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루크는 순간 스스로가 실명한 줄 알았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 짙은 어둠이 사방을 감쌌다.
‘실명失明…….’
사실 올바른 말일지도 모른다.
루크는 시력을 잃지 않았지만, 세상은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고오오오오오……!
끔찍한 기운이 휘몰아친 순간, 사방을 감쌌던 어둠이 양초처럼 녹아내렸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회색빛 거목에 일그러진 이목구비가 상흔처럼 생겨났고, 그것들이 일제히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사방을 감쌌던 어둠이 녹아내리며, 숲의 중앙으로 빨려들 듯 모였다.
한데 모인 어둠은 마치 용암처럼 부글부글 들끓더니, 이내 분수처럼 치솟았다.
콰아아아…….
어둠이 비로소 형체를 갖췄고,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목격했다.
[…….]
까마득하게 거대한 존재였다.
수십 미터 되는 숲의 거목조차 그 존재의 절반 크기조차 되지 못했다.
폭포처럼 흐르는 흑색의 천과 백골로 빚은 듯한 왕관.
“아아아……!”
후안이 피를 줄줄 흘리며 환희를 터뜨렸다.
“앙신이시여-!”
마왕이 찬찬히 아래를 보았다.
자신의 이름에 반응한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즈즈즉, 어둠이 휘몰아치는 듯한 천의 표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루크는 그 하얗고 거대한 게 손가락이란 걸 깨달았다.
거인의 손가락뼈도 저렇게 크지는 않을 터였다.
[…….]
그리고 마왕이 손가락으로 후안을 가리켰다.
마치 선고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아아, 앙신이시여……! 당신의 미천한 종이 이렇게-.”
우지직…….
환희 섞인 표정을 마지막으로, 제사장 후안이 핏물이 돼서 주저앉았다.
루크는 아연한 얼굴로 한때 후안이었던 핏물을 내려다봤다.
핏물은 불길한 흑빛을 띠고 있어서, 언뜻 보면 마치 검은 늪처럼 보였다.
‘검은 늪의 마왕 아홉…….’
처음으로 교단이 내린 정의에 납득하고 만다.
마왕이 아니다.
저건 신이다.
면전에 둔다면 경배할 수밖에 없는, 목숨을 구걸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절대적 존재다.
루크의 육체가 덜덜 떨렸다.
그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공포였다.
이 순간에도 정신이 붕괴하지 않은 건, 평소 루크의 절욕적인 성정 덕분이었다.
“으아, 아…….”
아직 살아 있는 또 다른 한 명은 달랐다.
이단심문관 주니앙.
공포에 단련된, 악마와 수십 번 이상 싸운 그 역전의 전사조차 앙신을 목도한 순간 공포에 먹혔다.
주니앙은 주저앉은 채 마왕을 올려다보았고, 벌어진 입에선 침이 새고 있었다.
[…….]
마왕의 손가락이 주니앙을 가리켰다.
우지직…….
그리고 주니앙 또한 검은 핏물로 변했다.
“…….”
루크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제사장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줄은 미처 몰랐다.
아마 후안으로서도 비장의 수단이었겠지.
그 대가로 마왕이 현현했다.
단 한 가지 목적을 지닌 채.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의 죽음.’
당초 계획대로 이 땅 전체가 악기에 침식당하지는 않을 테지만, 루크가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쉽지 않은 작전이란 건 알고 있었다.
제사장이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목숨 또한 걸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배드니커의 작전은 성공한 것인가?
제사장을 죽이고, 그 계획을 저지했으니까?
으드득.
루크가 이를 갈았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배드니커로서,
철혈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무엇보다 철혈공의 동생으로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하아아아-!”
이를 악문 루크가 기합성을 내질렀다.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전신에서 휘몰아쳤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앙신과 맞서 싸우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루크의 시선이 에반에게 향했다.
소교주란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자리가 그 탄생을 계획하는 자리일 줄은 몰랐다.
‘하다못해 소교주라도.’
에반 헬빈이라도 데리고 가야 한다.
진력으로 전신을 감싼 루크가 에반을 향해 쇄도했다.
우지직…….
루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에반과의 거리는 아직 수십 걸음, 달리 말하면 고작 다섯 발자국을 내딛고, 루크는 앞서 그가 목격했던 검은 핏물이 돼서 주저앉았다.
챙그랑-.
루크가 쥐고 있던 백색 검이 지면을 나뒹굴었다.
* * *
순식간에 세 명이 죽었다.
제사장 후안.
이단심문관 주니앙.
철혈기사단장 루크 배드니커.
셋 다 지금의 나로선 이길 수 없을 만큼의 실력을 지닌 강자였는데.
그런 자들이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 하고 목숨을 잃었다.
[…….]
마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 또한 두려움은 느껴졌지만, 몸이 굳을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에반 옆에 붙으면?’
에반이 정말로 소교주라면, 아무리 마왕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는지 모르겠다만, 주변에 있는 사물도 영향을 받는다면…….
물론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됐건 죽는다면 뭐라도 시도하는 게 맞다.
‘대화가 통할 상대 같지도 않고.’
문제는 방금 싸움으로 육체가 맛이 갔는지 쉽게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피도 제법 흘려서 의식도 끊기기 직전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한 발자국 내디디려는 순간…….
마왕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뜻밖의 일은 그때 벌어졌다.
손가락이 처음으로 멈칫한 것이다.
[…….]
백골 가면 아래 불길한 안광이 나를 직시했다.
어쩐지 마왕이 망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찰나였다.
구부러진 손가락이 펴지며 똑바로 나를 가리킨 순간.
