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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30화 (30/172)

30화

아르잔이 무너진 동굴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터덜터덜 그 앞까지 걸어가더니, 커다란 바위를 손으로 툭 건드렸다.

“위험하니까 떨어져.”

“아, 예.”

이런 막 일어난 붕괴의 현장엔 가까이 가면 안 된다.

언제 2차, 3차 붕괴가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아르잔이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왜 동굴이 무너져 내렸는지 모르는 것 같다.

계속 들렸던 동굴의 비명을 못 들었을 리는 없고, 정신을 차리고 얼마 안 됐던 걸까.

“놀랄 거 없어. 아까부터 무너질 전조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휘청거리다 엎어졌다.

“도련님!”

아르잔이 다급히 달려온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만 끄덕여 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집사, 카리스마가 엄청나더라.”

“예?”

“숙여!…였나?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궈지던데?”

“아. 그, 그건…….”

아르잔의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됐어. 그런 상황에서 존댓말을 고집하는 게 더 등신이지. 그보다 몸은 괜찮아?”

“제 걱정을 하실 게 아니라 도련님부터-.”

“집사가 멀쩡해야 날 나를 수 있을 거 아니야.”

“…아.”

아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을 모실 기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하자. 나 이제 진짜 한계라서, 지금 쓰러지면 한 며칠은 기절할 것 같거든?”

“말씀하십시오.”

“이대로 산맥을 내려가서 날 본가까지 데려가 줘. 서두르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거야.”

“…….”

아르잔이 입을 닫았다.

“칼자크가 마음에 걸려?”

“…그건.”

“이해해. 나도 마찬가지니까.”

“…….”

아르잔이 탐색하듯 나를 보았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해. 이건 인도적인 문제가 아냐. 효율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나는 칼자크의 마지막 외침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름 아닌 선배님이 그걸 바랐어. 그 찰나에,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라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당히 놀랐다.

대사범, 도검선생.

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실은 은연중에 무시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영산에서 보았던 스승님, 다른 사형들과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면서 말이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의 생각이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완력만이 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방금 보였던 칼자크의 모습은, 나에게 하여금 충분히 그를 ‘강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기다리거나 돌아가는 건 오히려 선배님을 모욕하는 거야. 그러니 우리는 그 사람 뜻에 따라 산맥을 내려가야 해. 이해했나?”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래서 정확히 며칠 남았더라?

동굴에서 사흘을 보냈고, 산맥에서 며칠을 헤맸지?

‘아…….’

큰일이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급격히 졸렸다.

나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고 싶었지만, 시야가 차츰 흐릿해져서 생각을 잇는 것조차 힘들었다.

“내 주머니에… 지도가 있거든……? 암살자 놈들한테 뺏은 거… 그걸로 길 찾고… 아, 그리고 금화는… 원래 있던 거니까 신경 쓰지…….”

“도련님!”

나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어쩌면.

다시 눈을 뜨면 본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 * *

가호식.

오직 위대한 가문의 혈통만이 참가할 수 있는, 명실공히 제국 최대 행사.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가호식은 단순히 신에게 놀라운 재능을 하사받는 자리가 아니다.

이 중요한 행사엔 언제나 제국의 실세 대부분 참석한다.

처음엔 제국을 이끌어 갈 젊은 피를 직접 보고, 잡음 없이 행사를 진행 시킨다는 목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친목을 도모하는 교류회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커졌다.

어쨌든 제국을 지탱하는 유명 인사가 한곳에 모이는 자리이니, 정치적인 움직임이 없을 수가 없는 것.

‘제국 귀족의 정확한 서열을 알려면, 가호식의 좌석 배치를 눈여겨보아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아무튼 제국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가호식이니만큼, 그 준비와 진행 또한 평범한 가문은 맡지 못한다.

이 영광을 허락받은 것은 명문 귀족 중에서도 단 세 곳뿐인데, 이는 제국 황실을 포함해서다.

배드니커.

현재 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위를 떨치고 있는 가문 중 하나.

고대 요정어로 [대지]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이 영지는,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큼 비옥한 땅과 아름다운 경관을 가졌다.

매년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많은 관광객이 찾기도 한다.

그러한 구경꾼은 물론이고, 평생 이곳에서 산 영지민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금지가 있다.

[나비의 숲]이라고 불리는 장소다.

이 땅의 주인인 배드니커의 본가는, 이 숲의 가장 깊숙한 곳-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당도할 수 없는 장소에 세워져 있다.

나비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은 둘.

배드니커의 핏줄이거나.

가주에게 그 자격을 인정받았거나.

“후우.”

