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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98화 (98/172)

98화

영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눈에 담은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형태는 알고 있다.

위태로울 만큼 가늘고 길쭉한 바위산.

당연히 하산을 위해 내려가는 길도 위태로운 벼랑길일 수밖에 없었는데-.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로써 7일, 즉 일주일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진행도는…….

[현재 진행도: 1.44%.]

“…조진 것 같은데.”

이 속도론 아예 안 쉬고 쭉 내달려도 땅바닥 구경도 못 한다.

슬슬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단 뜻인데……. 문제는 ‘어떻게’다.

“…음.”

한 가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기는 하다.

저벅-.

나는 위태로운 벼랑길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길이 보였다.

영산의 벼랑길이 산의 표면을 타고 올라가는 회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면…….

정직하게 걷는 것보다, 그냥 뛰어내리는 게 훨씬 빠를 터.

“내공 없이 되려나…….”

일단 배드니커 본가 저택 옥상보다 더 높아 보이기는 했다.

아무리 단련한 몸뚱이라고 해도 안전한 높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

언제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며 살았다고.

탓.

나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쐐애액-. 공기 저항 때문에 눈을 뜨기가 어렵지만, 나는 아래를 똑바로 직시했다.

당연하지만 도약보다 중요한 건 정확한 착지다.

착지 지점은 위태롭고 폭이 좁은 벼랑길이다.

잘못 헛디디면 ‘어이쿠! 실수했네!’ 정도로 안 끝난다.

쿵…….

다행히 나는 온전한 자세로 착지를 마쳤다.

발바닥부터 찌르르한 고통이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왔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진행도: 1.51%.]

[FAD의 한 줄 평: 비겁한 편법! 잔머리를 잘 굴리시네요!]

“시끄러.”

나는 FAD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 * *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현재 진행도: 9.84%.]

순식간에 10분의 1을 지났다.

이 방법을 채택한 지 고작 닷새, 하산을 시작하고는 열이틀이 지났을 때 거둔 성과다.

‘그럭저럭 다리 힘도 강해지는 것 같고.’

FAD는 이 방법 보고 편법이니 어쩌니 했지만, 실은 이게 정석적인 공략법이 아닐까?

…그게 틀린 생각이란 걸 이튿날 아침에 깨달았다.

삐빗-.

[현재 진행도: 10%.]

기념할 만한 10퍼센트를 달성한 순간이었다.

쿠우웅!

“억……!?”

나는 불현듯 느껴지는 압력에 개구리처럼 땅에 납작 엎어지고 말았다.

“이거언, 또오오, 뭐어어야아아……!”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라…….

갑자기 몸무게가 열 배는 불어난 것처럼 무거워져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하, 하하…….”

이 꼴로는 달리기는커녕, 한 발자국씩 천천히 걷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시이이, 바아알-!”

헛웃음을 흘리던 나는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우리 영산, 잠깐 안 온 사이에 우라지게도 바뀌었구나……!

쿵……! 쿵……!

나는 거인족이라도 된 것처럼 일보씩 힘을 줘서 전진했다.

당연하지만, 육체 부담이 장난이 아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더 이상 벼랑길에서 뛰어내린다거나 하는 편법을 쓸 수는 없다.

지금 상태로 뛰어내렸다간 전신이 곤죽이 되거나, 혹은 발을 헛디뎌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거다.

그럼 다시 정직하게 벼랑길을 걸어야 하나?

이 천근처럼 무거운 몸뚱이로?

…나는 시험 삼아 걸어 보았다.

“그그그극……!”

입에서 침이 줄줄 흐른다.

육체를 움직인다기보다 비트는 것 같은 기괴한 동작.

그래 봤자 열다섯의 몸뚱이.

보석 산맥과 수련회를 거쳐 기초 체력이 향상됐다고 해도, 아직 많이 허약하다.

고작 스무 걸음을 나아가고, 나는 그 자리에 다시 벌러덩 누워 버렸다.

“허억, 헉…….”

무슨 20km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전신에서 땀이 뻘뻘 났고 다리, 특히 허벅지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염병…….”

억지로 고개를 비틀어 벼랑길 아래를 바라봤다.

여전히 안개밖에 안 보인다.

아직 땅바닥은 보일 생각도 하지 않는데, 스무 걸음 걸을 때마다 이 지랄을 떨어야 한다면…….

100일이 아니라 1,000일이 있어도 부족하다.

