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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57화 (57/172)

57화

결국 그날은 지하도서관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루 이틀 정도 더 투자해서 찾아볼까도 싶었지만, 이제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수련회를 위한 준비 시간도 필요하니까.

후웅-.

내질러진 주먹이 보인다.

새까만 장갑에 둘러싸인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시야를 막으니, 꼭 갑작스레 밤을 맞이한 듯한 느낌이었다.

후웅!

나는 완전히 한밤중이 되기 전에 고개를 비틀어 다시금 낮으로 돌아왔다.

상대의 공세는 이제 시작이다.

뻗었던 주먹을 펴서 즉시 내 옷깃을 낚아챘다.

요 며칠 사이, 몇 번이고 내던져졌던 기억이 떠오르니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다만 이번엔 억지로 발버둥 치지 않고, 상대의 끌어당기는 힘에 오히려 힘을 실었다.

나는 공중제비를 돌며 제법 멋들어진 착지를 마쳤다.

“…….”

나를 내던진 케이안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훌륭한 낙법입니다.”

“…경이 사정을 봐줘서 그렇지.”

끝까지 옷자락을 붙잡지 않고 도중에 놓아줬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훨씬 추레한 꼴로 착지했을 것이다.

등이나 엉덩이로 착지하는 꼴이 그렇다.

“모의전이잖습니까. 꼭 전력을 다할 필요는 없지요.”

맞는 말이기는 하다.

이것은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한 모의전이며, 목적 자체가 서로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거의 실전에 가깝게 싸우는 것도 좋겠지만…….’

나와 케이안, 둘 다 딱히 실전 경험이 부족한 편은 아니다.

그럴 바에야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수련하는 게 좋다.

댕- 댕-.

어딘가 먼 곳에서 종소리가 났다.

이 암울한 종소리는 믿을 수 없겠지만,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동시에 경계를 풀었다.

“수고했어. 덕분에 얻은 게 많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빈말이 아니다.

나는 요 일주일 동안 케이안과 진득하게 대련하며 정신과 육체 사이의 괴리감을 거의 없앴다.

케이안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몇 주는 더 걸렸을 테지.

이런 미세한 조정일수록 보다 격 높은 상대가 필요하니까.

어쨌든 숙제 중 하나를 드디어 끝낸 기분이라 마음이 가벼웠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던 케이안이 지나가듯 말했다.

“그러게.”

수련회를 말하는 것이다.

내일부터 시작되니까, 오늘 저녁엔 이제 이동해야 한다.

딱히 더 할 일도 없어서, 나는 점심을 먹고 가볍게 짐을 챙긴 다음 곧바로 출발할 생각이다.

“수련회에 참가하는 인원은 총 43명이라고 합니다.”

“음. 많은 거야, 적은 거야?”

“지난번보다는 많습니다. 평균적으로도 그렇고요. 게다가 이번 기수期數엔 유난히 재능이 뛰어난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

“헬빈가의 삼남과 루비에타가의 막내딸, 게다가 가호식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레인저 하이드 경의 독남도…….”

나는 케이안이 말하는 놈들을 대충 머릿속에 박았다.

“그리고 굿스프링가의 삼녀도 있지요.”

세렌이 남았다는 말은 다소 의외였다.

굿스프링인 녀석으로선 딱히 배드니커의 수련회에 참가할 메리트가 없었던 것.

오히려 양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참가하는 게 손해일 수도 있다.

굿스프링의 커리큘럼에 불만이나 부족함을 느꼈다고 보일 수도 있으니까.

가문 차원에서 권장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 녀석도 이걸 모르진 않을 텐데.’

여러모로 특이한 녀석이긴 하지만, 멍청한 편은 아니니.

“오후에 수련회 캠프로 향하는 마차가 출발한다고 들었습니다.”

“마차?”

“의복과 무기 이외엔 아무것도 지참하면 안 된다더군요. 기본적인 생필품은 저쪽에서 모두 제공한다고 들었습니다.”

“아하.”

딱히 묻지 않아도 필요한 정보를 알아서 척척 말해 주니 편하다.

일 잘하는 집사가 있다는 건 이렇게 좋은 일이다.

왜 저택의 다른 녀석들이 케이안을 탐냈는지도 알 것 같은 기분.

아마 배드니커에서 이토록 다재다능한 사람은 달리 없지 않을까?

‘칠죄검은 챙겨도 되려나.’

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그냥 그대로 가기로 했다.

딱히 무기로 쓰는 건 아니지만, 일단 겉모습은 칼이니 제지당하지는 않을 거다.

달리 걸리는 게 있다면 철혈공한테 받은 마도구인데, 이것도 겉모습은 평범한 반지니 괜찮을 것 같고.

나는 밥을 먹고 씻은 다음, 최대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방을 나서려는데, 불현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예.”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뜻밖의 얼굴이었다.

“너는 그러니까…….”

“제인입니다.”

