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헥토르와 드워프 영도, 카론을 데리고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으나, 당장 이 녀석들에게서 정황을 들을 수는 없었다.
셋 모두 피로가 한계에 달했는지 오두막에 오자마자 기절했기 때문.
“…카론은 피로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알 바임?”
이 셋에 비하면 우리 상태가 멀쩡하긴 했지만 그래도 언제, 어떤 상황이 터질지 모르니 눈 좀 붙이기로 했다.
불침번은 넷이서 번갈아 가면서 섰고.
특별 시험-이제는 그렇게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났다.
이튿날 아침.
바깥 공기를 쐬러 나온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이 맞나? 숲이 너무 어두워서 잘 모르겠군.”
내가 할 말을 미르가 대신했다.
평소 울창한 나뭇가지 때문에 안 그래도 어두운 장소였지만…….
지금은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캄캄한 느낌이다.
그리고 태양의 기척에 훨씬 민감한 나는 나뭇가지 너머를 엿볼 필요도 없이 깨달았다.
‘해가 안 떴는데?’
품에서 모래시계를 꺼냈다.
모래시계는 이제 3분의 1이 닳아 있었는데, 시험이 시작하고 딱 하루가 지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된 건 아침이므로, 지금도 해가 떠 있어야 맞는데…….
‘기분 탓이면 좋겠는데.’
이미 악마까지 나타난 마당에 그런 희망 회로를 돌리는 건 현실 도피가 아닐까.
일단 교차 검증이다.
나는 미르와 함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좁아터진 오두막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영웅 지망생들을 보았다.
“…겁나게 답답하군.”
창문이 없어서일까.
왠지 모르게 숨 쉬는 것도 답답하고, 여름이었다면 쪄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선 헥토르를 보며 물었다.
“상태는 괜찮아?”
“많이 나아졌다. 그러는 너는 어떻지.”
“나?”
“어제 손바닥이 꿰뚫렸지 않나. 화상 자국도 있었고…….”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구만.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보였는데, 말하는 걸 보니 카론과의 대련도 모두 봤나 보다.
“멀쩡해. 아마 내일이면 다 나을걸.”
“그런가…….”
“드워프 군도 괜찮아?”
“아, 예. 멀쩡합니다.”
나는 드워프 영도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너는 이름이…….”
“바질 쥴이라고 합니다.”
“그랬지.”
에반이 말해 줬는데 까먹었다.
바질이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략적인 상황은 여기 있는 에반과 샤를에게 들었습니다. 설마 팜이 죽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덴마에 대해서도 기대를 가지면 안 되겠군요.”
이럴 때 위로의 말은 의미가 없어서 나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론을 본다.
어제만 해도 이목구비가 제대로 안 보일 만큼 퉁퉁 부어 있었는데, 지금은 부기가 많이 빠졌다.
‘이 녀석 회복력도 대단한데?’
아마 헥토르 못지않게 좋은 걸 많이 처먹은 모양.
“그런데 넌 조원들은 어쩌고 혼자 있었던 거야?”
“…우리 조는 각각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아하.”
이렇게 위험한 장소에서 개별 행동을 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지만.
그 짓을 벌인 게 카론이라면 납득 간다.
“각자 돌아다니면서 포인트를 벌려고 했었군. 그 제로스란 놈의 가호로 포션 장사라도 했었나?”
“…….”
카론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저 뺀질거리는 낯짝을 보니 더 갈구고 싶은 마음이 구름처럼 피어올랐지만…….
그 전에.
“어흠.”
나는 헛기침으로 이목을 모은 다음 말했다.
“얘기에 앞서서, 혹시 암흑교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러자 일곱 명 중에서 헥토르가 손을 들었다.
“그럼 형님한테 뭐 하나 물어보자.”
“뭐지?”
“혹시 교단의 의식 중 일식日蝕과 관련 있는 게 있어?”
내 말에 헥토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설마 일식이 일어났나.”
“아마.”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니다. 확실히 대답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태양이 그림자에 먹혔어.”
“…….”