‘100일…….’

정확히 말하면, 이제 87일 남았다.

그 시간 안에 정말로 땅바닥을 밟을 수 있을까?

불가능不可能.

순간적으로 그 단어가 머릿속에 나타난 순간.

삐빗-.

[RAN-4700 Type-A을 호출하시겠습니까?]

[Y / N]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약간 멍한 정신으로 FAD가 띄운 화면을 보았다.

“…야.”

[네.]

“널 통해서 넷째 사형을 호출할 수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지금 내 모습도 넷째 사형이 다 보고 있는 건가?”

[…….]

FAD가 처음으로 침묵하더니.

[그렇습니다.]

그리 대꾸했다.

“…….”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머리가 더 이상 허튼 생각을 하기 전에 양 뺨을 철썩 때렸다.

찰싹!

“…후우우.”

이런 한심한 꼴을, 다른 사람도 아닌 넷째 사형한테 보일 수는 없다.

내게 있어 사형제는 친형제 같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경쟁자였다.

물론 넷 모두 지금의 나로선 오르기 힘든 까마득한 나무였지만, 언젠가는 사형제 모두를 뛰어넘고 싶다.

이건 대사형이 엇나가기 전에도 줄곧 품고 있던 생각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RAN-4700 Type-A을 호출하시겠습니까?]

[Y / N]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설마 이 메시지를 띄우는 건 상자가 아닌 사형의 판단은 아닐까.

이쯤에서 내가 포기할 거라 예측한 건 아닐까.

넷째 사형이 자주 돌리는, 그 시뮬레이션인가 뭔가로.

그렇게 생각하니.

“…열 받는구만.”

난 배배 꼬인 성격의 소유자다.

이상하게 기대받을 때보다 무시당할 때 더 의욕이 솟구쳤다.

그러니 반골 정신은 내 중요 요소 중 하나다.

털썩!

나는 벼랑길에 벌러덩 누웠다.

몸뚱이가 무거워도 대자로 뻗으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일단 머리부터 식히고…….’

우선 내게 안 좋은 점부터 나열해 보자.

50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목적지.

회복되지 않는 내공.

그리고 긍정적인 점은…….

무언가 먹을 필요 없음.

자지 않아도 됨.

육체 회복이 빠름.

“…어?”

거기서 어쩐지 나는 살짝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굼벵이처럼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었다.

서 있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척추뼈가 뻐근하구만…….’

나는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을 애써 무시한 채 염화제일공의 운공을 시작했다.

화륵…….

전에도 말했듯, 염화제일공의 부차적인 효과 중 가장 뛰어난 건 육체 재생력인데.

그 효과가 영산의 효과와 맞물린다면-.

“…아.”

예상대로다.

한계에 이르러 찢겼던 근육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뭔 트롤도 아니고…….”

내가 봐도 징그러울 만큼의 회복력이다.

이 정도면 손가락 몇 개 정도는 잘려도 순식간에 재생하지 않을까? 물론 시험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복된 몸뚱이로 다시금 쿵쿵 발걸음을 내디딘다.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피로가 중첩돼서 몰려왔고, 전신은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아직…….’

나는 육체의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정말 더는 못 걷겠다 싶은 시점에서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채… 다시 운공.

꼬박 하루 동안 그 과정만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벅-.

나는 어찌어찌 평범한 걸음을 되찾았다.

아직도 뭔가 척추나 다리를 삔 것 같은 모양새긴 한데, 어제의 광대 같은 걸음걸이에 비하면 양반이다.

“…다리 힘이라.”

나는 힘이 바짝 들어간 허벅지를 주먹 망치로 두드렸다.

더럽게 힘들지만, 일단 방향은 보였다.

* * *

의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밤과 낮의 경계가 없는 영산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깨달을 방법은 있다.

까아아아악-.

하루에 딱 한 번.

안개 너머에서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까마귀? 독수리?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내가 생전 본 적 없는 괴조怪鳥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나한텐 고마운 녀석이다.

시간의 흐름이야 FAD 녀석 때문에 느낄 수 있지만, 저 울음소리 덕분에 하루가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산 전용 암탉이랄까.

“읏차…….”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로써 30일, 딱 한 달이 지났다.

이 시간 동안 어떤 변화가 생겼느냐.

일단 내 육체는 제법 단련됐다.