루안 배드니커의 모친인 루시아는 후자의 경우다.

그녀가 철혈공의 부인 중 한 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애초에 다른 귀족가의 여식이었던 그녀에게 배드니커의 핏줄은 흐르고 있지 않으니까.

그 때문일까.

루시아는 일전부터 본가에 있을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후우…….”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본가에 오고 이제 곧 한 달.

아직 그것밖에 안 지났다니.

‘체감상 일 년은 된 것 같은데.’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본가까지 달려온 건 좋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콜록.”

루시아가 기침하며 먼지를 뱉어냈다.

거의 창고나 다를 바 없는 허름한 공간이 그녀에게 배정된 방이다.

루시아는 본가의 하인들도 이보단 좋은 방에서 지내는 걸 알고 있다.

원래부터 몸이 약한 편이라, 요즘엔 계속 기관지가 가렵고 두통이 심했다.

방에 달린 작은 창문은 커다란 방을 온전히 환기하기엔 너무나도 작았다.

청소시킬 하인도 없고, 그렇다고 직접 하기엔 방이 쓸데없이 컸다.

루시아는 최소한 침상만이라도 깨끗하게 치웠지만, 딱히 큰 효과는 없었다.

“유치하기는.”

그러나 루시아는 덤덤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이러한 대접의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철혈공의 부인들.

한 명을 제하면 안주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잔챙이들이 유치한 견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가에 철혈공이 있을 때는 끽소리도 못 하던 주제에 말이다.

하지만 유치함을 떠나서, 루시아는 그들의 괴롭힘이 끈질기고, 집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로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곧 있을 가호식 때문에 객실에 여유가 없어서…….”

비어 있는 방이 뻔히 보이는데 그런 말을 하거나.

“오늘 재료가 모두 소진됐습니다. 밀빵이 조금 남았는데 이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좀 굳기는 했습니다만.”

식당을 갈 때마다 계속 음식이 없다는 둥 말을 지껄인다거나.

“죄송합니다, 부인. 현재 남는 손이 없어서 부인의 가사를 수행할 사람이 없습니다.”

방 청소는 물론, 세탁까지 스스로 떠안게 됐다거나.

“의복이 찢어지셨다고요? 그런데 남는 옷이 이것밖에…….”

다음 날 의복이 모두 찢어져 있어서 말했더니, 기분 나쁘게 웃으며 하녀복을 준다든가.

사소하다.

루시아는 이러한 괴롭힘 모두가 사소하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루시아는 잘나가는 귀족이 아니었다.

극북의 땅.

과거 얼음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영지 [콜랜드]가 그녀의 고향이었다.

콜랜드는 일단 제국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변방의 영지는 사실 별개의 나라로 봐도 이상할 게 없다.

제국의 영향력은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환경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암흑 교단이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제국의 깃발 아래 뭉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

제국민 대부분이 그런 자들을 같은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고 차별한다.

아예 생김새가 다른 이종족보다는 형편이 낫지만…….

그러니 콜랜드는 변방의 영지보다는 작은 왕국에 가까운 곳이었고, 루시아는 그 작은 땅의 공주 비슷한 신분을 가졌었다.

위로 형제가 열 명이 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콜랜드는 춥다는 걸 빼면 딱히 특징 없는 땅인데.

그런 가문의 여식에게 철혈공이 관심을 가진 것은, 한때 콜랜드 가문에서 제국 최강의 검사가 배출됐기 때문이었고.

벌써 몇백 년 전의 케케묵은 이야기다.

루시아는 픽 웃었다.

콜랜드의 왕궁은 이 배드니커의 저택보다도 작았다.

창고에서 자는 거? 나쁘지 않다. 불을 피우지 않아도 따뜻한 게 어디야.

음식이 없어? 밀빵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게 질리면 주방을 빌려서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방 청소나 세탁도 질릴 만큼 익숙하다. 몸만 건강했다면 아예 이 방을 윤이 나도록 만들었겠지.

옷이건 신발이건, 찢어지면 꿰매면 될 일.

그래. 이러한 모욕, 굴욕 따위는 루시아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고, 자존심이 멀쩡한 것도 아니지만.

하나뿐인 아들인 루안을 위해서라면 모두 감내할 수 있다.

루시아가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본가에 들러붙은 이유였다.

‘올해의 2차 가호식에 루안을 참여시킬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가호식은 5년을 주기로 기간 동안 두 번 열린다.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한 번씩.

루안이 가호 하나 받지 못하고 가문에서 쫓겨난 게 올해이니, 현실적으로 이번엔 힘들 것이다.

