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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79화 (79/172)

79화

헥토르는 검을 휘둘렀다.

깨앵!

짐승의 누린내에 피 냄새가 섞인다.

이 늑대 새끼는 주둥이가 반으로 갈라졌는데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눈알을 부라리며 헥토르의 피부에 이빨을 박아 넣으려 했다.

‘위험한데…….’

피할 기력이 없다.

“헥토르!”

그때 바질이 늑대에게 몸통 박치기로 늑대를 밀어냈다.

그 충격에 위태롭던 늑대의 머리가 갈라졌고, 불쾌한 핏물이 얼굴을 적셨다.

“괜찮으십니까?”

“…….”

대꾸할 여력도 없어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피 때문에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앞을 보았다.

늑대 무리의 수는 이제 많이 줄어 있었다.

대충 열 마리 안팎 정도인 듯한데, 공격하지 않고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상황.

‘내 상태를 깨달은 건가?’

…짐승도 알 수 있을 만큼 볼썽사나운 꼴이긴 하지.

이 지저분한 개새끼들을 몇 마리나 베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제 곧 진짜 한계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근성이나 정신력 따위로는 극복할 수 없는, 육체 기능의 한계 말이다.

“헥토르 배드니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 여력조차 없었지만,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알겠다.

카론 우드잭은 여전히 나무 위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제라도 받아들이겠나?”

저게 무슨 말이더라?

‘…포인트.’

분명 포인트를 주면 도와준다고 제안했었지.

거짓말은 아닐 것이고…….

카론은 실제로 그 정도 능력을 갖췄다.

저 재수 없는 놈이 천재라는 건 알고 있다.

픽 웃음이 나왔다.

평생 그 단어에게서 도망쳤는데, 결국 저 증오스러운 놈은 삶의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쫓아왔다.

천재天才.

헥토르 배드니커는, 천재를 증오한다.

* * *

헥토르가 처음으로 쥔 검은 뭉툭한 목검이었다.

어린아이도 다룰 수 있을 만큼 짧고, 가벼운 목재로 제작된 장난감 칼.

그 칼을 처음 쥐었을 때…….

어째서인지 헥토르는 손에 착 달라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냥 쥐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휘둘렀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휘두르니,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이 아이는 검술의 천재예요!”

천재라는 말의 뜻조차 모를 때 천재라 불리었다.

헥토르는 그 말이 칭찬임을 깨닫고 기분이 들떴다.

재밌어서 시작한 검술이, 이제는 자존감마저 충족시켜 준다.

헥토르는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둘렀고,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손뼉을 쳤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해도 될 분야가 아니었다.

배드니커란 집안에선 더욱이.

여섯 살이 되던 해, 헥토르에겐 검술선생이 생겼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열두 명이나.

“실은 도검선생을 섭외하고 싶었지만, 돈에 흔들리는 사내가 아니더구나. 그래도 괜찮다. 이들 또한 다른 가문에선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이 난 실력자들이니까.”

헥토르는 모친을 사랑했다.

어머니가 푸른 눈동자로 자신을 보며 얘기할 때면, 그 말이 무엇이든 모조리 받아들일 만큼.

“잘해 낼 수 있겠지?”

“네.”

여섯 살의 헥토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 이후, 헥토르는 더 이상 또래나 허수아비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됐다.

“아직 부족합니다! 자, 백 번만 더 휘두르십시오!”

“배드니커의 핏줄이 이 정도로 허덕여서 되겠습니까?”

“도련님, 오른쪽 어깨가 비었습니다.”

수업은 가혹했다.

부드러웠던 어린아이의 손엔 물집이 잡혔고, 전신에선 멍 자국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헥토르는 좀 어떤가요?”

“…솔직히 말하면, 재능 자체는 특출난 편이 못 됩니다. 끈기만큼은 대단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요. 저 아이는, 헥토르는 천재여야 한다고요.”

“…부인?”

“저 아이를 도와서 검술을 만들어 주세요.”

“그게 무슨…….”

“아시겠어요? 그대들은 저 아이가 만들 검술에 그저 조언을 거든 것뿐이에요. 창안자는 내 아들, 헥토르 배드니커입니다.”

