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영산의 가호.
그 발동 조건은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것이 어떤 구조인지는 대충 알겠다.
즉 가호가 발동하면 나는 영산으로 이동하고, 여기서 일정 시간 동안 수련을 마친 후 원래 세상으로 복귀한다…….
다만 시간을 조금 거스른 시점으로 말이다.
이 말은, 엿 같았던 수련회의 결말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야 표정이 나아졌구나.]
나는 사형의 말에 굳이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형은 무표정을 짓고 있어도 속내를 꿰뚫는 심리전의 대가니, 굳이 감추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물론 본인은 심리를 꿰뚫는 게 아니라 혈색과 맥박, 심장 박동, 호흡을 토대로 참 거짓을 유추하는 것뿐이라 말했지만…….
“그런데 사형, 정확히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너로 하여금 참담한 심정을 느끼게 한 사건, 그게 발생하기 전일 거야.]
그렇다면…….
수련회가 시작한 직후나.
혹은 2차 특별 시험이 시작하기 직전이 될 듯하다.
정확한 시기는 사형도 모르는 듯했지만, 나는 내심 한시름 놓았다.
아예 초기, 그러니까 케이안과 만나기 전이나 보석 산맥 시절로 돌아갔으면 오히려 귀찮아질 뻔했다.
[이제부턴 모두 너에게 달린 셈이다. 영산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모든 게 바뀔 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도, 혹은 전보다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겠지.]
“…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초 치는 말을.”
[무릇 인격체라면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게 좋다. 스승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모르고 처맞는 것보다 알고 처맞는 게 좋다?”
[그래.]
우리는 서로를 보며 잠시 웃었다.
“그럼 100일 동안 사형이 제 수련을 봐주시는 거예요?”
[나는 누구를 가르치는 데에 소질이 없어. 이곳에서의 내 역할은 안내와 말동무 정도지.]
“음… 대련은요?”
[네가 원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
100일이나 있는데도?
나는 그것까지는 묻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살짝 난감한 심정이다.
“그런데 수련이라니……. 당장 뭘 해야 할지 막연한데요.”
[그래서 내가 있는 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그럼 내가 수련 방향에 대해 조언해 줄 테니까.]
“그럴까요?”
사실 나도 내가 겪은 일, 심정에 대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넷째 사형은 대사형과 더불어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 주는 사람이다.
나는 수련회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사형은 한 번도 끼어들지 않고 때때로 고개만을 끄덕였는데, 덕분에 제법 긴 이야기였는데도 한 번도 흐름이 끊기지 않은 채 설명할 수 있었다.
대신 넷째 사형은 얘기가 모두 끝날 때쯤 물어보았다.
[네가 보았다던 마왕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라.]
“음… 일단 어마어마하게 컸어요. 제가 그때 맛이 좀 간 상태라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체감상으론 동산만 했죠. 생긴 건 무슨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것 같았는데, 백골처럼 생긴 가면을 쓰고 있었고…….”
이번에도 사형은 얘기를 모두 듣고, 그 뒤에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외관은 그쯤 하면 됐고. 실력자들을 순식간에 죽였다고 했는데, 그 과정의 상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글쎄요? 과정이랄 것도 없었는데. 그냥 이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나는 마왕이 했던 것처럼 사형에게 삿대질했다.
“지목당한 녀석은 죽었어요. 거무죽죽한 핏물이 돼서 주저앉았죠. 사형이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마법 같은 일이었다?]
“네.”
사형이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얘기로 봐선 그 마왕이란 존재는 완전히 현현顯現한 건 아닌 것 같군. 그런데도 그 정도 권능을 선보였다는 건, 속된 말로 격이 다른 존재란 뜻이다. 애초부터 대사형과 동급의 강자이니 납득 못 할 일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이참에 물어보고 싶은데, 대사형은 얼마나 강한 겁니까?”
[음.]
넷째 사형이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삐빗, 빗, 신기한 소리를 내며 헬멧 내부에 빛이 점멸했다.
[당연하지만, 우리 다섯 사형제 중 가장 강하다.]
“그건 압니다.”
