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백노광白路光.
천하제일인이자 고금제일인.
영산의 무선이자 초월자.
그리고 나의 스승.
하루에도 몇 번이고 떠올리는 이름 석 자였지만… 역행한 이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올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스승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관용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이다.
“어떻게 그 이름을…….”
대체 무슨 수로 이 세상 존재가 스승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상대가 신적인 존재라고 해도 내 놀라움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그랬군. 그대에게 무공을 가르친 건 백노광이었는가. 하지만, 그자가 어째서 제자 같은걸…….]
“…….”
나는 무신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혼잣말에선 이유 모를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여태까지의 무신은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자애로운 모습만 보였지만.
지금은 다가오는 자를 단번에 벨 듯한 예기가 느껴졌다.
더는 파고들지 말라고.
본능이 경종을 울렸지만.
“제 스승님과는 어떤 관계십니까?”
무시하고 물었다.
내게 있어선 본능의 경종 따위, 가볍게 무시해도 될 만큼 중요한 일이라서 그렇다.
[…….]
무신은 침묵했다.
단지 그것만으로 나는 압박감을 느꼈다.
우스운 일이다.
대답을 종용하는 건 나였는데, 되레 부담을 느끼는 것도 나라니.
나는 어금니를 물며 버텼다.
기본적으로 실체가 없는 존재라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도 몰라서, 일단은 제단 너머를 노려봤다.
[말할 수 없네.]
“…….”
[착각하지 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말할 수 없는 게지.]
나는 저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해란 다른 문제였다.
“신이시잖아요. 비록 잊혔다고 해도 신인 당신을 누가 억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내가 잊히게 된 사연과 밀접한 연관이 있네.]
“사연이요?”
[연자여, 현 대륙에 신위를 지닌 자가 몇이나 되리라 생각하는가.]
신위를 가진 자.
신적 존재를 묻는 거라면.
72신.
13용왕.
아홉 정령신.
다섯 왕.
그리고 앙신.
나는 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신들을 차례대로 입에 담았다.
내 대답을 들은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자가 말한 존재는 신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네. 정확한 수는 아마 그 누구도 모를 테지.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전혀 짚이는 게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중심이 될 만한 절대신이 없기 때문일세.]
“절대신이요?”
생소한 단어다.
[달리 말하면 창세신이지. 알고 있는가? 모든 신화에는 창세創世에 관한 기록이 반드시 존재하네. 그것이 결여된 신화란 그 자체만으로 모순적이지.]
“…….”
[하나 이 세상에서, 어떤 신화를 찾아봐도, 창세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네. 72신의 필두, 13용왕의 로드, 아홉 정령신의 우두머리, 그리고 아마 그대가 말한 다섯 왕까지- 그들 모두 막강한 힘을 가졌으나, 창세와는 연관이 없지.]
무신의 시선이 나를 살피는 듯하더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그대들은 이러한 사실에 의아함도,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테지 모두 잊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잊힘’일세.]
나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생각해 보니 의아한 일이네요.”
그러자 무신이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내 말을 믿는 것인가?]
“완벽히 신뢰하는 건 아니고요. 다만 말씀하신 게 전부 사실이라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어서요.”
[그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인데… 혹시 그대는 영웅의 후예인가?]
나는 무신이 말하는 영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루안 배드니커입니다.”
[배드니커……! 연자는 흑요정 쿠세트의 후예였는가!]
흑요정 쿠세트는 저 절망적인 [암흑의 시대]를 종식한 영웅이자, 배드니커의 시조다.
나는 괜히 앞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뭐, 흑요정의 피는 흐릿하지만…….”
사실 내 겉모습은 부친보다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형제들 대부분이 흑발을 지니고 있으나, 나는 금발인 것부터가 그렇다.
눈동자만큼은 같은 보랏빛이지만.
“제 선조를 알고 계시군요. 혹시 그분도 무신님의 연자였습니까?”
[그렇지는 않네. 쿠세트는 오히려 내 동료에 가까운 사내였지.]