천재 헥토르 배드니커.

배드니커의 가장 우수한 세 자식 중 한 명.

-실은 모두 아니었다.

헥토르는 그저 검 휘두르는 걸 좋아하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또래에 비하면 아주 조금 머리가 좋을 뿐인.

그냥 범재였다.

* * *

철혈공 델락 C. 배드니커.

피가 이어진 혈연인데도 처음으로 만난 건 12살이 되어서였다.

헥토르가 창안했다고 알려진, 그러나 실은 검술선생 열두 명이 몇 달의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잔영검.

그 검술을, 철혈공 앞에서 펼쳤다.

“…….”

시연을 마치고, 헥토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검술 자체는 전부 틀리지 않고 선보였지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이 검법을 누가 만들었다고 했소?”

“물론 헥토르가-.”

“그만. 부인에게 물은 것이 아니오.”

헥토르는 철혈공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부드럽지만, 압박감이 느껴지는 손길이 어깨를 감쌌다.

어머니였다.

“헥토르? 대답해야지. 가주님이 물으시잖아.”

헥토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으나.

“…제, 제가 만들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의 어색한 태도를 변호한 건 어머니였다.

“음. 이 아이가 가주님 앞이라 많이 긴장했나 봐요.”

그 순간까지도 철혈공의 시선은 계속 느껴졌다.

“정말로 네가 만들었느냐.”

‘…아.’

그 순간 헥토르는 깨달았다.

알고 계신다.

근거는 없으나 확신했다.

아버지는 내가 이 검법을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실은 천재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계시는구나.

얼굴이 뜨거워졌다.

수치심.

그것이 헥토르가 처음으로 느낀 수치심이었다.

동시에 두려움에 입술이 떨렸다.

철혈공이 얼마나 냉정하고, 무서운 인간인지에 대해선 어린 헥토르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

기만자를 아들이라고 봐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도록.”

“……!”

그 순간 헥토르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혈공의 눈동자를 보았다.

자신과 같은 자색 눈동자는 분명히 차가웠다.

철혈鐵血이라는 이명이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희미한 열기가 꿈틀거렸다.

“헥토르……! 어쩜 좋아, 가주님께서 널 인정하셨어!”

“훌륭합니다, 도련님!”

“축하드립니다!”

“천재! 내 아들이야말로 천재야!”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와 검술선생들이 몰려와서 뭐라 말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도록.

다만 철혈공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가슴에 새겨져, 세찬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 * *

그날 이후로 헥토르는 검술에 죽도록 매진했다.

쉬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줄였다. 또래와 교제하는 것도 최소한으로만 했다.

나머지 시간은 오직 강해지기 위해, 검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느 순간 주변의 태도도 바뀌었다.

“도련님의 검술이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는군요.”

“과연 가주님의 핏줄입니다.”

검술선생들이 진정으로 인정해 줬고, 사용인들의 태도도 훨씬 공손해졌다.

외가 쪽의 어깨도 많이 올라갔다.

그러나 헥토르에게 있어 가장 기쁜 건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그래 봤자 1년에 2~3번 정도였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5층으로 불렀을 때, 헥토르는 날아갈 것처럼 기뻐했다.

그 장소의 출입을 허락받은 건 자식 중에서도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날 인정하셨다……!’

처음으로 발을 들인 5층.

분명 본가의 저택이었던 그곳은, 일순간 노을이 진 해안가로 그 모습을 바꿨다.

핵토르는 주홍빛 백사장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헥토르.”

“네.”

“언젠가 나는 마왕을 벨 것이다.”

헥토르가 흠칫 몸을 떨었다.

마왕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알고 있어서다.

“나 혼자선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다. 우리의 선조이신 위대한 영웅- 흑요정 쿠세트조차 결국 이뤄내지 못한 숙원이니까.”

“…….”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내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조력자가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는 너희를 낳았다.”

필요에 의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고백은, 부친이란 존재가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삭막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헥토르는 충격받지 않았다.

