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헥토르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피범벅이라 언뜻 알아보긴 힘들지만, 상처보다 피로의 문제가 더 큰 상태.
이 녀석이 거의 하루 종일 검을 휘둘렀다는 건 주변에 널브러진 늑대 사체만 봐도 알 수 있다.
캐앵!
나는 달려드는 늑대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화염에 감싸진 주먹이 늑대의 아래턱을 후려쳤다. 턱뼈는 물론이고 이빨까지 부서지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직후 턱을 부순 특대의 갈기를 양손으로 잡는다.
꺼슬꺼슬한 털의 감촉을 느끼며 뒤쪽을 향해 늑대를 집어 던졌다.
내가 던진 늑대는 막 달려오던 두 마리 늑대들에게 처박혔다.
아가리를 좍 벌리고 있던 놈들은 애꿎은 동족의 시체만 씹은 셈.
나는 비틀거리는 늑대들을 보며 우장을 내질렀다.
백일식白日式 제이초식第二招式.
화륜火輪.
영옥으로 틈틈이 수련한 덕분일까.
마지막으로 썼을 때보다 두 배는 커진 화륜이 늑대에게 작렬했다.
‘나머지 놈들은…….’
네다섯 마리 정도 남은 듯한데, 내가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조원들이 이미 늑대를 처리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콰직!
샤를이 메이스를 휘둘러 버둥거리던 늑대의 척추를 분질렀다.
“…후우.”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샤를을 보며 이죽거렸다.
“내 말 듣길 잘했지? 나오니까 긴장도 풀리고 좋잖아. 운동도 되고.”
“지금이 그런 말 할 때예요?”
샤를이 후다닥 달려가더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헥토르를 부축해 줬다.
“헥토르 님, 괜찮으세요? 세상에나, 이 상처 좀 봐…….”
그리고 즉시 포션을 꺼내려고 하길래 내가 막았다.
“샤를.”
“뭔데요, 또!”
“그건 우리 포인트로 산 물건이야. 함부로 쓰면 안 되지.”
“지금이 장난칠 때예요?”
“장난처럼 느껴져?”
포션은 우리 조원의 포인트로 산 물건이다.
우리 넷 중에 누가 다친 상황이라면 몰라, 다른 조원한테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
샤를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 내 말의 속뜻을 간파했을 거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헥토르 님은…….”
“별로 심각한 상처도 아닌데 뭐.”
“네?”
“피투성이긴 해도 대부분 자기 피가 아니라고. 저 정도면 한숨 자면 나을 거야. 그치?”
어렸을 때부터 온갖 영약을 처먹고 자란 귀한 몸이다.
평범한 영도와는 근골의 수준이 다르단 뜻.
“…루안의 말대로다. 난 괜찮아.”
헥토르가 샤를을 살짝 밀어내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나를 본다.
“신세를 졌군, 루안. 이 빚은…….”
“잊지 않고 다음에 꼭 갚도록 하겠다?”
“…그래.”
나는 픽 웃은 다음, 나무 위에 있는 카론을 보았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고. 일단 저 녀석이랑 얘기 좀 하고.”
탓.
카론은 의외로 순순히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나를 노려봤다.
“넌 왜 구경만 하고 있었냐?”
“내가 헥토르 배드니커를 구하기라도 했었어야 한다는 뜻이냐.”
“그럴 생각 없으면 그냥 꺼지든가, 왜 나무 위에서 팔자 좋게 구경만 했냐고 묻는 거잖아.”
“거래를 제안했다.”
나는 도중에 와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였던 헥토르의 태도와 카론의 말에서 대략적인 상황이 짐작이 갔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포인트로 지랄을 떨 줄이야.”
“헥토르의 위기는 내게 있어선 기회였다. 나는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걷어차는 얼간이가 아니야.”
“너, 지금 이 숲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냐?”
“악마가 나타났더군.”
“…….”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그 상황까지 알면서도 이놈은 포인트를 빌미로 헥토르를 협박했다는 건가?
“루안 배드니커, 네가 힘을 숨기고 있단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일부러 약한 척, 가증스럽게 연기하며 모든 수업에 대충 임했지.”
“그건 오해야.”
난 힘을 숨기지 않았다.
수업에 대충 임한 적도 없고.
내공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허덕거렸을 뿐인데, 이 녀석은 그걸 보고 내가 대충 수련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힘을 숨긴 건 너만이 아니다. 너희에겐 이 수련회가 고통스러운 장소였겠지. 나는 반대였다. 살면서 이토록 편안한 장소에서 머문 적이 없었어.”
“…….”
“위대한 가문의 후예라고 해봤자 가문의 보호 아래 수련한 온실 속 화초일 뿐. 너희와 난 격이 다르다.”
이상한 자부심이 있는 놈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꼰대들이나 할 법한 생각?
나 때는 너보다 몇 배는 힘들었느니, 내가 겪은 거에 비하면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라느니…….
이런 말을 지껄이는 놈들은 십중팔구 인성이 글러먹었다.
“그럼 나도 너랑 눈높이 좀 맞춰 볼까?”
“무슨 뜻이지?”
“포인트 말이야.”
내 말에 카론의 눈이 빛났다.
“포인트를 걸고 내기하자는 것이냐? 아니면 대련?”
“아니. 그냥 포인트를 내놔. 가진 거 몽땅.”
나는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아님 뒤지게 처맞으시든가.”
* * *
카론이 잠깐 나를 보더니,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싸우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자, 잠깐. 이런 상황에서 대련이라니? 그럴 때가 아니잖-.”