[좀 더 쉽게 비유하면… 둘째 사저부터 셋째 사형, 나, 그리고 너까지. 우리 넷이 힘을 합쳐서 대사형과 싸워도 이길 확률은 절반 이하다. 그마저도 천天 사저가 없다면 승률은 곤두박질치겠지.]
“그 정도예요?”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내 생각 이상으로 격차가 심했다.
나 스스로를 고평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형제들의 경지도 대단히 높은 편이라서 그렇다.
넷째 사형의 말에 따르면, 둘째 사저 이외의 나머지는 대사형과 승부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심지어 지금 대사형은 스승님의 영단靈丹까지 복용했을 터. 평소 단련을 게을리하는 성미도 아니었으니, 내 기억 속 대사형보다 훨씬 더 강해졌겠지.]
“…의욕 뚝뚝 떨어지는 정보, 감사합니다.”
넷째 사형이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원래 얘기로 돌아가지. 네가 겪었다던 수련회에서, 너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크게 둘이다. 첫째가 제사장이고, 둘째가 마왕.]
“그렇죠.”
[우선 제사장은 뚜렷한 공략법이랄 게 없다. 너 스스로 단련해서 경지를 높인다면 언젠가 쓰러뜨릴 수 있겠지. 문제는 마왕인데, 내 추측으로 그 권능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다시 둘이 있어.]
“그게 뭡니까?”
[첫째로는 방어력을 기르는 것이다. 마왕의 짓누르는 권능을 버틸 만큼 육체 강도를 올리는 것이지.]
“…음.”
나는 루크 배드니커를 떠올렸다.
그때 루크는 철혈기사단의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갑옷이 본래의 역할을 발휘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꼭 육체를 연마하지 않아도 돼. 내공의 총량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 될 테지.]
“호신강기護身罡氣의 수법 말이군요.”
내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비효율적이라서 그렇지.
[물론 이 방법은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있다. 만약 마왕의 권능이 애써 구축한 강도를 넘어서면 속수무책으로 죽는 수밖에 없으니.]
동감이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권능을 맨몸으로 받는 것도 어쩐지 꺼림칙하고.
“다른 방법은 뭐죠?”
[마왕의 권능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
나는 사형의 말을 곧장 이해했다.
“회피군요.”
[맞아.]
방어, 혹은 회피.
그것이 대사형이 말한, 마왕에게 대적하기 위한 두 가지 방안이다.
대적이라는 말이 좀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마왕이란 존재를 쓰러뜨릴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넷째 사형은 그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종류로 보십니까?”
[그 정도 존재가 단순히 퍼포먼스를 위해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건 아닐 거야. 그때의 너는 깨닫지 못했겠지만, 아마 대상을 죽이는 데에 갖춰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었겠지.]
“음…….”
[물론 이건 모두 내 추측이다. 직접 본 게 아니니까. 그러니 선택도 네 몫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깊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회피로 하겠습니다.”
애초에 염화제일공의 특성을 고려하면 방어보단 회피가 좀 더 적성에 맞다.
넷째 사형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네가 가장 먼저 연마해야 할 건 각력이다.]
“각력?”
[그래. 다리 힘을 단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하산해라.]
“네… 네?”
갑자기 영산을 떠나라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땅바닥까지 내려가란 뜻인가요?”
[선택은 네게 맡기겠지만, 거기까지 권장하고 싶지는 않아. 목숨을 잃을 테니까.]
“음…….”
[하나 분명한 건 산을 내려가는 것만으로 충분한 수련이 된다는 것이다.]
“음…….”
나는 영산에서 10년을 머물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밑바닥에 다다른 적은 없다.
애초에 이 세상에 땅바닥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기간은 앞서 말했듯이 100일이다.]
“만약 그 기간 내로 내려가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기회를 잃게 되겠지.]
사형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과거가 아닌, 실패했던 현재로 돌아가게 될 거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 *
[이게 도움이 될 거다.]
그리 말하며 사형이 오른쪽 소매를 걷었다.
나는 오랜만에 사형의 피부를 볼 수 있었는데, 물론 검회색의 금속 같은 질감이었다.
투박하다기보다 미려한 느낌의 금속 피부.
그곳에서 곧 균열이 생기더니, 둥실 떠오르며 분리됐다.
철컥, 철컥…….
그리고 분리된 팔의 일부는 멋대로 변형하며 어떤 형상을 갖췄다.