어느 정도냐면, 무려 10분을 전력 질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물론 이후엔 그 자리에 쓰러지듯 엎어져서 급히 운공을 시작해야 하지만…….

그 과정을 반복하며 깨달았다.

달리는 것도 달리는 거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운공이다.

100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때문일까.

최근엔 보다 빨리 운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현재 진행도: 17.6%.]

아직 20퍼센트도 못 채운 진행도도 그러한 마음에 불을 붙이는 느낌.

갈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빠듯하다.

‘요 밑에 무슨 예상 밖의 사태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몸무게가 불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운공이라.”

본래 모든 운공의 목적이란 기본적으로 내공의 증진이다.

당연히 핵심이 되는 구결 또한 그에 특화되어 있는데-.

그러니 염화제일공의 뛰어난 회복력, 육체 재생력은 오히려 부차적인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나의 목적과는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랄까.

내공의 증진보단 회복력 쪽이 더 극대화됐으면 하는 심정이니까.

“…….”

나는 실행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최근엔 종일 이 건으로 깊게 고민했다.

달리고, 운공하고, 잠깐 쉴 때까지 이 생각을 떼놓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것 말고는 달리 수가 없다.

“…구결을 살짝 손볼 수밖에.”

가볍게 말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심법의 구결을 수정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알고 있다.

내공이 순환하는 건 인체 내부이고, 당연히 그 과정에서 급소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몇 번이고 지나간다.

만약 수정한 구결이 그러한 부분을 고려하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사건이 터진다면…….

…게다가 이 무공이 어딘가에 하자가 있는 심법인 것도 아니다.

편의상 염화제일공이라고 부르는 이 무공의 본래 이름은 고금제일공 화 속성이며-.

백일식과는 다르게, 하나부터 열까지 스승님이 창안한 신공절학이다.

고작 나 따위가 수정하는 게 얼마나 오만하고, 미친 짓인지는 잘 안다.

알지만, 그래도 한다!

그래도 지금 내 수준이라면, 살짝 수정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우웩!”

어림도 없었다.

임의로 수정한 구결대로 운공을 하니, 전신 기맥이 뒤틀렸고 나는 그 반동으로 새빨간 선혈을 토해 내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수십 일 동안 병석에 누운 채 요양을 해야 할 내상이었지만…….

망가진 기맥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금방 재생했다.

내장의 손상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내 예상이지만, 이곳에선 일단 죽지만 않는다면 어떤 상처건 다 치유가 되는 것 같다.

즉 딱 이 시점에서만 할 수 있는 미친 짓이란 건데.

“…세상에 이렇게 무식한 무공 개량이 또 있을까.”

이건 뭐 스스로의 육체로 인체 실험을 진행하는 정신 나간 연금술사도 아니고.

그래도 무식한 만큼 직관적이라서, 나는 즉각적으로 구결의 오류, 혹은 누락이 된 요소를 깨닫고, 수정할 수 있었다.

동시에 멈추지 않고 생각을 이어 간다.

염화제일공은 어째서 육체 회복력에 뛰어난 걸까?

그것은 이 구결로 생성되는 내공이 불꽃의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불꽃이란 흔히 몸을 녹이는 온기, 생명, 재탄생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무분별한 짓태움을 두려워하는 의미에서 겁화劫火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 내 견해론 오행五行 중에서도 가장 모순적인 원소라고 생각한다.

스승님이 창안한 염화제일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패도적인 무공이다.

그러니 이 무공의 가장 큰 효과란, 사용하는 초식의 위력이 극대화된다는 점…….

염화제일공과 떼놓을 수 없는 백일식이 파괴적인 무공인 이유가 되겠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염화제일공의 시작점이 불꽃이라면, 그것의 온화한 부분에 주목해도 되지 않을까.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아닐 테니까.

‘…잠깐만.’

그 순간 불현듯 뇌리를 스친 건 내 골머리 중 하나인 백일식 후반부 초식이었다.

무신은 그 후반부 초식을 전반부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무릇 싸움에서 가장 자유로워야 할 건 공방의 전환이다.

그러니 후반부 초식을 공격이 아닌 방어, 혹은 회피에 치중한 초식으로 만든다면…….

그리고 그 전환이 무엇보다 빠르고, 자유로워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백일식이란 무공의 완성 형태가 아닐까?

“하하…….”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영감이란 뜻하지 않은 순간에만 찾아온다더니, 딱 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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