맞아, 징수인 제인.

나와 헥토르의 대련에서 심판을 봤던 녀석.

잊은 건 아니다.

생긴 거랑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무슨 볼일이야?”

“가주님께서 이걸 도련님께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게 무언가를 하나 내밀었다.

아주 고급지게 생긴 목함이었는데, 무슨 장치를 해놨는지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열렸다.

속에 있는 건 붉은 보석처럼 생긴 것이었다.

“이게 뭐야?”

“영옥입니다.”

“영옥? 아-.”

철혈공이 내게 준다고 했던 영약.

그 이름이 영옥이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영옥이란 녀석을 내려다봤다.

‘영약이 원래 희한하게 생긴 게 많다지만…….’

이거, 먹을 수는 있는 건가.

그냥 삼키자니 너무 크고, 씹으면 이빨 다 나갈 것 같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제인이 떠나려다 말고 뭐냐는 얼굴로 바라본다. 이상하게 무례한 듯 정중한 녀석이다.

징수인이란 놈들은 원래 다 괴짜인가.

“설명이 좀 더 필요한데. 가주님이 달리 말씀하신 거 없었어?”

“딱히 없으셨습니다.”

“음…….”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니 제인이 말했다.

“그러나 영옥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제가 답변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 부탁해.”

“이것은 영옥, 혹은 현령옥顯靈玉이라고 불리는 영약입니다. 극히 일부의 정령에게서만 얻을 수 있지요.”

“정령한테서?”

“물론 정령에게 물리적인 개념은 없습니다. 당연히 물리친다고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미쳐 버린 정령은 조금 다릅니다.”

“미쳐 버린 정령이 뭔데?”

“말 그대로 폭주한 정령입니다. 현상계에 너무 오래 머무른 나머지 원치 않게 구현화해 버린 정령을 그렇게 부르는데, 듣기로 영적인 존재에게 육체를 얻는 건 격락과 다를 바 없다더군요.”

몸뚱이가 생기는 게 격락이라니…….

나로선 전혀 이해 가지 않는 개념이지만, 애초에 정령은 생물이란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존재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빛깔로 봐선 불의 정령, 그것도 최상급에게서 얻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가주님께서 타스마스 화산지대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얻으신 게 아닐까 합니다.”

“복용법은? 그냥 먹으면 되나?”

보통 좋은 영약일수록 입안에 넣는 순간 육체에 흡수되기 쉬운 액체, 혹은 젤리 같은 형태로 바뀌기 마련이다.

언뜻 봐선 보석처럼 보이긴 해도 의외로 먹기 편할 수도 있단 뜻인데…….

“평범한 영옥이라면 그랬을 테지만… 글쎄요. 이건 아마 천천히 녹여서 소화해야 하실 겁니다.”

“아하. 입안에서 얼음 굴리듯이?”

“그게 아니라 마나로 하는 겁니다.”

그치.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냥 표정이 하도 딱딱해서 농담한 것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명 고마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제인이 떠났고, 나는 곧바로 영옥을 손에 쥔 채로 마나- 즉 내공을 주입해 봤다.

“…오.”

손이 후끈거린다.

이 딱딱하던 금속은 마나에 닿는 순간 살짝 겉껍질이 까지며, 극양의 기운이 조금씩 내게로 흡수됐는데…….

제인이 말한 ‘녹여서 흡수한다.’가 어떤 의미인지 즉각적으로 이해했다.

‘굉장한데?’

영옥에서 흘러나오는 극양의 기운은, 염화제일공을 익힌 나조차 별다른 정제가 필요 없을 만큼 순도가 높았다.

거의 있는 그대로 흡수해서, 받아들이면 된다는 뜻.

‘게다가-.’

영옥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란 단순히 내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게 전부가 아닐 거다.

마나를 주입하며 대략적인 구조를 파악했는데, 이 영옥이란 놈은 속으로 들어갈수록 단단해지는 구조였다.

즉 갈수록 녹여내는 과정에 소모되는 내공, 심력이 커진다는 뜻인데…….

큰 틀에서 보면, 이 영옥을 녹여 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수련이 될 터.

아마 영옥을 전부 소화했을 때쯤엔, 내 수준도 크게 증진되어 있지 않을까?

“…가주님답군.”

단순히 상을 주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또 강해질 단서를 함께 던지는 것.

자식들의 성장에 무엇보다 중점을 두는 철혈공다웠다.

“좋아.”

당분간은 영옥을 품에서 떼 놓지 않아야겠다.

다만 보관하는 방법이 마땅찮았는데, 당장은 그냥 들고 다니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만약 수련회에서 그게 뭐냐고 딴지를 걸면?

“가주님이 줬다고 하지 뭐.”

* * *

이후 나는 밥을 먹고 씻은 다음, 최대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저택을 나섰다.

저택 정문 앞에는 커다란 마차가 있었다.

