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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68화 (68/172)

68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두 데려다 놓고, 24시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지 사흘 밤낮을 토론하면 이 수련회의 시간표가 탄생하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 만큼 수련회의 일정은 빡빡했다.

가끔 주어지는 저녁의 휴식 시간이 아니었다면, 앓아누운 영도가 벌써 몇 명은 나왔을 것.

“오늘 하루도 어찌어찌 끝났구나…….”

에반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카리스도 테이블 위로 철퍽 엎어지며 덧붙였다.

“…진짜 시간 드으으럽게 안 가네.”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난 게 말이냐?”

“그러게. 과자 먹고 싶다.”

“난 고기……. 비계 엄청 많고, 향신료 팍팍 뿌린 몸에 엄청 나쁜 놈으로다가.”

“난 맥주 한 잔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죽을 것 같다. 진짜로.”

나는 읽고 있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근데 죽진 않았잖아.”

“응?”

그러자 주변에 있던 녀석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뭔 소리야?”

“저놈 또 괴상한 소리 한다.”

“에반, 룸메 관리 안 하냐?”

이 새끼들이?

요 며칠 동안 좀 친해졌다고 말에 필터링이란 게 없어졌구만.

어쩔 수 없이 책을 덮으며, 이 우매한 놈들에게 친절히 설명해 줬다.

“뭔 소리긴. 여기 교관진들이 그만큼 유능하다는 말이지.”

근처에 있는 녀석들이 눈을 깜박이며 나를 봐서, 나는 덧붙이듯 설명했다.

“죽기 직전까지 굴리는 것 같은데 실제로 쓰러진 놈은 한 명도 없어. 우리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단 증거야. 얼마만큼 쪼이고, 얼마만큼 풀어 줘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단 뜻이라고.”

“…그런가?”

“뭐, 추측이지만.”

“추측이었냐.”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 거의 확실할 거다. 영산에서 비슷한 일을 겪어서인지, 교관진들의 생각이 얼추 읽히거든.

내가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에반이 물었다.

“책 재밌어?”

“그냥저냥. 너도 읽어 볼래?”

“무슨 책인데?”

“역사책. 위대한 가문의 선조가 되는 스물한 명의 영웅에 관한 이야기야.”

“음… 난 괜찮아.”

에반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지.

위대한 가문의 혈통을 이었다면, 21영웅에 관해선 어렸을 때부터 책이 닳을 만큼 읽었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영산에서의 생활 때문에 기억이 좀 흐릿해져서 되새김질하는 느낌.

“엇, 저기 스컬 지나간다.”

스컬이 당연히 본명은 아니다.

지금 막 라운지를 지나가는 저놈, 깡마른 데다 눈가가 유난히 움푹 파진 생김새가 꼭 해골 같아서 누군가 스컬이라 불렀고…….

이후엔 모두 그렇게 불렀다.

저놈 그래도 나름 어디 어디 귀족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성조차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야! 스컬!”

카리스가 손을 흔들며 외치니, 스컬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주변을 수색하듯 살펴보더니, 도망치듯 계단으로 뛰어갔다.

“뭐야, 왜 저래?”

“냅둬. 저 녀석 오늘도 감점당했잖아. 말은 안 해도 우울할 거야.”

“우울한 게 아니라 화가 나야 하는 거 아니야?”

“너처럼 단세포라면 그렇겠지.”

“뭐, 이 새끼야?”

나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뗀 채 스컬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다.

어딘가 쫓기듯이 위층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어색해 보인다.

아니, 어색한 걸 넘어서…….

“…….”

어쩐지 구린내가 난다.

* * *

빠악!

어깻죽지에서 충격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순간적인 균형 감각의 상실로 천지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뚱히 서 있을 여유는 없다.

나는 억지로 상체를 숙이며 다음 공격을 피했다. 후웅, 간발의 차이로 날카로운 발부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에 쭈뼛 섰다.

이 양반, 슬슬 손대중이 없어지고 있잖아.

방금 공격 제대로 맞았으면 골로 갔다.

물론 그렇다고 겁먹거나 위축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나는 비틀거리는 척 연기하다가, 균형 감각이 회복되는 즉시 공세로 전환했다.

수렵선생이 오늘 자처한 페널티는 오른쪽 다리의 봉인.

그러니 내가 파고들 장소는 자연스레 상대의 우측-.

‘…이라고,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겠지만.’

그러니 여기선 살짝 변주를 가해 보자.

나는 일부러 가장 단단한 방어진이 구축된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수렵선생은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뜻밖의 전개에 대응 자체는 살짝 굼떠졌다.

그 틈에 나는 팔을 검처럼 휘두르며, 손날로 상대의 목을 베었다.

퍼억.

“…….”

벤 거 맞지?

무슨 목이 아니라 통나무를 후려친 것 같은데.

직후, 나는 닥쳐올 고통을 대비하여 복부에 힘을 줬다.

퍼억-.

훨훨, 잘도 날아가는구나-.

나는 나비의 숲의 청아한 밤하늘을 보며 잠시 공중을 부양했다.