그러자 다들 헥토르의 표정을 살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은, 이제 시체처럼 핏기가 아예 사라졌다.
“헥토르 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시는 겁니까?”
“문헌에서 배운 바로는… 일정 지역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일식은 단 한 가지 경우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헥토르의 말은 내 추측을 현실로 만들었다.
“마왕 강림 의식.”
암흑교단.
이 미친놈들이 배드니커의 땅에 마왕을 강림시킬 생각인 모양이다.
* * *
영도들의 표정은 처음엔 당연히 얼빠진 상태였다.
조무래기 악마를 보았을 때도 무너질 뻔했는데, 마왕이란 이름이 나오니 아예 현실 감각이 사라진 것 같다.
“노, 농담이시죠? 마왕 강림이라니…….”
“다른 곳도 아닌 배드니커의 영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지 않습니까……?”
“물론 완전한 강림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준비 기간도, 제물도 부족할 테니까.”
“제, 제물…….”
바질이란 놈은 드워프답지 않게 겁이 많은지, 헥토르의 말을 듣고선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땅에 현현하는 건 마왕의 신체 일부분이겠지.”
“그, 그 정도라면 다행이군요.”
“다행이라고?”
헥토르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0년 전, 대도시 필피아가 27분 만에 폐허가 된 사건을 기억하나? 지금도 그 땅은 지독한 악기가 침식해 고위 성직자들조차 정화를 포기했지. 그때 교단이 소환한 건 고작해야 마왕의 손가락 하나였다.”
“…필피아시의 비극이라면 저도 들었어요.”
샤를이 말했다.
“하지만 그때 제물로 바쳐진 자들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른다고 들었는데…….”
“교단의 뒷사정까지는 우리가 알 도리가 없지. 지금 주목해야 할 건 일식은 이미 일어났고, 의식 또한 시작됐다는 것이다.”
내가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지?”
“우선 생물체가 변이한다. 내성을 갖추지 못한 생물 전부가 악기에 영향을 받아 육체가 뒤틀리지.”
“영향?”
“원래 이 숲에 늑대형 몬스터는 없었다. 숲에 살던 짐승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꼴이 된 거겠지.”
“음…….”
“둘째로 악마의 출현. 대부분 짐승 정도의 지능을 가진 하위 악마이긴 하지만, 그런 놈들이 지옥문을 열고 무더기로 나타난다.”
헥토르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다음이 바로 네가 봤다던 일식 현상이다.”
“의식은 총 몇 단계까지 있는데?”
“내가 알기로 네 단계까지다. 마지막 단계가 되면 땅 자체가 썩어 들어가며, 지독한 악기를 뿜어낸다더군. 현역 영웅조차 버티기 힘들 만큼 강한 악기를 말이다.”
거기까지 가면 싹 다 죽겠군.
뭐 어떻게 싸울 틈도 없이 말이다.
“…….”
“…….”
어쨌든 헥토르의 설명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나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심각하단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까보니 상상 이상이다.
‘이 정도 재앙이라면 내가 죽을 만했겠는데…….’
스승님은 여기까지 보신 건가?
그런데 어째 조언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고작 한 달 만에, 지금 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내가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때 비교적 침착한 얼굴을 한 에반이 물었다.
“이만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배드니커가 모를 리는 없을 겁니다. 금방 가문에서 지원해 오지 않을까요?”
“지원은 오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네?”
“수련회 캠프를 중심으로 반경 20킬로미터엔 결계가 형성되어 있다. 대마법사 아사드 님이 직접 형성한 결계인데, 이것은 안팎을 완전히 차단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야.”
“어째서 그런 결계를…….”
“그게 없었다면 이 위험한 장소에 캠프 따위 만들지 못했을 테니까. 결계는 몬스터의 침입은 물론이고, 숲이 가진 고유의 효과 또한 없애 준다. 방향 감각의 상실 같은 것 말이다.”
“아…….”
“아마도 주모자는 그 사실도 알고 있겠지.”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주모자란 놈이 가문의 내부자란 사실은 헥토르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바깥에 소식을 전할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가호를 가진 놈이 있지 않을까? 그 왜, 바깥 물품을 멋대로 반입한 놈도 있었잖아.”