그러고 보니 무신은 약 2,000년 전에 죽었다고, 아까 탑을 오를 때 말했다.
그때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일단 흑요정 쿠세트가 활동하던 시기와 얼추 겹치는 셈.
나는 무신의 말을 듣고 어쩐지 묘한 감상에 잠기게 됐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둘.
한 명은 신이 됐지만 잊혔고, 다른 한 명은 영웅으로서 아직도 구전된다.
신이 돼서 잊힐지, 영웅이 돼서 기억될지…….
어느 쪽이 나은 결말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신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쩌면 연자라면 ‘잊힌 시대’의 진실에 닿게 될 수도 있겠군.]
“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만…….”
[강요할 생각은 없네. 이 일은 연자의 우선순위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도 좋아. 어차피 이러한 일은 알고 싶다고 파고들수록 멀어지는 법이니까……. 연자는 이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운명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면 됨세.]
“…….”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단언하겠네. 잊힌 시대의 진실 또한 은하검과 마찬가지로 연자에겐 득이 될 거야.]
나는 무신을 보며 물었다.
“혹시 잊힌 시대의 진실을 알아내는 과정에서 제 스승에 대한 일도 알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일세.]
무신은 그리 말했지만, 그것 자체가 대답이 됐다.
여기서 잠깐 고민.
스승님의 이름이 갑자기 등장했을 땐 크게 당황했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이게 그렇게 많이 놀랄 일일까?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스승님은 죽기 직전의 나를 영산으로 끌고 갔으며,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그것도 시간을 한참이나 거슬러서 말이다.
즉 스승님이 이 세상에 올 수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고…….
과거를 거스르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백노광의 성격이라면, 과거 신화의 시대 때 신들과 한판 쌈박질을 하고 다녔어도 이상할 건 없다.
문제는 스승님의 진의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를 과거로 보낸 게 단순히 대사형 때문일까? 나를 전보다 훨씬 성장시켜서, 대사형을 잡아 오게 하려고?’
이것만이 이유는 아닐지도 모른다.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게 더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무신이 말한 대로 ‘잊힌 시대’의 진실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딱히 없지만 그러한 확신이 들었다.
“좋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무신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쿠세트의 유지를 잇는 자가 그대 가문에 있을 테지. 높은 확률로 가주일 것이고.]
무신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자라면 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그대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야. 혹시 모르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나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음.”
이게 또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어찌 됐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딱히 바뀌지 않은 셈이다.
흑요정 영웅 쿠세트의 직계이자 위대한 가문의 가주.
동시에 황실의 검이자 처형인이기도 한 사내.
나의 아버지, 철혈공을 만나야 한다.
* * *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것뿐인데도 뒤질 것 같다.
- 백화가 끝난다면 그냥 잠이나 처자라.
스승님의 조언이 떠오른다.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원체 친절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니만큼 가끔 던지는 조언의 무게도 남달랐다.
‘백화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한 시간? 두 시간?
어쨌든 조언을 어긴 대가가 가혹하다.
“허억, 헉…….”
그냥 걷는데도 의식이 오락가락한다.
내가 뛰지 않고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는 이유가 되겠다.
분명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사파이어 스네이크의 시체가 있는 곳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연자여, 무리하지 말게. 그냥 조금만 쉰 다음에 움직이는 게 어떤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놈은 제 적입니다. 부딪치면 십중팔구 절 죽이려 들 거예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놈 지금 어디까지 왔습니까?”
[알 수 없네.]
“예?”
[방금까지 이 동굴 내부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칠죄검이 탑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야. 지금 나의 의식은 동굴과 분리돼서 검으로 옮겨진 상태일세.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단 뜻이지. 아마 이 동굴을 벗어나면 나는 잠에 빠질 걸세.]
“엿 됐네?”
[연자는 말이 좀 험한-.]
“됐고요! 마지막으로 파악했을 때가 어디쯤이었습니까?”
[음. 이곳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10분이면 당도할 거리였네.]