휘오오오오-!
사방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익숙한 기운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세렌?’
제사장의 일격을 맞고 나무에 처박혔던 녀석은, 선혈에 물든 은색 머리카락을 세차게 휘날리며 손을 뻗고 있었다.
일전처럼 눈동자가 뒤집혀 있지는 않다.
세렌의 눈동자는 정확히 전방을 인식하고 있었다.
콰가가가가각-!
지난번보다 훨씬 강한 칼바람이 마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마왕이 이번엔 손가락으로 그 바람을 가리키려고 했는데.
[…….]
나는 휘몰아치는 칼바람 속에서 목격했다. 그 직전 마왕이 직접 손을 거두는 모습을.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그리고 세렌이 불러온 칼바람이 마왕의 형상을 갈가리 찢었다.
“…아.”
어두웠던 사방이 밝아졌다.
끔찍하고 불길한 기운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고, 광소를 터뜨리던 나무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밤의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본모습을 되찾았다.
“…끝난 건가.”
나도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제사장이 부순 나뭇가지만은 그대로라서, 여전히 하늘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밤하늘이 이렇게 밝아 보일 수도 있단 걸 처음 알았다.
고작 사흘인데도, 별 무리가 박힌 밤하늘은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물론 감상에 잠기기엔 아직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 세렌. 너 장난 아니다. 마왕을 물리치다니, 이 정도면 굿스프링에서도-.”
나는 말을 멈췄다.
나무에 기대 있는 세렌의 모습이 보였다.
“굿스프링에서도, 뭐.”
세렌이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날 다시 볼 것 같아?”
“…….”
나는 세렌의 눈빛을 보며 물었다.
“너, 죽는 거냐?”
* * *
세렌이 낮게 웃었다.
“말했잖아. 리스크는 크다고.”
“…….”
“제사장은?”
“죽었어.”
“그런가.”
나는 세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죽을 줄 알고도 쓴 건가?”
“모름 등신이지.”
“다른 방법은.”
“있었을 수도.”
세렌이 픽 웃었다.
“…근데, 이제 됐어.”
지친 목소리.
나는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세렌은 가쁘게 호흡할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물었다.
“뭐에 지친 건데.”
“글쎄다…….”
세렌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곳엔 평소의 맑음이나 총기 대신, 안개가 가득 껴 있었다.
사물을 분간하기 힘든 상태일 텐데도 세렌은 꼭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마등이라는 것일까.
“쿨럭.”
세렌이 기침하는 순간, 거무죽죽하게 죽은피가 쏟아졌다.
세렌은 영도복 위로 흐르는 핏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야, 너…….”
나는 입을 닫았다.
괜찮으냐, 포기하지 마라, 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딴 무책임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밀.”
그 대신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왠지 모르게 전혀 엉뚱한 말이었다.
“나한테 비밀 하나 말해 준댔잖아.”
“…….”
“아니면 역시 그냥 한 말이었냐?”
나는 일부러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면… 그냥 넘어가 줄게. 그때 그냥 허세 부리려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지?”
세렌이 소리 없이 웃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말해 봐.”
“그럴까?”
그리고 세렌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실은 난 미래를 알아.”
“…….”
“굿스프링의 가보 중 [라플라스의 신서新書]라는 게 있는데, 그곳엔 미래에 벌어질 일이 적혀 있어. 일종의… 예언서지.”
“…….”
“그렇지만… 그걸 진짜로 믿는 사람은 없었어. 정체불명의 문자로 적혀 있어서 아무도 읽을 수 없었거든.”
세렌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말했다.
“…나를 빼곤.”
다시 침묵.
나는 세렌을 보며 물었다.
“그게 다야?”
“뭐가.”
“네가 말한 비밀이란 거, 그게 전부냐고.”
세렌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어쩐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방금 꺼낸 말이 거짓말은 아닐 거다.
필시 진실이겠지.
하지만…….
나는 세렌이 죽기 직전 내뱉은 이 말이, 이 녀석이 줄곧 숨기고 있던 비밀 같지는 않았다.
근거도, 논리도 없다.
단순한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
세렌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내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 시선에 약간의 기쁨이 묻은 듯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큭큭.”
착각이 아니다.
세렌은 실제로 즐거운 듯이 웃었다.
얼마 안 가 피를 내뱉긴 했지만, 지금의 세렌은 어딘가 즐겁고, 그 이상으로 홀가분해 보였다.
나는 항상 언짢고, 짜증에 가득 차 있던 녀석이 죽기 직전에서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이름 말인데, 실은 세렌이 아니야.”
나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어쩐지 대단히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 같았다.
세렌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물었다.
“그럼 본명은 뭔데?”
“…….”
내 말에 세렌이 잠깐 멈칫했다.
흐릿한 시선은 마치 먼지 쌓인 책장을 더듬는 듯했다.
“본명…….”
세렌은 한동안 기억의 책장 속에 꽂힌 자신의 본명을 찾아 헤맸다.
“글쎄…….”
이윽고 그 입술이 달싹거렸다.
“어떻게 발음하더라…….”
“…….”
풀벌레 소리가 또렷해졌다.
암운 속 그믐달이 드러나며 은은하게 숲을 비췄다.
사박.
나는 세렌에게 다가가서,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초점 잃은 눈동자를 감겨 줬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 피에 절은 케이프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 줬다.
세렌 굿스프링.
봄날의 따뜻함을 동경하던, 그러나 평생을 추위에 떨었던 겨울을 닮았던 소녀가, 죽음 이후엔 더 이상 떨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