앞에 있던 기사 한 놈이 나를 보더니 말갛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루안 도련님.”

“안녕. 좋은 저녁이군.”

“하하. 아직 날이 풀리진 않았지만요. 수련회로 가시지요?”

“응.”

“타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탑승했는데, 그곳에 뜻밖의 얼굴이 있었다.

“…윽.”

헥토르였다.

이 녀석은 못 볼 걸 봤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니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뭐요.”

“…무엇이 말이냐.”

“막둥이 본 표정이 아니잖아.”

“마, 막둥이.”

헥토르는 벌레 씹은 표정을 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과 부딪친 게 뜻밖의 일도 아니었다.

이놈도 배드니커의 핏줄이고, 그 말인즉슨 당연히 본가 저택에서 지낸다는 뜻이다.

정문 앞에 주차돼 있던 마차에 동승한 상황이 이상할 건 없다는 뜻.

아무튼 나는 헥토르의 앞에 앉았다.

다행인 점은 고급 마차라서 안쪽이 넉넉하다는 것이다.

‘희한한 마차네.’

앉은 자리가 푹신하고, 안에선 뭔가 좋은 냄새도 났지만.

그와 별개로 내부엔 창문이 없었다.

바깥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내 감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외부와의 소리도 차단된 것 같다.

무슨 죄인을 호송할 때나 쓸 법한 마차.

물론 의도는 짐작이 간다.

아마도 수련회 캠프의 정확한 위치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때 입구가 살짝 열리더니, 아까 전의 기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곧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두 분 모두 혹 잊은 물건은 없으신지요?”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시간은 세 시간 정도 소모될 예정입니다.”

“오래 걸리네.”

나는 [나비의 숲]의 정확한 크기를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 설비를 갖춘 마차로 세 시간이나 걸린다면, 마을과 마을 정도로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는 정확한 거리, 혹은 방향을 모른다면 결코 본가로 돌아올 수 없는 거리이기도 하다.

“혹시 도중에 허기가 지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응.”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떠났다.

‘출발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마차가 다그닥거리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발터 경과 친해 보이는군.”

멍하니 있는데 헥토르가 뜻밖에도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방금 인사를 한 기사의 이름이 발터라는 걸 깨달았다.

“나쁘지는 않은 편이지.”

“어떻게? 너는 본가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형님, 지금 비꼬는 거야?”

“그, 그렇지는 않다.”

헥토르가 고개를 저은 다음 말했다.

“발터 경은 철혈기사단의 단원이고, 그중에서도 대단히 자존심이 높은 남자다. 숙부가 추려낸 별동대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말이다.”

숙부라면 철혈기사단의 단장, 루크 배드니커를 말하는 것이다.

“아하. 그래서였군.”

“뭐가 말이냐?”

“한번 붙어 봤는데 다른 기사보다 잘 싸우더라고.”

“싸우다니?”

헥토르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요 1주일 동안, 나는 해가 떠 있을 때는 연무장에 쭉 머물렀다.

그런데 당연히 연무장이란 장소는 나 혼자만 쓰는 곳이 아니다.

케이안과 겨루고 있는 모습을 기사들이 구경했고, 그중에서 몇몇 호승심을 이기지 못한 놈들은 내게 모의전을 요구했다.

나로서도 다양한 사람과 싸우는 게 나쁠 건 없어서 받아들였고…….

…발터는 그 기사 중에서도 비교적 잘 싸우는 편이었다는 뜻.

이상의 사정을 간추려서 얘기해 주니 헥토르가 씁쓸한 표정과 함께 중얼거렸다.

“철혈기사단의 인정을 받은 거로군.”

“오버하기는. 그냥 몇 번 겨룬 게 다야.”

“그게 인정받은 것이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은 상대하고는 결코 싸우려 하지 않으니까.”

헥토르는 그리 말하고 나를 보았다.

“루안 배드니커, 비록 대련에선 내가 패배했지만, 수련회는 다를 것이다. 난 이곳에서, 반드시 네놈보다 높은 점수를 받겠다.”

모종의 결심이라도 한 건지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불현듯 철혈공이 내게 1위를 노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이 녀석도?’

아마도 그런 듯하지만, 딱히 묻지는 않았다.

이후엔 대화가 끊겨서, 다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대사형이 떠올랐고, 영산에 대한 기억이 스쳐 갔으며, 마지막은 스승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 방심하지 마라.

거울 너머에서, 스승님이 했던 말.

- 명심해라, 막내야.

- 오늘 이 만남이 없었다면, 너는 한 달 뒤에 죽었다.

그 얘기를 들은 지 벌써 1주일.

즉 앞으로 약 3주일 전후로, 내겐 커다란 위기가 찾아올 확률이 높다.

그리고 수련회는 총 6주에 걸쳐서 진행된다.

다시 말해서.

‘…이번 수련회에서,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나는 괜히 마차의 벽면을 보았다.

어쩐지 바깥 풍경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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