에반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꺼내는 순간, 카론은 팔뚝에 채워져 있던 소드홀더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곧장 내게로 돌진.
‘근접전?’
이건 이 녀석의 장기가 아닐 텐데.
아무튼 나에겐 나쁠 게 없는 전개였다.
카론이 검을 휘두른 건 그 순간이었다.
아직 서로의 거리는 열 발자국 이상, 검이 아니라 창이라도 닿을 거리가 아니다.
후웅!
카론의 단검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날아왔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검기는 아니다.
참격을 날리는 건 마스터에 이른 검객에게나 가능한 기예다.
기껏해야 일류 정도인 카론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
즉…….
‘가호로군.’
주변이 캄캄해서인지 공격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가 워낙 요란해서 피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검격을 피한 다음 앞을 보니 카론이 사라진 상태.
쐐액!
그리고 뒤쪽에서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화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
풀숲 어딘가에 숨어 있던 카론이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을 향해 낚아챈 화살을 던진 순간, 카론의 기척이 다시 사라졌다.
은신해서 기척을 감춘 게 아니다.
이 녀석은 짧은 거리를 순간이동하고 있었다.
‘저것도 가호 같은데.’
단거리 순간이동은 의외로 가호 중에선 흔한 축이다.
철혈공도 비슷한 게 있고 세렌도 마찬가지다.
저 녀석도 비슷한 능력이겠지.
‘이 녀석이 소유한 가호는 아마 서너 개쯤?’
다섯 개 이상의 가호를 받았다면 진작 여기저기서 회자가 됐을 터다.
내 귀에도 들릴 만큼 말이다.
거기에 가호의 종류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4개 전부 전투용 가호일 확률은 낮으니까, 일단 이번 전투에서 고려해야 할 가후는 검격과 단거리 이동, 두 가지가 아닐까.
사방에서 카론의 기척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내 감각을 무디게 만들려는 헛수작이었지만, 까놓고 말하면 효과는 없었다.
꽈앙!
나는 오른발을 땅바닥에 내려찍어 진각을 일으켰다.
늑대 사체가 사방으로 들썩이며 주변 지형을 어지럽힌다.
“……!”
그리고 단거리 이동을 마친 카론의 기척이 잠시 멈칫했다.
용병 시절 배웠던 노하우 중 하나.
순간이동 같은 기술의 단점은, 주변 지형의 정보 습득이 느린 점에 있다.
직접 움직이며 주변을 살피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동 직후 기억 속 정보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으면 딜레이가 생기는 것.
그래 봤자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오차였지만…….
승부를 가리는 데 1초면 차고 넘친다.
빠악!
“꺽…….”
얼굴을 얻어맞은 카론이 비틀거렸다.
그 와중에도 오른손에 쥔 단검이 급소를 노렸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실전 경험만큼은 영도 수준이 아니지만.
그래 봤자 아직은 애새끼다.
일류 용병은 물론이고, 보석 산맥에서 싸웠던 교의 암살자 놈들에 비해서도 훨씬 뒤떨어진다.
탁.
나는 목덜미로 쇄도하던 단검의 공세를 차단한 다음, 카론의 배를 걷어찼다.
“큭……!”
카론이 이를 악문 채로 재차 왼손을 휘둘렀지만, 공격 대부분이 내게 막혔다.
“왜 그래. 이게 다야?”
그 순간 카론의 표정이 바뀌었다.
눈빛과 표정에 살기가 넘실거리더니,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한 채 내게 공격한 것.
암살자나 펼칠 막무가내식 공격인 데다, 여태까지 중 제일 날카롭기까지 했다.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보였다.
경험이 없는 놈이라면 이 공격에 움츠러들 거다.
실전 경험이 있다고 해도, 직접적인 죽음의 압박을 느끼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나는 단검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
카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여태까지 보인 모습 중 가장 놀란 듯하다.
나는 왼손바닥이 뚫린 상태에서 카론의 얼굴을 후려쳤다.
“억…….”
“이딴 공격은 누구한테 배웠어? 영도가 펼칠 기술이 아닌데. 느그 아버지냐?”
“닥…쳐!”
“싫어.”
나는 내공을 담지 않은 채 손바닥으로 카론의 양 뺨을 후려쳤다.
“싫어, 싫어, 싫어, 싫다고.”
짜악, 짜악!
한 번 때릴 때마다 카론의 얼굴이 홱홱 돌아갔다.
솔직히 얼굴 살이 별로 없는 놈이라 찰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뺨만 때렸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이런 자존심에 죽고 사는 놈은 고통보단 굴욕에 더 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한곳을 집중 공략하는 건 내 장기였다.
“죽여 버리겠어……!”
처음엔 눈을 부릅뜬 채 반항하던 카론이었으나…….
짜악, 짜악!
“그, 그만… 이거 놔라…….”
열 대가 넘어간 시점에선 반항이 많이 누그러졌고.
짜악, 짜악!
“내, 내가 졌…….”
스무 대가 넘어가니 패배를 시인했다.
물론, 부어오른 얼굴과 별개로 이 녀석의 기력은 아직 멀쩡한 편이라 나는 따귀질을 멈추지 않았다.
짜악, 짜악……!
그렇게 서른 대, 마흔 대가 됐을 무렵…….
카론은 거의 반항하지 않은 채 입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때쯤 나는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이 녀석이 뭐라 지껄이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 봤다.
“…힌넘…….”
“뭐라고?”
“미힌, 넘… 미힌넘…….”
“아하.”
그리고 기절.
나는 그제야 카론을 놓아준 다음, 어쩐지 비슷한 일이 떠올라서 헥토르 쪽을 보았다.
“…….”
헥토르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