그리고 바닥에 처박힌 즉시 벌떡 일어난 다음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수렵선생은 패배를 선언한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교는 여전히 훌륭하다. 상대의 허점도 잘 간파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체력이 발목을 붙잡는군. 마지막 시점에선 움직임이 많이 느려졌다.”

나도 알아.

“기초 체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그러나 지구력이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다.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단련하도록.”

“예.”

하루아침은 아니더라도, 한 달 정도면 이 몸뚱이도 충분히 쓸 만한 수준까지는 올라올 거다.

염화제일공엔 그 정도 포텐셜이 있다.

수렵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대련도 패배했으니 감점 2점이지만…….”

나는 뒤에 올 말이 대충 짐작이 갔다.

“…부족한 체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10분 동안 대련을 이어 가는 근성을 보였지. 뛰어난 정신력이다. 거기에 마지막 심리전이 상당히 훌륭했으므로 가산점 2점이다.”

“감사합니다.”

예상대로 오늘도 내 점수는 플러스마이너스 0점이 됐다.

대련 수업 때마다 쭉 이어지는 레퍼토리라서, 이제는 크게 놀랍지도 않다.

수렵선생이 떠나자 카리스가 와서 한마디 던졌다.

“교관님이 널 진짜 좋게 봤나 본데?”

나는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그 착각을 고쳐 줬다.

“그럴 리가. 저 사람은 그냥 배드니커다운 거야.”

“배드니커다운 게 뭔 말이야?”

“어둡다, 과묵하다, 음험하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이 경우엔 실력주의를 뜻하지.”

“으, 으음.”

카리스는 잠시 내가 농담을 한 건지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으나, 나는 진담이다.

“너, 어제 한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기억 안 나?”

“기억나지.”

어제 있었던 사건.

내가 수렵선생과의 대련을 통해 딱히 손해를 보지 않는 듯하니, 그날은 한스가 돌발적으로 외쳤다.

- 오늘은 제가 교관님과 붙겠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냐.

한스 놈은 대련 시작과 동시에 지면을 나뒹굴었고, 팔뼈까지 부러졌다.

구경하던 놈은, 저게 말로만 듣던 일초지적이구나 싶었다.

딱히 수렵선생의 손속이 잔혹한 게 아니다.

카리스의 말처럼 나를 좋게 본 건 더욱 아니고.

내가 보기에 수렵선생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냉엄한 인물이었다.

실력도 안 되는 놈이 한판 붙자고 깝치니, 나름대로 참교육을 선사한 것인데-.

그 꼴을 보고 몇몇은 수렵선생이 나를 편애한다고 여기는 모양.

‘하여간 한심한 새끼들…….’

꼬우면 지들도 잘 버티든가.

한 가지 확신하는데, 수렵선생과 이런 형태로 대련을 이어 갈 수 있는 건 영도 중 나밖에 없을 거다.

헥토르나 세렌은 물론이고, 카론조차 수렵선생을 상대로는 처참하게 패배할 거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는 이 녀석들 대부분이 마나, 가호를 사용하지 않는 맨몸 대련에 익숙하지 않고…….

둘째로는 내가 강자와의 대련 경험이 많다는 점.

오히려, 라고 해야 하나.

나는 약자보다 강자와 싸운 경험이 훨씬 많다.

‘이걸 아니까 카론 저놈도 안 나대는 거겠지.’

점수라면 환장을 하는 녀석이 말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놀래라. 뭐야?”

“저기는 분명… 에반이 싸우던 곳인데.”

나와 카리스는 시선을 교환한 다음 그쪽으로 향했다.

카리스 말대로 그곳엔 에반이 있었다.

상대는… 카론 우드잭.

두 녀석의 모습은 아주 대비됐다.

카론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인 반면, 에반은 바닥을 몇 번이고 굴렀는지 전신이 만신창이였다.

“무슨 상황이야?”

“보는 대로지, 뭐. 에반이 쪽도 못 쓰고 있어.”

수다쟁이 팜이 대꾸했다.

“솔직히 나도 저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날 줄은 몰랐어. 에반의 실력은 영도 중에서 상위권은 될 거라 생각했거든.”

“…….”

상위권은 맞지.

카론 녀석이 영도 수준이 아닌 것뿐.

그때 카론이 말했다.

“에반 헬빈. 넌, 왜 교관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거지?”

“…뭐?”

“네가 고집하는 그 검술은 너무 조잡하다. 그걸로는 나는 물론이고…….”

이 순간 카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른 녀석들도 이길 수 없을 거다.”

“…….”

“조언하지. 지금 그대로라면 넌 상위 3인에 결코 들지 못해.”

선고하듯 떨어지는 말에, 에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대련은 물론 에반의 패배로 끝났고-.

그 대련에서, 에반의 검은 카론을 스치지도 못했다.

* * *

마침내 토요일 오후가 왔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영도들의 분위기가 밝았다.

딱히 주변에 신경 쓰지 않는 나조차 그 기류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오늘부터 이틀간은 주말이니까.