섭섭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언젠가 내 옆에서 네가 싸워 줬으면 하는구나.”

대신 형용할 수 없는 충만감이 전신을 채우는 걸 느꼈다.

어떤 이유가 있건, 아버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그저 황송하고 기뻤다.

철혈공의 바람은 곧 헥토르의 소망이 됐다.

언젠가 아버지가 필요로 하는 전장에서, 그 옆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건 분명 꿈같은 일일 것이다.

‘할 수 있다.’

천재.

헥토르는 이제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

검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게 느껴졌고, 또래에 비하여 강하다는 확신이 피어났다.

지금의 나라면 부담스럽기만 했던 그 단어를 어깨 위로 올려도 된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헥토르는 목격하게 된다.

진짜 천재를.

“…설마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역시 가주님의 후계자는 히이로 님밖에 없는 건가?”

“쉿……! 부인이 듣겠어.”

히이로 배드니커, 장남과의 대련에서 십여 초 만에 패배했다.

그러나 그 패배보다 더 비수가 되어 꽂힌 건, 이후 히이로가 남기고 간 한마디였다.

“…희한하네. 아버지는 왜 이런 범재에게 기대를 거는 거야?”

“…….”

겨우 잊었던, 그래서 다시는 떠올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 단어는 다시금 뚜렷한 형체를 갖춰 헥토르를 짓눌렀다.

범재.

그리고 천재.

헥토르는 직감했다.

앞으로의 내 삶은, 평생 저것들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형태가 될 것이다.

* * *

천재가 싫다.

재능이라는 명분 아래 노력하는 자를 비웃는 자들이 밉다.

그것이 열등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란 걸 안다.

아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거절한다.”

이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건 헥토르 배드니커가 아니다.

카론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이대로라면 넌 죽는다.”

“알아.”

“그런데도 거절한다고? 목숨보다 자존심이 중요하다는 것인가? 이해가 안 가는군.”

그러시겠지.

콧대 높은 천재의 눈높이로는, 이런 밑바닥 놈의 자존심 따위 보이지도 않을 거다.

게다가 헥토르는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다.

‘아직 승산은 있다.’

늑대 놈들이 이쪽 경황을 살피는 동안 체력을 좀 회복했다.

헥토르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계획을 입에 담았다.

“바질.”

“네, 네?”

“내가 길을 만들 테니 그 틈에 빠져나가라.”

늑대의 수가 적어진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놈들의 포위에도 허점이 생겼으니까.

바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럼 헥토르 님은요?”

“곧 따라간다…고 확신은 못 하겠지만, 너를 지키면서 싸우는 게 더 힘들어.”

“제 몫은 해낼 수 있습니다.”

“허세 부리지 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잖아.”

“하지만…….”

“처음에 말했을 텐데. 이 시험에서, 조장의 말엔 무조건 복종하라고.”

“…….”

헥토르는 바질이 고마웠다.

이 남자는 이 위기의 순간에서도, 단 한 번도 포인트를 넘길 것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자기 뜻을 피력하지 못할 만큼 순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헥토르는 이 녀석이 자신의 하찮은 자존심을 존중해 준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헥토르도 이 영도의 목숨을 존중해 줘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상황도 잊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워프는 저렇게 우는군.’

헥토르는 바질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바질, 넌 영웅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군. 살아남는다면 다른 진로를 알아봐라.”

“실은 양조사가 꿈이었습니다.”

“그래? 드워프 수제 흑맥주가 그렇게 명품이라던데.”

“두말하면 입 아프죠. 다음에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일련의 대화를 지켜보던 카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헥토르 배드니커, 정말 포인트 때문에 둘 다 죽을 셈이냐?”

“포인트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배드니커니까.”

“배드니커인 게 뭐.”

“-배드니커는 쓰레기와 거래하지 않는다.”

이 말은 헥토르의 대답이 아니었다.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바위에 깔린 듯 피떡이 된 늑대.

그 광경을 만든 소년.

“…….”

헥토르가 픽 웃고 말았다.

카론만큼이나 재수 없는 낯짝.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

“…그렇지, 형님?”

루안도 헥토르를 보며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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