꼭 날아다니는 상자처럼 생겼는데, 날개가 달려 있었고, 전면부는 유리처럼 매끈했다.
[안녕하십니까? RAN-4700 Type-A의 부가 기능, 원격시스템도우미 FAD입니다.]
심지어 이건 말도 할 줄 알았다.
어쩐지 대사형의 노이즈 섞인 목소리와 흡사한 톤이었다.
“이 날아다니는 상자는 뭐래요.”
[방금 말했다시피 원격 도우미지. 이번 하산에서 여러모로 널 도와줄 거야.]
“도와준다니…….”
[대표적인 기능은 원거리 호출이 있다. 이걸 통해 나와 대화할 수 있단 뜻이지.]
“아하.”
그러니까 통신 수정 같은 용도인 듯했다.
[포기하고 싶다면 이걸로 날 불러. 계속 보고 있을 테니까.]
포기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 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사형을 뒤로하고, 곧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100일이란 시간은 짧지 않다.
가령 보석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하산한다고 가정해도, 이 정도 시간이 있다면 내려가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첫째 날.
나는 위태로운 벼랑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하루를 꼬박,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이다.
삐빗-.
[현재 진행도: 0.06%.]
“…어.”
당연하지만, 느린 속도로 내려간 게 아니다. 동네 뒷산 정도라면 진작 땅을 밟았을 정도의 속도였다.
그런데 천분의 일도 진행하지 못했다니.
“…좋아.”
나는 생각을 바꿨다.
무슨 마실 나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산책하듯 느긋하게 굴 때가 아니긴 하다.
이튿날은 속도를 훨씬 높였다.
벼랑길을 질주하듯 내달린 것이다.
살짝만 발을 헛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낙하하겠지만, 어쩐지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 할 듯싶다.
그렇게 한 이틀을 내달리니, 곧 산봉우리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다.
삐빗-.
[현재 진행도: 0.31%.]
[FAD의 한 줄 평: 굼벵이도 비웃을 만큼 느려터졌군요. 오홍홍.]
“이 새끼가?”
사형의 육체 일부(?)만 아니었다면 부술 뻔했지만…….
나는 화를 가라앉히고,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의문 하나.
영산이 이렇게 높았던가?
내 기억으론 아니었다.
때때로 스승님의 명령이나 수행으로 산의 중턱까지는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어쩐지 그때와는 느낌도, 주변 풍경도 다른 느낌이다.
“요괴의 기척도 안 느껴지고…….”
이번 하산에 있어 가장 큰 골칫거리는 영산에 자리 잡은 요괴 무리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단체로 이사라도 간 건지, 이틀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의문 둘.
“배가 안 고프잖아.”
사흘이나 밥을 안 먹었는데, 허기는 물론이고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별개로 육체가 지치는 듯한 느낌은 들었지만, 회복이 빨랐고 상태를 보니 잠도 자지 않아도 될 듯하다.
온전히 하산에만 집중하면 되는 최고의 조건이었지만… 이 정도 속도로는 백 년이 지나도 땅을 밟지 못할 거다.
“헥, 헥…….”
며칠을 쭉 내달린 결과, 마침내 내공이 바닥을 보였다.
나는 잠깐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서 휴식했다.
‘영옥 덕분에 이제 내공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은 어림도 없는 듯했다.
“후우우…….”
밟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빛 하늘을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에서 올려다보며 잠시 숨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이건 또 뭐야.”
의문 셋.
내공이 전혀 회복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급히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운기조식을 시작했지만, 소모된 내공은 불어날 기미가 없었다.
마치 단전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까.
즉.
“…이것도 영산이 주는 페널티 중 하나란 건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내공 없이 땅바닥을 밟으란 건가?
삐빗-.
[RAN-4700 Type-A을 호출하시겠습니까?]
[Y / N]
“…그게 누군데?”
[루안 배드니커 님이 넷째 사형이라고 부른 개체입니다.]
하.
나는 입가를 비틀며, 화면에 뜬 N을 꾸우욱 눌렀다.
“…좋다 이거야.”
어차피 쉽지 않을 건 예상했다.
나는 안개에 덮인 벼랑길을 노려봤다.
“이 정도는 돼야 우리 영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