물론 일반적인 개념이 그렇고, 이 수련회의 주말은 딱히 휴일과 일맥상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늘 오전 수업에서 무예선생 후안이 말했다.

“주말 수업은 오전밖에 없습니다. 오후엔 순위 발표 및 개인 과목 선택 일정이 있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요.”

“그럼 이후엔…….”

“물론 자유시간입니다.”

“오오……!”

자유시간!

그 달달한 어감에 영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 기류에 휩쓸리지 않고, 비교적 침착해 보이는 에반이 질문했다.

“순위 발표와 개인 선택 과목은 뭡니까?”

“우선, 순위 발표란 현재 영도들의 소지 포인트를 공지하는 겁니다. 1위부터 최하위까지, 현재 소지하고 있는 포인트가 낱낱이 게시될 겁니다.”

웅성-.

단숨에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비교적 너그러운 무예선생 앞이라 나오는 반응이랄까.

저 말을 한 게 수렵선생 탄코였다면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아무튼 저 순위란 걸 고지하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경쟁 심리를 부추기기 위해서겠지.

“그리고 2주 차부터는 적성에 따라 선택 과목이라는 게 추가될 텐데, 간단히 말하면 이제 영도분들은 같은 시간에, 각기 다른 수업을 받게 될 겁니다.”

‘아하.’

이곳에 모인 39명의 영도는 모두 다른 적성을 소유하고 있다.

자라난 환경은 물론이고 습득한 무술, 심지어는 종족마저 다르니 당연하다.

기초 수업은 그렇다 쳐도 심화 과정으로 넘어가면 각기 중시해야 할 게 갈릴 수밖에 없다는 뜻.

“순위는 영도 숙소 1층 라운지에 게시해 뒀습니다. 각자 확인하시고, 개인 과목 선택은 점심시간 이후에 하지요.”

할 말을 마친 무예선생이 그대로 떠났다.

영도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동시에 숙소를 향해 우르르 뛰어갔다.

나는 흙먼지를 손으로 치우며 말했다.

“성질 급한 놈들. 뭐 저리 헐레벌떡 뛰어가나 몰라. 안 그러냐?”

“…어? 응, 어.”

멍하니 있던 에반이 대꾸했다.

이 녀석, 카론과의 대련 이후 넋 놓은 모습이 잦아졌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니, 에반이 무마하듯 말했다.

“너는 안 궁금해?”

“궁금은 하지. 근데 늦게 간다고 확인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

“빨리 보고 싶은 거겠지. 이해는 가.”

“그러는 너도 태평해 보이는데?”

“응……. 난 영도들의 포인트를 다 알고 있거든.”

“뭐? 어떻게?”

그러자 에반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수업 때마다 교관님이 대놓고 말씀해 줬잖아. 아무개 씨 가산점 1점, 아무개 씨 감점 1점… 이렇게. 그때마다 다 계산해 뒀지.”

“수업 가산점은 그렇다 쳐도 대련은?”

수렵선생의 대련은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매일 진행됐는데, 이번 주에는 총 3번 있었다.

이 대련엔 이기는 쪽은 1포인트 얻고, 지는 쪽은 2포인트를 잃는 룰이 있었는데…….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싸움 도중에 주변 승패까지 눈에 담을 수는 없었을 터.

“대련이 끝나고 라운지에 앉아 있으면 누가 이겼고, 졌느니 하는 정보가 대부분 들려오더라. 그래도 영 애매한 건 직접 물어보면 대부분 대답해 줬고.”

“…….”

이 순간, 에반을 보며 처음으로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왜 이 녀석의 타락이 [인류에게 가장 뼈아픈 배신]이라고 불리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에반 헬빈은 요약하자면 적으로 돌리기 가장 껄끄러운 타입이었다.

“대단한데? 아니, 음흉하다고 해야 하나.”

“칭찬으로 들을게. 참고로 지금 네 순위는 공동 16위야.”

“아하.”

“반응이 너무 건조한데?”

“대충 그쯤일 거라 예상해서. 아니, 오히려 예상보다 조금 높은 편인가?

수련회에서의 내 성적은 결코 우수하다고 볼 수 없었다.

늘 체력 문제가 발목을 잡았으니까.

나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수업에서도 일부러 육체의 힘만을 고집했는데, 그편이 단련에 훨씬 도움이 되어서다.

그런데도 일단 상위권을 꿰찬 건 수렵선생의 대련에서 꾸준히 포인트를 쌓은 덕분이겠지.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이 숙소에 도착했다.

무예선생의 말대로 라운지에 있는 게시판에 영도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영도들의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보니 영혼이 가출한 듯한 낯짝들이다.

“왜들 이래?”

“글쎄… 순위가 예상 밖인가?”

단순히 예상을 벗어난 것치고는 반응이 과하다.

“잠깐, 실례, 좀, 지나갑시다.”

나는 영도들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서, 마침내 게시판 앞에 섰고…….

순위표를 보는 순간.

“…얼라리?”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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