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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93화 (93/172)

93화

암흑교단의 소교주는 한 명이 아니며.

그들이 정확히 얼마나 존재하는지는 제사장조차 모른다.

후안이 알고 있는 소교주는 단 한 명, 에반 헬빈뿐이다.

- 에반 헬빈을 수확하라.

후안은 교주의 명에 복종하며 생각했다.

수확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고 말이다.

수백 년 전에 뿌린 악의 씨앗.

그것의 발아를 깨달을 수 있는 건 교주뿐이고, 수확은 제사장의 역할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마각을 드러내는 타이밍이 아쉽기는 했다.

배드니커는 교단 최악의 적 중 하나다.

그러한 적지에, 제사장이라는 거물이 잠입했고 심지어 들키지 않은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젠가 닥칠 거대한 전쟁에서, 상황을 반전시킬 비장의 한 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단은 짤막하게 후안의 예상을 부정했다.

- 네가 얼마나 더 배드니커에 머물건, 그들은 진정으로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 교주시여, 그게 무슨 뜻입니까?

- 애초부터 대사범이란 직책조차 배드니커가 파놓은 함정일 수도 있단 뜻이지.

- …….

후안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가까이서 본 철혈공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내였다.

적어도 대륙에서 교단을 적이 아닌 사냥감으로 취급하는 건 그자뿐이다.

이후로 후안은 망설임 없이 미련을 접고, 이번 수련회를 소교주 탄생의 장場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련회에서 에반 헬빈을 보았을 때…….

후안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에반 헬빈의 수준은 처참했다.

‘정말인가?’

정말 이 인물이 교주의 후계자란 말인가?

겉으로 드러난 게 거짓된 인격이란 걸 알면서도 실망스럽다.

그러나 가장 후안을 분노케 한 건, 에반의 검술을 보았을 때다.

헬빈가의 비전 검술 레이븐.

그 완성도는 끔찍했다.

검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

후안은 물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제사장인 걸 인식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무예선생이란 직책에도 어느 정도 긍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무학에 관한 자존심, 자부심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무예선생의 시야로 볼 때, 에반의 무학은 결코 보고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후안은 경애하는 소교주가 더럽혀진 느낌에 순간 제사장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에반을 다그쳤다.

어차피 재탄생한 이후엔 저런 검술 따위 쓰지도 않을 테니, 이제 와선 별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

후안은 숲을 내려다봤다.

교의선생 주니앙은 예상대로 끈질겼다.

그녀는 왜 교단이 이단심문관이란 존재를 성가시게 여기는지, 그 이유를 철저히 보여 줬다.

나머지는 눈을 감은 채 힘을 비축하고 있는 세렌 굿스프링과-.

‘…루안 배드니커?’

예상 밖이다.

영도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카론이나 헥토르 둘 중 한 명일 거라 예상했다.

물론 뛰어난 실력이 반드시 생존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의 생존이란 절반은 운에 달렸다.

우수한 영도가 애초부터 합류해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납득 못 할 일은 아니다.

즉.

수십 마리의 악마와 싸우고 있는 루안 배드니커의 모습은, 분명 후안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광경이었다.

- 나는 루안 배드니커를 주목하고 있소.

- 명심하시오. 초원의 대전사는 전사를 평가하는 데 있어 거짓을 고하지 않소.

이미 죽은 수렵선생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후안은 루안이란 영도를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소문으로 듣던 만큼 구제불능의 망나니가 아니란 건 안다.

알지만, 그렇다고 주목하기엔 이번 수련회에 모인 영도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영도 중에서 경계할 자가 있다면 카론과 헥토르, 굳이 한 명 더 하자면 세렌 정도.

나머지 영도는 적이라고 하기엔 아직 미성숙하다.

그 생각이 이제는 바뀌었다.

루안 배드니커가 쓰러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루안은 주니앙만큼, 주니앙 이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주먹만이 아니라 검을 쓰기 시작했고, 잡다했던 검술에 점차 틀이 잡혔다.

그리고 악마를 도륙하는 루안의 모습에 철혈공이 겹쳐질 무렵…….

‘…….’

후안은 이 이상의 방관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

그들의 절망은 소교주의 탄생은 물론, 앙신의 강신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세렌이 모종의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걸 알았음에도 방관했던 이유다.

그러나 고작 셋,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세렌을 제하면, 두 명조차 확실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이상 사태이며, 앙신 강림 의식에선 사소한 오차도 있어선 안 된다.

후안은 판단을 내린 즉시 루안에게 공세를 집중한 뒤.

철퍽.

직접 권능을 사용해서 루안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무인에게 있어 팔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아슬아슬하던 밸런스가 무너지며, 곧 루안의 육체는 악마 사이에 완전히 파묻혔다.

고깃덩이가 으깨지는 소리를 들리며, 후안은 다음 타깃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렌 굿스프링.

고작 영도 수준의 가호 따위로 현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겠지만, 굿스프링의 핏줄이라면 응당 경계하는 게 맞다.

‘권능의 사용은 최대한 피해야 하지만…….’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확실한 게 좋겠지.

츠즈즛…….

후안의 손에서 어두운 기파氣波가 쏘아져 나갔고, 무방비한 세렌의 몸에 직격했다.

꽈앙!

세렌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날아가 거목에 처박히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나 후안은 세렌이 아직 살아 있단 걸 느꼈다.

이번엔 좀 더 강한-.