각 가문에서 가호식에 참여시킬 수 있는 인원은 최대 5명.

그리고 수많은 자식을 가진 철혈공이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선 가호식 경쟁률이 치열했다.

가호식은 재능에 따라 두 번까지 받을 수 있으니까.

그 귀중한 기회를 받았음에도 단 하나의 가호도 얻지 못한 루안에겐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루시아는 당초의 계획을 바꿨다.

총 2주에 걸쳐서 진행되는 가호식.

그 사이에 있을 교류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분명 대사범들도 참석할 테니까.’

배드니커에서 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열 명의 빈객.

무려 그 철혈공이 직접 초빙한 제국의 강자들이 이번 교류회에 모습을 보일 예정이다.

운이 좋으면 그들의 눈에 들어서 제자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번 교류회에 참석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자들이 그러한 목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교류회는 오늘부터.’

루시아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못난 외모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치장이 어설퍼서 그런지 뭔가 애매하다.

어쩐지 빈곤함이 풀풀 풍기는 게, 일단 명문 귀족 가문의 부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허리를 쭉 폈다.

당당함마저 없다면 초라함만이 남는 걸 알고 있으니까.

루시아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복도에서부터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들을 지나쳐서 교류회가 열리는 장소- 저택 1층의 메인홀로 향한다.

도착하니 우아한 차림새의 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테이블, 향긋한 와인 향과 은은하게 깔린 음악.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도 홀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마치 이곳에 있는 자들의 수준과 교양을 말해 주는 것처럼.

루시아는 살짝 위축됐지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잠깐 실례합니다.”

그때 루시아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옷차림을 보니 본가의 집사였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느냐?”

“입장 전에 신원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느 가문에서 오셨습니까?”

“…….”

루시아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얼얼해졌다.

신원 확인이라고?

“나를… 모른단 말이냐?”

“송구스럽지만… 아.”

그제야 루시아의 얼굴을 보던 집사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루시아 부인이셨군요.”

그 순간 홀에서 희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루시아가 보니 익숙한 낯짝이다.

철혈공의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

그들이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었다.

“모처럼의 교류회인데, 물 흐리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어쩜, 그러니 평소에도 얼굴을 좀 자주 비췄어야지.”

“글쎄요. 그것보단 품위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하긴. 저 기워 붙인 드레스는 좀……. 제 시녀한테 입히라고 해도 안 그러겠어요.”

뒷담이라고 하기엔 큰 목소리다.

어쩐지 연주 소리도 멈춘 것 같아서, 루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못 들은 척 그 자리에 꼿꼿이 섰다.

모두 한때의 치욕이다.

루안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확인이 끝났다면 이만 들어가도 되겠느냐?”

“음.”

그런데 집사는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송구스럽지만, 부인께선 혼자 오셨습니까?”

“무슨 의미지?”

“이번 가호식엔 예상 이상으로 많은 가문이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가문의 원로회에선 불필요한 혼란과 만에 하나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교류회의 참석 조건을 새로 추가했습니다.”

집사가 기분 나쁜 얼굴로 픽 웃더니 말했다.

“보필할 수행원이 없다면 이번 교류회엔 참석하실 수 없습니다.”

“뭐?”

“실례지만 부인,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멍하니 있는 루시아의 귀에 다시 한번 비웃음이 들렸다.

“푸훗.”

아까와 다른 점은,

이번엔 비웃는 자들이 단순히 철혈공의 부인들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 사람이군요. 그 왜, 콜랜드 출신이라는…….”

“아아. 왠지 모르게 생김새가 거북하더라니.”

“저 머리카락 좀 봐요. 소름 끼쳐라.”

“하아. 돌아간다니 다행이군요.”

“…….”

루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면전에서, 그것도 배드니커의 사람이 이런 식으로 모욕할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는데, 그 순간 집사가 손을 뻗었다.

루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하니, 자신을 억지로 끌고 나가려는 것인가?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도를 넘었지 않나.

콱.

뻗어지던 집사의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검은 장갑에 둘러싸인 커다란 손은, 건장한 남성의 손을 너무나도 손쉽게 감췄다.

“크윽…….”

손에 느껴지는 악력에 인상을 찌푸리던 집사가 잠시 후 표정을 굳혔다.

어, 어어, 하며 말끝을 흐린다.

“수행원이라면 여기 있습니다.”

낮고, 강직한 목소리.

“루시아 님은 제가 모시도록 하지요.”

어느새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일동의 시선이 집중된 곳엔 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루시아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당황스러운 인물.

“괜찮겠지요?”

철혈의 징수인.

케이안이 콧수염 밑의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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