“그게 언제였죠?”
[10분 전?]
“에이, 시발!”
나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전신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억지로 뛰었다.
얼마 안 가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사파이어 스네이크와 그 새끼들의 사체가 쌓은 곳은 아직도 냉기가 풀풀 날렸다.
피곤한데 춥기까지 하니까 더 엿 같다.
아르잔이랑 칼자크는 어디 있지?
“도련님!”
그때 하늘에서 누군가가 툭 떨어졌다.
제 머리카락이나 새빨간 핏물을 전신에 덕지덕지 묻힌 여자였다.
물론 내가 아는 얼굴이다.
“아르잔.”
“무사하셨군요. 괜찮으십-.”
“선배님은?”
아르잔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지금 여기로 교단이 오고 있어.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줄 테니까, 일단 선배님부터 찾은 다음 여길 벗어나자고.”
“알겠습니다.”
다행히 아르잔은 눈치 있는 녀석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소한 건 따지지 않고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떴다.
나도 병신이 된 몸뚱이를 이끌며 주변을 좀 둘러보다가, 잠깐 입구 쪽을 보았다.
사파이어 스네이크가 틀어막고 있던 장소 말이다.
탁 트인 하늘과 산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이란 사실도 이제야 알았다.
나는 오랜만에 본 햇빛에 눈이 따가워 잠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쿠르르르르…….
“아.”
동굴 상태를 깜박했다.
“아르잔!”
칼자크를 찾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마 이 동굴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일단은 여길 나가고-.
“숙여!”
어디선가 아르잔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즉시 고개를 떨궜다.
무언가가 정수리 끝을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 감각이 말이 아니란 증거기도 했다.
뒤이어 아르잔이 나를 휙 지나가더니, 전방에 있는 누군가와 맞부딪쳤다.
‘벌써 왔구나!’
아니. 무신의 예상에 딱 맞춰 왔다고 해야 하나?
아르잔이 막아선 건 새빨간 로브로 전신을 감싼 괴인이었다.
이곳에서 하덴아이하르의 암살자 수십을 보았지만, 저놈의 복장은 한눈에 봐도 남달랐다.
즉 저 새끼는.
‘제사장!’
전신을 흉흉한 살기로 둘러싼 놈이었는데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당연하다.
상대는 교의 간부.
내가 만전의 상태라고 해도 백이면 백, 패배할 게 확실한 괴물이다.
아르잔을 보았다.
암살자 무리로부터 탈출할 때나, 사파이어 스네이크와 싸울 때 사용했던 정체불명의 힘은 쓰지 못하는 상황 같다.
그렇다면 저 녀석도 오래는 못 버틸 텐데.
빠악!
예상대로 복부를 걷어차인 아르잔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그 몸을 붙든 순간, 제사장이 시커먼 흑도를 휘둘렀다.
나와 아르잔을 동시에 벨 생각이다.
큰일이다.
이건 못 피한다.
까앙!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듯 출현한 칼자크가 제사장의 흑도를 쳐냈다.
“선배?”
“가!”
나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아르잔이 비틀비틀 일어설 동안 말했다.
“선배, 이 동굴-.”
“아니까, 가라고!”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구나.
알면서도 막을 생각이다.
나는 칼자크의 빠른 판단에 감탄하면서도, 그가 모종의 결심을 마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자크는, 정 안 되면 저놈과 같이 묻힐 생각이다.
“이 검 비싼 거라며.”
칼자크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멀쩡히 돌려줄 테니까 걱정 마라. 먼저 본가에 가 있어. 금방 따라가마.”
“…예.”
나는 짤막하게 대꾸한 다음 아르잔을 챙겼다.
“아르잔, 가자.”
아르잔도 침통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는 형태로 빠르게 동굴을 벗어났다.
배후에서 전투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동굴을 나선 순간.
쿠르르르르르릉-!
거대한 산사태가 일어난 듯한 소리가 사방을 울렸고.
보석수를 수용할 만큼 거대한 동굴 입구는 돌무더기에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