“제사장-!”

쩌렁쩌렁한 고함에 후안이 멈칫했다.

그리고 흠칫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루안 배드니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마가 깨진 것일까?

피로로 흠뻑 물든 얼굴에, 팔 한쪽에선 아직도 질퍽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루안은 그 모습으로 악마를 잡아 찢고 있었고, 심지어 그 시선은 못이라도 박힌 듯 후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누굴 먼저 없앨지 계산하고 있나? 굿스프링의 핏줄과 다 죽어 가는 이단심문관이 네게 가장 큰 위협인가?”

루안이 이죽거리며 포효를 터뜨렸다.

“자아알 봐-라! 이 전장에서 네 최대의 적이 누구로 보이나?”

후안은 팔뚝으로부터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배드니커의 피.’

철혈공.

그 사내가 보인 기도에 압도당한 적이 몇 번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전장에서 철혈공을 목격한 교인은 간혹 폐품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적어도 배드니커와 관련된 작전에는 더 이상 동원할 수가 없게 된다.

잔혹하단 말로도 부족한 손속.

신앙심마저 무디게 할 만큼의 공포.

제사장 후안은 알고 있다.

사냥꾼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고려하면, 제국에서 ‘악마 사냥꾼’이라 불릴 자격을 갖춘 건 철혈공 한 명뿐이다.

루안은 지금 뻔한 도발을 하고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주의를 끌려는 속셈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응해 주지.’

후안은 그 도발에 기꺼이 응했다.

여기서 이 싹을 짓밟지 못한다면, 루안 배드니커는 훗날 반드시 교단의 큰 적이 된다.

탓.

후안이 지면으로 착지했다.

교단의 극비 중 하나이지만, 의식 도중의 제사장은 평소만큼 힘을 쓸 수 없다.

기껏해야 전력의 3할 정도만이 허용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츠즈즛……!

그래서 후안은 권능을 집중한 다음, 어둠으로 담금질한 듯한 창을 만들었다.

조금 무리를 했기 때문일까.

일순 치밀어 오른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파직, 새까만 창에서 검은색 스파크가 튀었고 그 순간까지도 루안은 웃고 있었다.

푹……!

그리고 후안은 자신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칼날을 보았다.

겨우 삼킨 핏물이 강한 기세로 역류했다.

“쿨럭……!”

억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투구를 쓰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그러나 투구 아래에 자리 잡은 얼굴은, 적어도 수련회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이 남자는…….

“루크… 배드니커…….”

“…이런 비겁한 기습은 기사의 명예엔 흠이 될 테지만.”

루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사장을 죽일 수 있다면 엿이나 까라지.”

* * *

루크 배드니커의 존재를 처음부터 깨달은 건 아니다.

이 남자는 백화 상태의 내 기감마저 속일 만큼 기척을 잘 숨겼는데, 이쯤 되면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처럼 느껴질 정도.

[도움이 필요한가?]

팔이 잘린 직후, 루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은 아닐 테고, 가호인가?

[티 내지 말고 고개로만 대답해라. 도움이 필요한가?]

“…….”

[만약 조금만 더 버틸 수 있다면, 내가 제사장을 확실히 죽일 수 있다. 지금은 안 돼. 아직 성공률이 절반이다.]

잘 쳐봤자 절반이겠지.

상대는 지금 밤하늘 위에 있다.

아무리 기척을 잘 감추는 달인일지라도, 엄폐물 하나 없는 하늘에선 존재를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죽지 마라.]

루크가 짤막한 목소리로 대꾸했고.

나는 일부러 고함을 치며 상대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후안의 시선이 내게 끌리고, 마침내 대지에 발을 들인 순간…….

루크의 검이 제사장의 심장을 꿰뚫었다.

후안의 눈동자가 크게 뜨인 순간, 뒤이어 나타난 검은색 형체가 루크의 몸뚱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루크가 순식간에 검을 뽑은 다음 방어했지만, 충격을 모두 흡수하지 못하고 날아갔다.

‘저게 마왕의 신벌인가?’

솔직히 말하겠다.

지금의 나라면 대응할 수 없는 속도다.

육안으로는 포착해도, 몸뚱이가 반응 못 한 채 곤죽이 될 거다.

“큭…….”

후안이 심장에 난 상처를 손으로 막았지만, 무너진 둑을 양손으로 막으려는 것과 같다.

“역시 마왕의 개입은 네가 인식하는 순간부터 일어나는 모양이군.”

루크가 부서진 나무와 흙먼지 속에서 일어났다.

이 남자의 입가에도 핏줄기가 흘렀지만,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네가 마인이라면 고작 심장을 터뜨린 걸론 죽일 수 없겠지만, 아니겠지. 그 정도로 오염된 놈이었다면 배드니커의 땅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테니까.”

“…….”

“의식은 여기까지다, 제사장. 마왕 강림은 실패했어.”

멍하니 서 있던 후안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계획이 좌절된 충격으로 실성이라도 한 걸까?

그러면 좋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좋게 풀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عبدك المتواضع أعرض الجسد والروح…….”

생전 처음 듣는 음산한 언어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피투성이가 된 제사장이 하늘을 보며 외쳤다.

“절망의 앙신 아홉(Ahop)이시여!”

루크와 나는 후안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때부터 달리고 있었지만, 젠장.

너무 멀다.

“이 땅에 강신하소서!”

그리고 세상이 칠흑에 잠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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