그러자 우리의 시선이 카론에게 향했다.
이놈은 지금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딱히 동요 없는 얼굴로 있다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제로스를 말하는 거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녀석의 가호는 바깥과 연결되는 통로를 형성하는 게 아니야. 그저 거대한 창고를 지닌 거지.”
그렇게 처맞고도 여전히 꺼드럭대는 말투인 게 대단하다.
나는 카론을 보고 잠깐 감탄하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결계는 대마법사 아사드가 친 거라고 했지?”
“아사드 님이다.”
“그래. 아사드 님.”
헥토르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때문에 그분보다 아래 등급의 힘을 써 봤자 소용이 없는 거고.”
“가주님이 내게 준 마도구가 있는데, 이거라면 그 대마법사 양반의 힘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마도구?”
나는 중지를 세워 보여 줬다.
물론 갑자기 헥토르에게 욕을 박고 싶어서는 아니고, 중지에 채워진 반지를 보여 준 것.
“그건……?”
“여기 마나를 불어넣으면 5층으로 갈 수 있다고 하시더라.”
“아!”
헥토르가 반지를 꼼꼼히 확인하더니, 표정이 확 밝아졌다.
“보석은 물론이고, 세세한 문양조차 없는 평반지……. 그걸 만든 건 아사드 님이 분명해.”
“오.”
“그 마도구라면 결계를 뚫을 수 있을 거다.”
“아……!”
그러자 사방에서도 안도의 탄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던 낯짝에 한줄기 햇살이 내리쬔 느낌.
“오케이. 잠시만 기다려.”
나는 곧장 검은색 반지에 마나를 주입했다.
…우우웅-.
설마 작동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반지는 별 탈 없이 내 마나에 공명했다.
반지에서 마나가 스르르 흘러나오더니 내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핏-!
순식간에 주변 시야가 바뀌었다.
“…음?”
어느새 나는 어느 허름한 방의 가운데 서 있었다.
창문은커녕 문조차 없는 커다란 방엔 책장이 빼곡히 세워져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고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5층의 풍경은 매번 바뀐다고 했던가?
그럼 여기 어딘가에 철혈공이 있다는 뜻인데…….
“뭐냐?”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뒤를 보니 철혈공 대신 다른 인물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지도 않고, 돋보기안경을 쓴 채 책을 읽고 있는 남자.
대마법사 아사드다.
“루안 배드니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그러는 아사드 님은요?”
“내가 내 방에 있는 게 이상하냐.”
“이상하죠. 이 반지를 쓰면 본가 5층으로 간댔는데.”
“반지?”
아사드가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뗀 채 나를 보았다.
피로에 찌든 눈동자가 내 반지에 닿았다.
“그 반지는 어디서 얻었지.”
“가주님한테 받았습니다.”
“델락이 줬다고? 흠.”
아사드가 의구심 섞인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곧 흥미 없다는 듯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서 가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몰라. 방해되니까 이만 나가라.”
아사드가 그리 말하며 나를 추방하려 들길래, 나는 급하게 말했다.
“자, 잠깐만요!”
“뭔데?”
“지금 좀 많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아사드 님의 결계 때문에요.”
“내 결계?”
나는 아사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수련회의 특별 시험과 이미 발생한 희생자, 마왕 소환의 전조 현상까지.
“…….”
아사드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턱을 괸 채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는데, 내 생각보단 덤덤한 반응이었다.
‘마왕 소환이라고 하면 좀 더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오래 산 마법사는 인간적인 감정이 무뎌지고, 점점 초탈해진다던가?
저렇게 살면 인생 참 따분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사드가 말했다.
“그렇군.”
“…음. 실례지만, 감상은 그게 답니까?”
“그럼 뭐 호들갑이라도 떨까.”
“호들갑은 안 떨어도 놀라긴 할 줄 알았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차 듣는데 내가 왜 놀라야 하지?”
“…예?”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