,
한계를 넘어야 할 순간.
* * *
- 넌 재밌는 놈이다.
과거의 한때.
스승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 나는 천재라 불리는 자들은 수도 없이 보았다. 너의 위에는 네 명의 사형이 있는데, 그들 모두 천하에서 찾기 힘든 불세출의 재능을 가졌지. 그들 또한 이곳에서 너와 같은 수련을 했다.
- 한 달 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영산에서 살아남아야 했지.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책망받는 죄인처럼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 전원이 크고 작은 위기를 겪었지. 위기가 꼭 상처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녀석들 모두가 이곳에서 한두 번씩은 죽음을 느꼈다.
당시엔 ‘한두 번’이라는 단어가 내 폐부를 깊이 찔렀다.
스승님은 그런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 이 영산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느냐.
모른다.
너무 많아서 세지 못했다.
당시의 나로선 살아남기 바빴으니까.
- 27번이다. 한 달 동안 27번. 거의 하루에 한 번은 죽을 뻔했다고 봐야 할 테지.
-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나는 울컥해서 대꾸했다.
고작해야 한두 번의 위기밖에 겪지 않은 사형들과.
셀 수도 없을 만큼 죽을 뻔했던 나.
비교조차 안 되는 수준 차이에 비참함을 느꼈다.
실망스럽다.
스승님의 입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그리고 배드니커에선 무수히 들었던 그 말을 들을 거라 여겼다.
- 잘했다.
내가 놀라서 고개를 드니 인자한 표정의 노인이 보였다.
- 그간 숱한 위기가 있었다. 많이 다쳤고, 많이 고생했다.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죽음에 덤덤해질 수는 없지. 너는 가장 커다란 공포와 한 달을 겨뤘으나 극복했다. 참된 의미로 단련鍛鍊한 게지.
다시 생각해도.
나의 스승님에게 그토록 확실하게 칭찬받은 건 그때뿐인 듯하다.
- 아무래도 너는 염화炎火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 어째서입니까?
의아한 제안이었다.
만약 불길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대단히 뜨겁고, 열정적인 인물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 때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 고금제일공의 화 속성은 가장 끈질긴 자만이 대성할 수 있는 무학이니까.
무학에 있어서 스승님의 말은 대체로 진실이라는 것을.
* * *
보석수는 독사였을까?
그리고 보석수의 자식들은 어미의 독니를 이어받았을까.
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
송곳니가 팔뚝에 닿기 직전, 뱀 무리가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불길에 스친 낙엽처럼.
“──.”
머리는 멍하고, 대낮처럼 시야가 훤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는데, 지금은 따뜻하다.
……!
……!
새끼 뱀 무리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오감五感이 전체적으로 굉장히 무뎌진 듯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뱀 무리의 움직임은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느껴졌다.
‘…진입했군.’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귀가 완전히 나간 건지 내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더욱 남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웃어 젖혔다.
뱀도 미친놈은 피하고 싶은 건지 일순 멈칫했으나, 직후 한 마리가 나를 향해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리게 느껴졌다.
나는 날아오는 뱀의 꼬리를 잡은 다음 찢어 버렸다.
확실히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보다 쉬웠다. 여러모로 지저분해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저벅.
그리고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생각해 보니 처음이었다.
이 전투에서, 내가 먼저 저놈들한테 다가간 것 말이다.
내가 뱀 무리와 싸우며 가장 경계한 건 포위당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쭉 소극적인 수세를 취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뱀의 숫자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남은 건.’
얼추 열다섯 마리 정도.
나를 스스로 사지에 발을 디딘 얼간이라고 생각한 건지, 잠깐 주춤하던 뱀들이 다시 공격해 왔다.
아무래도 이것들이 어미에게 보석수란 이름을 물려받으려면 막대한 세월이 더해져야 할 듯싶다.
공격이 단순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 뱀무리에겐 교활함이 결여되어 있어서다.
그렇다면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한 지금, 이놈들의 수가 열이든 백이든, 이제 전혀 상관이 없다.
화륵.
홍염은 어느 순간 그 색이 바뀌어 새하얀 빛을 내뿜는 백염白炎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방이 백염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면 내가 백염 속에 있는 것이었다.
‘…염화제일공이 가장 끈질긴 사람만이 대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심법이 전투가 길게 이어질수록 점점 강해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점점 가열되며, 그와 별개로 사용자는 한기를 느낀다.
삐걱대는 몸뚱이, 가출한 듯한 정신, 고문과도 같은 고통.
이러한 요소는 매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지만, 아무튼 포기하지 않고 버틸수록 뜨거워진다.
-다시 말해, 점차적으로 강해진다.
꺼지기 바로 직전까지 타오르며, 제 몸집을 제한 없이 불리는 불길처럼.
육체 성능 또한 한계를 넘은 지점까지 나아간다.
끝내 과열 상태에 진입하면 전신에선 새하얀 불길이 나오는데…….
스승님은 이 상태를 화백火白이라고 불렀다.
오직 실전만이 진정한 성장을 이루게 하는 법이다.
죽을 고비가 없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성과.
그래서 나는 오늘의 실전이, 사투가 감사했다.
콰직.
마지막 뱀의 숨통을 끊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불길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느낌을 만끽하며.
추위는 이제 사라졌다.
…….
…….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훌륭하도다!]
[그대가 생명을 걸고 춘 한바탕 권무拳舞-. 이 무신武神의 오랜 잠을 깨울 제물로 합당한 것을 인정하겠니라.]
[연자여, 그대는 나의 첫 번째 신도가 될 자격이 있다.]
…이건 또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